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그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불사를 시작하면서 야외법회를 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신심이 돈독하셔서 불사를 일찍 하게 됐는데,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우리 스님네들 마음이 한마음 한뜻이 돼서 불사를 이루어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과거로부터 우리는 진리에 순응하면서 사계절을 맞고, 또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고 이렇게 항상 모습을 바꿔 가면서, 반복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 현실에도 그렇게 하고 있고 미래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가 손자로 태어나도 증조할아버지인 줄을 모르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이런 사실을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가기 전에 그 속에는 뼈저린 아픔이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피눈물 나고 뼈저린 아픔을 겪으면서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어,
그렇게 모습을 바꾸면서 인간까지 왔는데
이 도리를 모르고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뼈저린 아픔은 어떤 것인가? 즉 말하자면 인간뿐만 아니라 사생이 다 그렇죠. 벌레도 모두 생명이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지각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걸 갖추어 가지고 있는 데 비해, 벌레나 하등 동물 같은 것은 지혜를 갖지 못하고 후각이나 청각이나 시각, 이런 정도로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원이 좀 낮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도 더 나은 점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뭘 뜻하느냐? 만약에 장마가 들려고 하면 개미나 벌레 또는 어떤 짐승들은 미리 다 알고 그 자리를 피합니다. 며칠을 격해 놓고 아예 그냥 식구들을 다 몰고 갑니다. 세간 짐을 트럭에다 싣고 말입니다. 허허허…. 그러니까 무리를 지어 연이어서 등에다가 함께 짊어지고 발을 맞춰서 몰고 나가는데 아주 비호같이 갑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도 낫다고 생각이 됩니다만, 또 더 묘한 것이 있습니다. 옥수수나 수수도 장마가 들어서 애쓸 것 같으면 ‘야! 올해 장마가 든다면 큰비가 와서 뿌리가 뽑힐 테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러고는 뿌리를 양쪽으로 벌려서 박고 쓰러지지 않도록 미리미리 방지를 합니다. 또 그뿐입니까? 개구리는 개구리대로 알을 끌고 풀 속 깊이 들어갑니다. 나무 위에다 걸쳐 놓고 떠내려가지 않게 하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그 마음이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여러분한테 인도를 하는 겁니다. 애들이 “엄마! 똥 마려워.” 하면 “그러면 빨리 똥을 눠라.” 그러고, 어린애가 너무 어려서 바지를 못 벗으면 바지까지 벗겨 주면서 변소로 인도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 이론이나 가설이 붙습니까? 진정코 그런 게 붙지 않죠? 애들이 목말라서 물 달라고 할 때에 얼른 물 떠다 주면 됐지, 거기 무슨 이론이 필요합니까? 여러분이 목말라서 물 먹는데 이론이 왜 붙습니까, 거기? 목마르니까 그냥 먹는 것뿐이지요.

불법이라는 자체가 바로 그렇게 생활하고 직결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얼마나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일심이니라.” 그렇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어떠한 업이 있었느니, 또 현실에 어떠한 업을 짊어졌느니, 미래에도 그것을 짊어지고 가느니 이러한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현재 물질과학이 발전되고 이렇게 천체물리학으로써 연구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좀 더 깨어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자각을 해야 합니다.

동서남북에 뭐가 걸려서 이사를 못 가느니, 또 부적을 해서 붙여야 되느니, 나쁘니 좋으니 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신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걸리는 겁니다. 모든 게 걸려서 그렇게 되고 말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미신이 아니라면 미신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마음이 가난하면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얼마나 피눈물 나고 뼈저린 아픔을 겪으면서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부모가 되어 그렇게 모습을 바꾸면서 진화돼서 인간까지 왔느냐 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이대로 모르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대로 갈 수는 없죠.

