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선종 오대·송대 사회에 미친 영향

선종만이 지속적인 발전
당말 오대 남종선이 주류
대혜종고가 ‘간화선’ 제창
선종, 중국불교 흐름 주도

 

양송(兩宋)에서 선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사회적인 요인은 사대부들이 보편적으로 선을 좋아했던 시대적 상황이다. 사대부들이 선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초에 시작되었지만, 당나라 중엽에 이르러서 성황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러한 사상적 흐름의 정서는 선종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큰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풍토는 오대 및 송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선종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대십국시대는 당나라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선학의 황금시대가 막을 내릴 때쯤에 서서히 그 서막이 열렸던 시기의 반세기 즉 50여 년의 짧은 기간을 말한다. 이때는 지방의 군웅들이 막후 실력을 겨루면서 할거하던 시기로서 매우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때 불교의 각 종파는 이미 쇄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만 선종만은 여전히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 8대 종파 가운데 선종의 성립은 비교적 늦은 편이지만, 선종을 창시한 역대 조사들은 마음속으로 제종파를 초월하고 싶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울러 선종은 제종파를 비평하는 태도를 가지고 선종을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당말 오대에 이르러서 선종은 대부분 남종선이 주류가 되었다.

오대불교는(907~959) 대략적으로 50여 년 동안을 가리킨다. 이 기간 동안에 후량(后梁) 후당(后唐) 후진(后晉) 후한(后漢) 후주(后周) 등 5개 시대의 불교를 말한다. 이 시기의 중국은 또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방은 5대로 교체되었고, 남방은 남오(南喬) 남당(南唐) 오월(喬越) 남촉(南楚) 전촉(前蜀) 후촉(后蜀) 남한(南볶) 남평(南平, 쐽南) 민국(츙벌) 북한(北볶) 등 십국으로 분열되었다. 북방의 혼란한 정세로 인해서 사회질서는 파괴되고, 따라서 조정은 불교에 대해서도 엄격한 제한 정책을 폈다. 상대적으로 남방의 각국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서 제왕들도 불교를 열심히 믿거나 외호를 하였다. 반대로 북방은 겨우겨우 불교를 유지해가는 반면에, 남방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대시기로 접어들면서 중국 선종은 이미 점점 퇴락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전국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당말 중국 북방에서는 위주(魏州ㆍ지금의 하남성 안양시)에서 임제종 선사인 흥화존장(興化存챷ㆍ830~925) 계통의 활동이 비교적 영향이 컸다. 흥화존장이 자주 사용했던 봉(棒)과 할(喝) 형식의 선법을 시작으로 그의 제자들은 여주풍혈산(汝州風穴山)을 전법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후 계속해서 송나라 초까지 여주는 여전히 임제종의 근거지가 되었다. 조동종의 조산본적(曹山本寂ㆍ840~901) 계통은 매우 안정적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 이외에, 운거도응(雲居道膺ㆍ835~902) 계통도 여전히 강남의 운거산에서 크게 선법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화엄휴정(華嚴休靜) 및 그의 제자들은 낙경(洛京) 일대에서 동산양개(洞山良价ㆍ807~869) 선법을 전승하고 있었다. 이 때에 설봉의존(雪峰義存ㆍ822~908)은 복건성 일대를 거점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의 문하에 운문문언(雲門文偃ㆍ864~949)은 “건곤을 포용해서 덮고(函蓋乾坤), 스스로 미세한 것조차 없애고(自機銖兩), 외연을 관계하지 않는다(不涉外緣).”는 삼구로서 대중들을 인도하면서 운문종을 창립했다. 또 다른 제자인 법안문익(法眼文益)은 화엄사상 및 천태사상의 이론을 융화해서 법안종을 창립했다. 여기에 이르러서 선종은 이미 몇 개의 파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림, 강병호

 

오대의 각 종파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웅들의 세력의 지지를 받았는데, 후당의 장종(庄宗)의 예경을 받은 흥화존장, 남당의 이승(李昇)의 신봉을 받은 법안문익, 초왕 마은(馬殷)으로부터 존중을 받은 석문헌온(石門獻蘊), 오월왕 전류(錢?)가 온 마음으로 공경했던 경청도부(鏡淸道符), 전유의 아들인 전숙(錢굆)으로부터 중시를 받았던 천태덕소(天台德昭), 민왕(?王)인 왕심지(王審知)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은 설봉의존(雪峰義存) 및 현사사비, 남한왕(南漢王)인 류은(劉隱)으로부터 공양을 받았던 영수민철(靈樹敏鐵) 등이 있다. 선종은 이러한 많은 군웅들의 지지 및 각각 선사들의 노력이 더해져서 비로소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갔다.

