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방자치와 불교

서부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하이눈’은 게리 쿠퍼와 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명화다. 게리 쿠퍼는 보안관이고 그레이스 켈리는 보안관과 갓 결혼한 아내다. 게리 쿠퍼는 신혼 생활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던 차에 자신이 체포하여 징역을 살았던 악당이 부하와 함께 복수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미 보안관 사표를 냈기 때문에 아내는 관여하지 말고 떠나자고 하지만 어차피 악당들이 다른 곳으로 와서 복수하려고 할 것이므로 남아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치안 판사, 보안관 조수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마저 돕지 않는다. 아내는 남편이 싸운다고 고집을 부리자 떠나 버린다. 홀로 악당들을 상대하던 보안관 게리 쿠퍼는 부상을 당하지만 다시 돌아온 아내에 의해 위기를 모면한다. 마침내 악당들을 모두 소탕한 뒤에 마을 사람들 앞에 보안관 배지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아내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국민 정치 학교 ‘자치’
자율·자유·민주 가르쳐
불교 갈마 제도와 닮아

미국은 서부를 개척하던 시절에 마을이 만들어지면 학교를 세우고 보안관을 임명하여 치안을 담당케했다. 아무리 작은 마을도 주민에 의해 보안관이 임명되어 경찰의 역할을 하였다. 아무리 작은 마을도 학교가 있었으며 학교는 마을 주민에 의해 운영되었다. 지방자치의 핵심이 교육과 경찰 서비스라는 공식은 바로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도 적용되던 공식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지방자치가 도입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방자치는 아직도 여러 문제를 초래하고 있지만 과거의 중앙집권보다는 분명 좋은 점이 더 많다. 만약 지방의 수준이 너무 낮아 도저히 지방자치를 실시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될까? 이 문제는 오래 전부터 선진국이 고민해왔던 문제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해결했다. 즉 지방의 수준이 낮더라도 지방자치를 실시해야 지방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논리이다. 수준이 높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중앙집권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국민중 일부는 지방자치가 문제가 있으니 과거의 중앙집권체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문제가 있을수록 지방자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끌고 가야지 중앙집권으로 회귀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경우 교육감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등 부분적으로 지방자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아직도 교육자치가 완전히 시행되었다고 보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치안은 어떨까? 지방자치의 핵심은 교육과 경찰서비스이다. 교육과 달리 경찰은 지방자치가 전혀 시행되고 있지 않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관련하여 자주 나온 제도 개혁이 자치경찰제도이다. 검경수사권 조정에 의해 경찰의 권한이 강화되면 비대한 경찰 조직에 자치경찰 제도를 도입하여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자치경찰에 관한 입법이 추진되고 있어 조만간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자치경찰제도가 도입될 예정이다. 자치경찰을 위해선 현재 경찰청의 일부 인력과 부서를 지방자치단체에 이관하여 중앙정부의 경찰과 지방자치단체의 경찰로 이원화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에 이관되는 경찰조직이 바로 자치경찰이다.

경찰이 하는 업무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는 경찰이라고 하면 범죄를 수사하고 범인을 검거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보건 위생 위반을 단속하는 경찰 업무도 있으며 교통 질서를 담당하는 경찰 부서도 있다. 경찰 업무를 분석해보니 놀랍게도 교통관련 업무가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지방자치단체에 반드시 넘겨야 하는 업무는 교통경찰의 업무이다. 불량식품을 단속하는 업무, 환경을 오염시키는 범죄를 단속하는 업무도 성격상 주민과 밀착하여 제공되어야 하는 서비스이므로 지방으로 이관되는게 맞다. 따라서 교통, 보건, 위생, 환경 등의 업무는 지방에 이관하여 자치경찰이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지방자치가 중요한 이유는 국민이 정치를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정치 학교이기 때문이다. 주민이 직접 보안관을 뽑고 교사를 초빙했던 서부개척 시대를 상상해보자. 이웃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다투며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은 민주주의를 위한 교실이나 다름없다. 정치선진국은 예외 없이 지방자치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국가들이다. 정치인도 지방에서 성장하여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정치인 양성 통로가 구축되어 있다.

지방에 자율을 부여하는 정도가 매우 강하면 연방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은 각 주가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주의 법률로 주를 통치한다. 주는 경찰은 물론이고 방위군이라는 군대까지 갖추고 있다. 우리는 연방국가라고 하면 미국처럼 규모가 큰 국가만이 시행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스위스도 연방국가이다. 스위스는 칸톤이라고 하는 지역단위가 모여 연방국가를 구성한다. 거의 독립국가로 작동했던 과거의 칸톤에 비하면 오늘날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상대적으로 커졌지만 여전히 칸톤은 많은 자율성을 부여 받고 있다.