이제 사월초파일이 다가옵니다. 예전에 상원사에 있을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죠. 사월초파일을 앞두고 한 오천 명이 거기에 올라왔는데 지금처럼 절로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오천 명이라면 산을 하얗게 메울 정도니까요. 거기는 여름에도 춥습니다. 그래서 그냥 모두 겨울 오바나 잠바들을 걸치고 포대기를 걸치고, 이렇게 하고 밖에서 밤을 새웠죠.

그런데 촛불을 켜는데 그 마음들이 그저 자기 촛불만 잘 켜려고 애쓰더란 말입니다. 자기 등만 좋은 데다 달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렇게 바깥으로 끄달리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그냥 순수하게, 여기 달면 어떻고 저기 달면 어떻습니까? 꼭 법당 앞에만 걸어야 됩니까? 그때 당시에 제가 보니까 싸움에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때 젊은이 셋이 등을 걸려다가 노인네들이 “젊은이! 왜 남 걸어 놓은 데다 이렇게 부딪치고 이러느냐.” 하고 하도 그래서 젊은이들이 양보하고선 산모퉁이를 돌아서 산신각 옆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습디다. 어린애를 낳지 못해서 왔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등불은, 등이라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 자체입니다. 여러분이 요새 절에 다니면서 인등을 켠다고 하시죠? 그것은 인등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인등인 것입니다. 몸뚱이는 등이요, 마음 중심은 촛대요, 마음 내는 것은 불이라는 얘깁니다, 촛불!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찰나찰나 돌아가는 찰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인간이 한평생 산다 한들 한 철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한 철 사는데, 바쁘게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이 자체가 그대로 참선입니다, 참선! ‘주인공이 수없는 억겁을 거쳐 오면서 이렇게 형성시켰으니, 아! 주인공만이 나를 낫게 해 줄 수 있고,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주인공만이 우리 가정을 화목하게 해 줄 수 있고….’ 이렇게 믿고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일임하고 마음 편안하게 사신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항상 불은 켜져 있는 것이고 항상 돌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 찰나찰나 고정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보는 거나 먹는 거나 듣는 거나 만남이나 뭐가 고정됨이 있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공(空)이 즉 색(色)이요, 색(色)이 즉 공(空)이니라. 과거도 없고 현실도 없고 미래도 없느니라. 너희들 마음먹기에 달렸느니라. 너희가 마음을 잘 쓰면 스스로를 잘 이끌어 가는 거고 마음을 잘못 쓰면 너희가 너희를 구덩이에다가 넣는 격이니라.” 그러셨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지각입니다.

