8. 법정 스님 평화관

  길상사 내 법정 스님의 유골이 담긴 곳. 현대불교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태 전, 4월 27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이 손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올 때 가슴 벅차오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같은 해 9월, 15만 평양시민 앞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더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면서 “우리는 오천 년을 함께 살고 칠십 년을 헤어져 살았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칠십 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라고 외쳤다.

법정 스님, 평화운동 강조
자비, 평화 실천윤리 제시
북한과의 협력의지 재확인

그때만 하더라도 이맘때면 개성공단은 열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옥신각신하다가 다시 얼어붙은 남북미. 평화로 가는 길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새기고 있다. 풀리는 줄 알았던 남북관계가 다시 엉킨 일은 이번만이 아니다.

현대 종교와 정치가 할 일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심는 일이다

1989년 법정 스님은 “지난 연초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곧 통일이라도 될 듯이 정부고 민간이고 할 것 없이 온 나라가 한동안 술렁거렸다. 성급한 사람들은 올가을쯤은 금강산으로 단풍 구경이라도 가게 될 듯이 들뜨기까지 했다. 그 뒤 소식은 어떤가? 문익환 목사와 소설가 황석영 씨가 불쑥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나라 안이 온통 떠들썩했다. 그러나 문 목사는 구속 중이고, 황씨는 제3국으로 나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모스크바나 북경 또는 여타 공산권 나라를 다녀오면 개선장군처럼 인정받고 또한 그렇게 처신하는데, 막상 한 겨레가 같은 언어와 문자와 풍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평양에 다녀오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1971년에는 허리가 잘린 한반도에서 종교인이 먼산바라기 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씀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사실상 전쟁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 현실을 돌아볼 때 불안한 그림자는 이 구석 저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인이 청산백운이나 바라보며 초연하려 한다면 그런 종교는 없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일체중생이 부딪치는 문제는 곧 종교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평화 염원은 오늘날 종교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틈날 때마다 “부처님 제자로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1계로서 살생 금지를 받들며 살아왔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계율을 몰랐다면 얼마나 많은 허물을 지었겠는가”라고 돌아보던 스승은 우리나라 군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불교계가 참전군인 무운장구를 비는 기도를 했을 때 이렇게 드잡이한다.

“전국 사원에서는 조석으로 한 시간씩 월남 전선에 가 있는 장병들을 위해 ‘사기왕성, 임전무퇴, 연일전첩, 국위선양…’ 하라는 기도를 하라고 총무원 당국은 지시했다. 이것은 적어도 불교도들이 해야 할 축원은 아니다. ‘한시바삐 싸움을 그쳐 더는 피를 흘리지 말고 온 누리가 평화롭게 살아지이다’하는 염원이 앞서야 할 텐데, 그저 무운이 장구하라니 무슨 망령된 말인가. 사원은 지혜와 자비를 기르는 도량이며, 불자들은 수도에서 얻은 지혜와 자비로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구제하라는 것이지, 같은 인간끼리 피를 찾는 싸움에 부채질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 글 때문에 승적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던 스승은 “석가모니 가르침은 평화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인류 역사에 사라질 수 없는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실천 윤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자비다. 초기 교단에서는 국가 권력에 전쟁을 포기하도록 여러 가지로 노력한다. ‘원한은 원한으로 풀릴 수 없다. 원한을 쉬어버림으로써 풀린다’고 했다. 마가다 임금 아자타삿투가 이웃 밧지국을 쳐들어가려고 의견을 물었을 때, 부처님은 무익한 전쟁을 막아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죽이지 않고 해치지 않으며, 이기지 않고 적에게 이기도록 하지도 않으며, 슬프게 하지 않고 법답게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맞서 싸우기보다는 온갖 방편과 지혜로써 화평하라고 했다”란 말씀도 남긴다.

또 <말과 침묵>에서는 <대살차니건지소설경>에 나오는 ① 적이 지닌 군사력이 우리와 맞먹는지 나은지를 살펴 “힘이 엇비슷”하다면 ‘전쟁으로 서로 피해를 볼 테니 이로움이 없다. 만약 적이 더 뛰어나다면 적은 살아남고 이쪽은 멸망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적국 임금과 가까운 사람이나 어진 이에게 다리를 놓도록 해 화해하고 전투를 멈춰야 한다. ② “우리 힘이 뛰어날 때”는, 맞서 싸우지 말고 저쪽이 하는 요구를 들어주고 전투를 멈춰야 한다. ③ “적이 우리보다 뛰어날 때”는, 술책을 써서 이쪽과 싸우기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줘, 적이 두려움을 갖고 전투를 그만두도록 해야 한다는 보기를 들면서 ‘정의로운 통치자란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우리 힘이 셀 때 저쪽 요구를 들어주고 전투를 멈추라”는 말씀이다.