불교는 부처님이 정한 규율 내에서 개별 사찰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주요 의사결정은 사찰의 회의인 갈마(哲磨)에서 이루어졌다. 갈마를 주제하는 출가자는 갈마사라고 불리웠다. 아무나 갈마사가 될 수 없었기에 갈마사의 자격은 제한되었다. 갈마사는 승가에서 대중이 전원합의에 의해 뽑았다. 작은 규모의 사찰은 자율이 부여되는 범위가 좁았지만 규모가 커질 수록 부여되는 자율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작은 사찰은 구족계를 줄 수가 없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사찰은 구족계를 줄 수가 있다. 구족계를 줄 때는 사찰의 갈마에서 대중의 의견을 물어야했기에 개별 사찰이 결정하는 사안이었지 중앙에서 통제하는 사안이 아니었다. 이러한 교단 운영은 매우 중앙집권적인 가톨릭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자율성이 두드러진다. 불교 민주주의는 자치 민주주의다.

개별 사찰에 자치권이 부여되면 여러가지 좋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개별 사찰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부합하는 사찰운영이 가능하다. 사찰의 여러 소임을 맡는 출가자가 대중의 뜻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즉시 대중의 의견을 갈마에서 제시하거나 담당자를 교체할 수 있다. 중앙에서 사찰운영의 여러 직책을 담당할 출가자를 임명하면 대중의 뜻에 부합하지 않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수 있다. 중앙에서 담당자를 교체하지 않으면 대중은 불만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다. 개별 사찰에서 담당자를 선발하지 않으면 담당자는 대중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할 우려가 크다. 중앙에서 임명하면 중앙의 눈치만 보게 된다. 중앙은 개별 사찰에 있는 모든 출가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기 때문에 적임자를 판단하기 어렵다. 사찰에 자치권이 주어지면 누가 가장 적임자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같이 생활하는 사찰공동체에선 출가자 개인에 대한 장단점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하이눈’에서 보안관을 맡은 게리 쿠퍼는 매우 드문 경찰이다. 그런 훌륭한 경찰이 임명되면 주민은 가능하면 그를 계속 보안관으로 잡아두려고 할 것이다. 만약 형편 없는 경찰이 임명되면 주민은 가능하면 하루 빨리 그를 퇴출시키려 할 것이다. 중앙집권 체제 하에서는 설사 형편 없는 경찰이 임명 된다고 해도 주민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다시 인사 이동이 있어서 그가 다른 곳으로 가기를 바랄 뿐이다. 중앙집권 체제 하에서 임명된 경찰은 주민을 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임명한 중앙의 눈치만 보고 개인의 이익만을 챙겨도 주민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영화 ‘밀양’을 보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전도연에게 아이가 유괴되어 사망하는 불행이 닥친다. 만약 밀양 자치경찰책임자가 수사를 부당하게 진행하여 전도연이 이에 대해 항의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자치경찰권이 기초자치단체에 부여되면 밀양 자치경찰책임자는 밀양군수에 의해 임명된다. 이럴 경우 전도연이 온 밀양을 쏘다니면서 낙선운동을 할 경우 밀양군수는 매우 놀라 수사를 제대로 하라고 자치경찰책임자에게 지시할 것이다. 자치경찰제도가 시행되고 있지 않은 현 시점에서는 전도연이 밀양경찰서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다. 온 대한민국을 쏘다니면서 대통령 낙선운동을 할 수도 없겠지만 한다고 해도 그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알면 법을 알고 법을 알면 연기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자치는 과연 연기법에 부합할까? 연기법에 의하면 밀양군의 모든 현상과 사물은 수많은 인과 연이 연기하여 임시적으로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 중앙집권제도는 중앙에서 밀양군의 모든 현상과 사물에 관련된 수많은 인과 연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구축된 제도이다. 오늘날 세상이 더욱 복잡해지고 변화무쌍해지면서 수많은 인과 연을 중앙에서 파악하고 즉시 이에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수많은 대처를 오직 중앙 한군데서 하는 방법보다, 수많은 대처를 각각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대처하는 방법이 뛰어나다. 지방자치는 바로 이러한 각자 대처 방법이다.

연기의 세계에서는 오직 모를 뿐이다. 밀양군이 대처하는 방법이 인과 연의 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수정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를 상상해보자.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있으면 신속 대응이 가능하나 중앙집권 하에서는 신속 대응이 불가능하다. 자치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연기법에 의하면 모든 것이 공하니 지방자치에 집착하여 절대 절명의 가치인양 붙들고 있는 것도 어리석다. 때로는 중앙집권적 방법이 더 적절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민주주의의 핵심 성격은 자치 민주주의이지만 자치에 집착하지도 집권에 집착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치에 근간을 둘지라도 언제든지 필요하면 중앙집권적 해결방법도 도입할 수 있는 유연하고 열린 자세로 불교교단을 운영해야 연기법에 부합하는 불교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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