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8회 고려시대 차 문화



고려시대 대표적 차문화
이규보 시 등에도 나타나
극품 차·노련한 점다 등
사원 중심으로 규모 다양

高士圍碁(고사위기, 전 공민왕,1330-1374), 조선초, 견본채색 137.2x65.0, 김용두 소장

고려시대 차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는 명전(茗戰) 놀이라 할 수 있다. 이 놀이는 승려들이 주도했던 품다회(品茶會)의 일종으로, 문인들도 초청하여 차의 세계를 감상했다. 명전 놀이의 승패는 점다(點茶)한 차의 거품이 얼마나 보존될 수 있는가에 달렸고 이는 팽주(烹主:차를 다리는 사람)의 차에 대한 안목과 격불(擊拂) 솜씨, 물과 차에 알맞게 물을 끓일 수 있는 실력에 따라 우열이 가려진다. 그러므로 명전 놀이는 참여하는 사람의 가장 좋은 차와 물, 찻그릇, 그리고 격불 솜씨를 드러내는 행사였으니 이는 승방의 풍류요, 차를 내는 점다(點茶)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고려에서 유행했던 명전 놀이는 원래 송의 투다(鬪茶)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고려인의 취향에 따라 점차 고려적인 색채를 완성해 나갔을 것이다. 특히 사원이 주도했던 명전은 이연종(李衍宗)의 〈박치암이 차를 보냈기에 감사를 표하며(謝朴恥菴惠茶)〉에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년 시절, 영남사에 객이 되어(少年爲客嶺南寺)/ 자주 승려를 따라 명전에 참여했지(茗戰屢從方外묙)/ 용암 벼랑, 봉산 기슭에서(龍巖巖畔鳳山麓)/ 승려를 따라 대숲에서 매부리처럼 여린 차를 따서(竹裏隨僧摘鷹萃)/ 화전(火前)에 만든 차를 가장 좋다고 하는데(火前試焙云最佳)/ 더구나 용천봉정 샘물까지 있음에랴(況有龍泉鳳井水)/ 사미승의 날랜 삼매의 솜씨로(沙彌自快三昧手)/ 찻잔 속에 새하얀 거품을 쉬지 않고 만드네(雪乳飜췛點不已)/ 돌아와 벼슬길의 풍진에 매달려(뺸來從宦走風塵)
세상살이 이리저리 두루 맛보았네(世味遍嘗南北嗜)/ 이제 병들어 쓸쓸한 방에 누웠으니(如今衰病臥閑房)/ 번잡한 세상사야 내 상관할 일이 아니거늘(碌碌營營非我事)/ 양락도 순갱도 생각이 없고(不思羊酪與蓴羹)/ 대궐이나 풍악도 부럽지 않네.(不羨華堂擁歌吹)

이연종의 시는 원래 1478년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시 내용 중 어린시절 영남사에서 승려를 따라 명전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연종이 참여했던 명전은 바로 승려가 주관한 차 모임이었던 셈인데, 그가 본 명전의 정황은 사미승이 날랜 솜씨로 차를 냈다는 것이며 이를 삼매라고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사미승은 “찻잔 속에 새하얀 거품을 쉬지 않고 만드네”라고 하였다. 새하얀 거품이란 백차(白茶)를 말하며, 이는 12세기 고려에서 선호했던 극품의 단차이다. 당시 승려들이 주도했던 명전놀이는 이규보(1168~1241)의 〈덕연원에서 머물며 화답하다(和宿德淵院)〉에 “늙은 중은 일도 많구나./ 차 맛을 평하랴 다시 물을 평하려니(老衲渾多事 評茶復品泉)”라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규보는 노련한 노승이 점다한 차를 대접받았던 것으로, 이는 이규보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명전의 규모와 수준이 달랐음을 드러낸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 다사(茶事)에 밝은 계층은 수행자들이었다. 승려들은 명전을 주관하는 주체였기 때문에 승원의 풍류였던 명전놀이 역시 대부분 사원을 중심으로 열렸다. 이는 이규보의 〈다시 앞의 운자를 써서 보내다(復用韻字贈之)〉에서 “담담한 노스님, 물건 하나 없지만/ 솥에서 물 끓는 소리 듣기 좋아라./ 차와 물을 평하는 것은 불교의 풍류이니/ 양생을 위해 천년의 복령이 필요치 않네(蕭然方丈無一物 愛聽笙聲號鼎裏 評茶品水是家風 不要養生千歲?)”라고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한편 명전에서 사용한 차는 어떠했을까.

그 해답은 이규보의 시 〈운봉에 있는 규선사에게〉에서 “시냇가 차 싹은 이른 봄에 싹 트니 황금 같은 노란 움, 잔설 속에서 자랐네(故敎溪茗先春萌 抽出金芽殘雪裏)”라 하였고, 한수(韓脩 1333~1384)의 〈경상도 안렴사가 햇차를 부쳐왔기에 다시 전운으로 짓다(慶尙安廉寄新茶 復用前韻)〉에서 “올해 만든 작설차 비할 데 없이 귀하다(雀舌今年貴莫如)”라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언급한 선춘(先春)은 한식 전에 딴 여린 차싹으로 만든 귀품의 차였다. 그러므로 이규보는 “입에 닿자 착착 감기듯 부드럽고 매끄러워/ 마치 젖내 나는 어린아이 같구려(制制入口脆柔 有如乳臭兒如稚)”라고 한 것이다. 이런 차를 즐겼던 명전놀이는 고려시대 차문화의 특징이요, 사원이 주도했던 문화의 유형이었다.