송나라는 문치를 표방해서 문인들에 대한 대우가 최고조에 달했고, 문인들 역시 문자 유희 내지 향유를 맘껏 누리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한 배경 하에서 문자선이 발전하고 형성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반면 문자선의 유희에 빠져서 실천수행을 등한시 하는 풍조를 목격한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제창한 것도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대적 요구와 상황에 부응한 것이다. 동시에 송나라 사대부들의 선법에 대한 관심과 행동은 많은 유학자들을 선종으로 끌어 들이기 시작했고, 선종의 심성이론은 송명이학에 깊은 영향 주기도 했다. 명나라의 어떤 사람은 “송유(宋儒)의 배움은 모두 선에 입문하는 것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도 했다. 때문에 선종의 선기(禪機) 참선(參禪) 등은 한때 송대의 문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풍조가 되기도 했다.

<중국선종통사>에서 송대 사대부와 선종의 연관관계를 두 가지로 집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선종을 통한 불교의 철학세계관 심성수양관(心性修養觀), 통속적인 어록의 표현 방법 등이 신유학에 풍부한 사상적 자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번째로는 선종을 통해서 심리적 평행 및 안정감을 얻었고, 때로는 총림을 도피처로 삼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양송 사대부들은 잦은 외세 침입으로 인한 사회적인 불안감 등 극심한 피로감을 선종에서 위안을 받았고, 동시에 선종에서 그 활로를 찾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시대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송대 선종이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이 이전과 다른 점은 사대부 계층 인사들에게 준 영향이다. 본래 선종은 하층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송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역전 된 것이다. 즉 사대부들에게 광범위하게 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근거로 담선 참선 및 공안어록에 대한 음미, 선문답에 대한 풍조 등은 이들을 충분히 매료시켰을 뿐만 아니라, 선종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선종은 송대에 이르러서 문자선, 간화선 묵조선 등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원대에 이르러서는 원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믿으면서 선종은 한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원대의 북방 선종은 조동종의 만송행수를 필두로 번창을 하였고, 상대적으로 임제종은 남방에서 유행을 하였다. 물론 북방에서 임제의 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미미했을 뿐이다.

양송은 비록 유교사상을 숭배했지만 선종도 비교적 흥성했던 시기이다. 선종은 사상적으로 삼교융화의 특징을 바탕으로 선교일치 선정일치(禪淨一致) 삼교일치(三敎一致) 등을 주장하면서 중국불교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이러한 흐름을 최초로 주도한 인물은 법안종의 영명연수선사이다. 이때 위앙종은 이미 쇄락할대로 쇄락해서 다시는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남방으로 그 선법을 넓혀가기 시작 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임제종은 강서를 중심으로 선문 중에서 가장 활발한 하나의 문파가 되었다.

그 후 선종은 중국의 각 방면에 많은 영향을 남기게 되는데, 먼저 종교방면에서 보면 중국에는 옛날부터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의 전통종교는 제사(祭祖), 경천(敬天: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ㆍ天命思想)과 도교가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불교만큼 전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종교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도교는 선종의 총림제도를 모사해서 도교의 총림과 청규제도를 모방하기도 했다. 곧 <도문십규(道門十規)>에 보면 “근세에 선으로서 성종을 삼고, 도로서 명종을 삼는다.(近世以禪爲性宗, 道爲命宗)”고 하고 있다.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선종에서 주장하는 자성과 즉심즉불(卽心卽佛) 사상은 송명이학(理學)에 원천이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주희(朱熹), 왕양명(王陽明) 등은 모두 선종을 통해서 영감을 얻어서 본인들의 사상적 체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특히 주희는 늘 <대해어록>을 끼고 다녔다고도 한다. 이외도 주희의 ‘이기론(理氣論)’은 불교의 방법론은 묘사하였다고도 하며, 또 그의 ‘이일분수(理一分殊)’는 그냥 화엄사상을 옮겨놓은 것 같다. 그는 또 말하기를 “지금은 禪者가 되지 않으면, 저 깊은 곳에 일찍이 이르지 못하고, 비로소 깊은 곳에 이르러야 바로 禪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왕양명은 명대의 인물이다. 역시 <단경>에서 주장하는 ‘본성시불, 리성무별불(本性是佛, 離性無別佛)’에서 영감을 얻어서 ‘양지(良知)’라는 사상적 개념을 창출하기도 했다. 즉 “양지(良知)는 다만 천지자연의 명각(明覺)을 발견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의 진실하고 성실한 연민지심을 갖는 것으로, 문득 이것이 본체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심외무물, 심외무리, 심외무사(心外無物, 心外無理, 心外無事)는 글자만 바꾼 그의 심학 개념이다. 그의 ‘사구게’도 매우 유명한데 유식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이외도 도교에서도 선종을 통해서 많은 영감을 얻어서 비슷하거나 아니면 아예 글자만 바꾸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명대 이후는 선을 논하면 도교를 함께 논하였으며, 곧 사회에서 이미 선과 도를 묶어서 이야기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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