과거의 업이 있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엊그저께 빚보증을 선다고 도장을 떠억 찍어 줬더니 오늘 집안이 망했다 이겁니다. 근데 누가 잘못하게 만들었습니까? 자기가 잘못한 거지요.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무(無)의 법, 유(有)의 법이 둘이 아닙니다. 마음 따로 있고 생명 따로 있고 육신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삼위일체로 구성된 일심에서 나오는 활용은 여러분의 생활과 합치돼 있습니다. 불법이 따로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4월 8일에 인등을 달러 다닌다 부적을 쓴다 이러는 것이 다 허탕한 짓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이사를 다니는 거고, 형편에 맞는 날을 잡아 그냥 이사를 가는 겁니다. 그리고 타력 신앙이 아니라 내 주인공에 의한 자력 신앙으로써 이끌어 가는 겁니다. 내 주인공이 나를 형성시켜서 나를 끌고 다니고, 내 마음대로 마음이 찰나찰나 나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런 생명력이 뚜렷하게 있는 나, 영원한 나에게 자력 신앙으로써 ‘아, 거기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지.’ 이러고선 그냥 하는 겁니다. 그런데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벌벌 떨고, 이 바람 저 바람에 흔들리고, 누가 뭐라고 조금만 해도 흔들리니, 자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며 어디를 믿고 다니십니까?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고 가정이 있고 사회가 있고 나라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자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소크라테스도 그랬죠. 너 자신부터 알라고요. 이것은 부처님께서도 그러셨고 예수님도 그랬다고 봅니다. 왜? 예수도 “나는 나로되 너는 너니라. 너는 너로되 나는 나니라. 계명을 지켜라.” 했습니다. 임제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의 주장자가 있다면 내가 너에게 주장자를 줄 것이로되, 네 주장자가 없다면 내가 주장자를 뺏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그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사람이 중심이 없고 지각이 없어서 촛불을 켜지 못한다면 항상 깜깜한 데서 살 수밖에는 없는 거죠. 마음이 암흑이라면 사는 것도 암흑입니다.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니 암흑이지요. 여러분이 24시간 사는 동안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과 즐거운 순간이 몇 시간이나 되며 몇 초나 됩니까?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가을은 다가오는 겁니다. 내 몸뚱이는 나뭇잎과 같아서 낙엽 질 때가 다가옵니다. 그런데 내 몸 벗기 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떳떳하고 당당하게 그냥 나갈 것이지 어쩌자고…. 종이 한 짝에 글씨 써서 붙인다고 여러분 가정이 의합해지고 잘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실 수만 있다면 사월초파일이 얼마나 좋은 봄날이요, 기쁜 날인지 아실 겁니다. 부처님이라고 한 분을 정해 놓은 것도 너무 공부하는 사람들이 분열해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많이 두셨어도 싸우지 않고 화합한 것은 전부 부처님이라는 한 스승의 제자가 됐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스님들이 각각 제자를 따로 두게 되니까 그 제자들이 공부하는 방법이 달라서 분란이 많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월초파일이라는 날짜를 정해 놓은 것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4월 8일에 나셨기 때문이죠. 얼마나 좋습니까? 사월이라! 이것은 동서남북이 다 밝은 날을 말하는 겁니다. 사월! 사월이 아닙니까. 팔일은 바로 무의 사무(四無), 유의 사유(四有)가 합쳐져 팔일입니다. 그러면 죽은 세상 산 세상이 한데 합쳐서 일심으로써 죽은 세상 산 세상을 나고 든다 이 소립니다.

마음을 잘 쓰면 모습을 바꾸어서 진화돼서 이 세상에 다시 나올 때 잘생기게 그림을 그려서 나오고, 여러분이 한생각 잘못하면 업식을 잔뜩 짊어지고 나와 가지고는 그냥 병이 들고 속이 상해서 복장을 찧고 자식들이 말썽만 피우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죠.

사는 것도 업식이 한데 모여서 끼리끼리 같이 사는 겁니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도 있지마는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 보십시오. 배는 배대로 놓고 생선은 생선대로 놓습니다. 생선도 갈치는 갈치대로 놓고 게는 게대로 놨습니다. 그거 잘 아시죠? 그러니 우리가 한 식구로 만나는 것도 똑같이 인연에 따라 바로 차원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금방에 넝마 갈 일 없고 넝마전에 금 갈 일 없습니다. 그러니 이건 자동적입니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일부러 뒤범벅을 해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금방에 금하고 무쇠를 뒤범벅으로 섞어 놓는 거 보셨습니까? 과일 가게에서도 이 과일 저 과일 한데 합쳐서 뒤범벅을 만들어 놓는 법이 없고요.

그러니 우리 인간도 그렇게 차원대로, 인연 따라서 업식 따라서 한 식구로 만나서 서로 부딪치고 “너 때문에 내가 복장을 찧고….” 이렇게 울고불고 서로 싸우는 겁니다. 그렇게 괴로운 시간이 더 많고 속상해하는 시간이 더 많고 아픈 시간이 더 많지요. 즐거운 시간이야 눈곱만치 되는 거 가지고, 그것도 이틀 사흘에 한 번씩 그저 조금씩 즐거움이 있는 거지 뭐가 그렇게 즐겁습니까, 네? 그런데도 그런 거를 바라고 발목을 붙들어 매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기도 어려운 데다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데다가, 아니 종교까지도 그렇게 괴로워요. 이거 걸리고 저거 걸리고 삼재 걸리고 부적 걸리고, 이사 가는 데 무슨 손 걸리고, 그러고도 또 칠성이니 용왕이니 산신이니 하고 따로따로 둔단 말입니다, 허허허….