따라서 송대의 투다(鬪茶)가 사대부 중심이었던 것과는 차별성이 있다. 더구나 송의 투다는 어원(御苑)이 확대되어 공차(貢茶) 제도가 발전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송대에 유행했던 투다(鬪茶)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북송대의 차 전문 학자였던 황유(黃儒)의 〈품다요록(品茶要錄)〉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는데, 투(鬪)란 의미부터 살펴보면 이렇다. 

극품의 차를 투라 하고 아투라고 한다. 그 다음(차품)이 간아와 차아이다. 투품(차)가 비록 최상이라 할지라도 호원에는 어쩌다가 한 그루의 차나무를 기르는 데 그칠 뿐이니 대개 천지간에 특이한 것이므로 모두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茶之精絶者曰鬪曰亞鬪 其次揀芽茶芽 鬪品雖最上 園戶或止一株 蓋天材間有特異 非能皆然也)

송대 투차도.

윗글에 따르면, 투는 극품의 차를 말한다. 그러므로 투(鬪)나 아투(亞鬪) 같은 최상급의 차는 넓은 차밭을 운영하는 다농(茶農)이라 하더라도 투품 차를 얻을 수 있는 차나무는 불과 한 그루 정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투품차는 아무나 함부로 얻을 수 있는 차가 아니라는 말이니 바로 투다란 극품의 차를 겨루는 품다(品茶) 놀이인 셈이다. 송 휘종(徽宗 1082~1135)의 〈대관다론(大觀茶論)〉에도 투품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는 새벽에 따고 해가 뜨면 그만둔다. 손톱을 이용하여 싹을 따고 손가락으로 문질러 따면 안 된다. 무릇 차 싹은 작설이나 낱알 같은 것이 투품이다. 일창일기는 간아이다. 일창이기는 그 다음 차품이고, 나머지는 하품이다. 차는 처음 싹이 뜨기 시작하면 백합이 있다. 백합을 제거하지 않으면 차 맛을 해친다. 이미 딴 차에는 즉 꼭지가 있는데 제거하지 않으면 차색을 해친다.(봛茶以黎明 見日則止 用爪斷芽 不以指휸 凡芽如雀舌穀粒者爲鬪品 一槍一旗爲揀芽 一槍二旗爲次之 餘斯爲下 茶之始芽萌則有白合 不去害茶味 旣봛則有烏? 不去害茶色)

윗글에 의하면 투품(鬪品) 차는 새벽에 딴다고 하였다. 이는 차 싹의 양기(陽氣)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해가 뜨면 찻잎 속에 들어 있는 양기가 흩어지기 때문에 기운이 좋은 차를 만들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차 싹의 크기도 작설이나 낱알처럼 여린 싹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작설이나 낱알 같은 싹에는 움을 싸고 있는 겉껍질이 있다. 이를 백합이라 한다. 차 싹에 붙어 있는 백합이나 꼭지를 따낸 차 싹만으로 투품을 만들었다. 따라서 투품은 어원에서 생산되는 황실용 차로, 공정마다 소요되는 노동력이 산차(散茶:잎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조칙을 내려 단차를 만들지 못하게 한 연유도 이 때문이었다.

한편 투다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었다. 강휴복(江休復)의 〈가우잡지(嘉佑雜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재옹(소순원)이 일찍이 채군모와 투다를 벌렸다. 채군모의 차는 혜산의 샘물을 사용하여 정밀했고, 소재옹의 차는 채군모보다 열세하였다. 다시 죽수를 사용하여 차를 다렸더니 마침내 승리하였다.(蘇才翁嘗與蔡君謨?茶 蔡茶精用惠山泉。蘇茶劣,改用竹水煎,遂能取勝.)
윗글에 채군모(蔡君謀, 蔡襄의 字, 1012~1067)와 투다를 했던 소순원은 초서를 잘 쓴 인물로, 차에도 밝았다. 채군모 또한 북송대에 소용단을 만들었으니 그의 차에 대한 식견은 언급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한번은 혜산 물을 사용했던 채군모가 이겼고, 다시 겨룬 투다에서 소순원은 죽력수(竹瀝水)를 사용하여 승리했다. 투다에서 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로부터 죽수, 혹은 죽력수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유독 송대에 다시(茶詩)와 다화(茶畵)가 많이 그려졌던 연유는 사대부들이 자신의 문학적 정서와 사유를 투다에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 시대에 유행했던 명전놀이도 승려들이 관료 문인들을 초청하여 벌린 문회(文會)였기에 수많은 다시와 다화가 그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12세기 이후의 몇몇 문인들이 남긴 다시가 남아 있다. 다화도 고려 말기에 그려진 1~2편이 전해질 뿐이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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