스승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이런 말씀도 했다.

“12년 동안이나 끌어오던 그 추악한 전쟁이 막을 내렸다.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 목숨과 파괴된 질서며 불타버린 재산은 그 어떤 재난에서 입은 피해보다도 가공할만했다. 그토록 처참하고 추악한 싸움에서 남는 것은 상처 입은 인간이다. 우리는 이 시대와 장소에서 함께 살고 있는 형제들이다. 같은 나무에 열린 열매들이다. 우리가 같은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연 농도가 짙어서다. 그 중에도 같은 지역에 살게 된 것은, 불교 표현을 빌린다면 몇 생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좋으나 궂으나 공동 운명체라는 멍에를 함께 메고 있다. 우중충한 거리에서 서로가 눈치를 살피면서 떨고 있는 것은 바깥 기온이 낮아서가 아니다. 이웃 사랑이 아쉬워서다. 그 체온이 식어가기 때문이다. 현대 종교가 할 일은, 그리고 정치가 할 일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심는 일이다. 그 길을 지나서 이해와 신뢰와 협력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7년을 괴롭히고 35년 동안 우리를 짓밟아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나라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나라다. 2018년에는 750만이 넘는 사람이 찾고, 두 나라 사이가 나빴던 2019년에도 550만이 넘는 사람이 찾았다. 그런데 피를 나눈 남과 북은 사람이 오고 가지 못한다.

1982년 스승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요한 첫째 편지 4장 20절’ 말씀을 들어 우리를 일깨운다. 1985년에는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이 크고 작은 일에 구애 말고 한 달에 한 번쯤 서울이나 평양에서 회식하면서, 나라와 겨레 재결합을 진지하게 의논한다면 우리 상황은 단박 부드러워질 것이다. 이제는 우리네 통치에도 시(詩)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우리 못지않게 지독한 외침을 겪은 베트남은 중세와 근대에 송, 원, 명, 청을 차례로 물리쳤으며, 근현대에는 프랑스, 일본, 미국, 캄보디아, 중국과 큰 전쟁을 여섯 번이나 치렀지만 끝내 물리친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긴 베트남은 패색이 짙은 상대가 패배를 받아들이고 물러서면 전쟁 끝을 보려고 쫓아가서 죽이며 약탈을 일삼지 않고 화해 손길을 내밀었다.

천 년이나 중국에 지배받다가 938년 독립한 베트남은 그 뒤로도 중국이 자주 쳐들어와 시달리지만 물리친다. 그때마다 물러가는 적군에게 물과 양식, 특산물을 주어 보내고 어떤 때는 배 500척을 내어주기도 한다. 20세기 일본과 프랑스 공동지배를 받다가 프랑스가 밀려나게 되자 쫓겨가는 프랑스인들을 나서서 도왔다.

‘나라를 지키려고 어쩔 수 없이 치를 뿐인 전쟁’이었으니 물러가겠다고 하면 서둘러 길을 터주며 이웃으로 어울려 살아갈 뒷일을 떠올렸다는 얘기다.

국방력이 세계 6위인 우리나라와 25위인 북한, 누가 누구를 아울러야 할까.

생각이 다르더라도 미워하지 않겠다
우리는 협력해 나라를 구해야 할 처지

코로나 19로 벼랑 끝에 내몰린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를 놓고 입씨름이 한창이다. 나랏돈을 통 크게 풀지 않고는 숨통이 트이지 않을 것이라는 이들과 우리 나랏빚이 적지 않은데 뒷감당을 어찌하려느냐는 이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정부 예산에서 10%에 이르는 돈이 국방비로 나가는 우리나라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다섯 해 동안 쓸 국방비가 무려 270조 7천억 원이나 된다. 2017년 우리 국방비가 40조 3천억 원일 때 북한도 10조 원이나 썼단다. 2018년 북한 국민총소득(GNI, 명목)이 35조 8,950억 원이다. 남한 1,898조 4,527억 원에 견주면 3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북한이 코로나19 사태로 겪는 어려움은 끔찍할 것이다.

총선에 나선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장은 지난 4월 4일 “생각이 다르더라도 미워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우리(여야)는 협력해서 나라를 구해야 할 처지”라고 했다. 좋은 말씀이다. 어려움을 넘어서는데 여야가 다를 수 없으며 남북이 다를 수 없다. 그 마음으로 남북이 머리 맞대고 국방비를 반은 줄여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남북 사람 살림살이를 아우르면서 “칠십 년 적대를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는 큰 걸음”을 내디딘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참에 유엔을 설득해 개성공단에서 방호복과 마스크를 만들어 미국 사람들이 코로나19로 겪는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남북이 힘을 보태겠다고 나서면 더 좋으련만.

〈법정 스님 눈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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