과거니 현재니 미래니 하는 것을, 또는 어떠한 잘못이라도 그 모든 것을, 삼심(三心)을 일심으로 둥글리세요. 또 석존이니 지장이니 산신이니 칠성이니 독성이니 용왕이니 지신이니 조왕이니 이런 걸 따로따로 두지 마세요. ‘주인공!’ 하면 벌써 주인공 안에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내 조상까지도 들어 있고 나까지도 거기 같이 있거든요. 그러니 자력 신앙으로써, 법당에 가더라도 부처와 둘이 아닌 까닭에 내 마음속에 있으니 ‘감사합니다’ 하고서 모두 주인공에 넣곤 마음을 둥글려 가지고 일 배를 올릴 때, 그 공덕은 말도 못 해요. ‘백팔 번을 절을 한들 어디 일 배만 하랴.’ 이런 겁니다.

부처님의 눈은 천지 어디고 비춰 보지 않는 데가 없고 손이 안 닿는 데가 없고, 그 평발은 안 딛는 데가 없어요. 그건 왜 그런가? 모든 부처님은 위대하지도 않고 위대하지 않지도 않습니다. 여러분과 같이하시면서 지금 이렇게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겁니다.

왜 그러냐? 이에 대한 이치를 약간만이라도 언급하겠습니다. 예전에 “부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까 “똥 친 막대기니라.” 하셨습니다. 예전에 사신 분들한테 얘기 들어 보셨겠죠.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똥간에 작대기 하나 갖다 놓고 그걸로다가 밑을 씻었습니다. 그러니까 똥 친 막대기지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위대한 게 아니라 여러분하고 아픔을 같이하면서 손이 안 닿는 데가 없고, 아니 디딘 데가 없고 아니 굴리는 데가 없고 아니 비춰 보시는 데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갖고 똥 친 막대기라는 이름을 가진 것입니다. 그건 왜? 고정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도리를 다 깨달으셔서 용도에 따라서 원하는 대로 다, 칠성에게 빌면 칠성이 돼 주시고 산신에게 빌면 산신이 돼 주시고 지장에게 빌면 지장이 돼 주시고 용왕에게 빌면 용왕이 돼 주십니다. 그게 한군데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백억화신이니라. 천백억화신이 아니 닿는 데가 없느니라.” 하는 거죠. 그게 한군데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습 있는 이 몸뚱이는 한계가 있지만 모습 없는 무체(無體)는, 무심 무체는 한계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응해 주신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삼십이응신으로 항상 들고 나면서 여러분하고 같이 계신다 이런 뜻입니다. 삼십이응신이라면 숫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죽은 세상, 산 세상, 미래 세상을 다 가지고 계시면서 넘나드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불을 켜더라도 등이 크고 작고 이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1억을 낸 사람이 5천 원 낸 사람하고 똑같은 등을 켜도, 자기가 1억 한 거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대가는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가 더하고 덜하고’ 그러한 생각도 하지 마시고 ‘내가 많이 보시했네, 적게 보시했네’ 이런 생각도 하지 마시고 그냥 무심 무행으로 그대로 행을 하시면 그대로 여러분에게 몇 곱절의 대가가 가는 겁니다.

그리고 불을 켤 때도 항상 ‘주인공만이 이렇게 밝게 해 줄 수 있다.’ 하고 주인공에 맡겨 놓으세요. 우리는 부처님 나오신 그 뜻에 의해서, 즉 말하자면 부모 제사 지내고 생일 지내는 거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렇게 불을 켜 놓고 예의를 다하고 정성을 지극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 부모 조상과 부처님 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왜 따로가 아니냐?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사생의 무리를 다 항복받고 깨달아서 다 아시고, 그 업식을 여러분의 모든 업식과 더불어 자기가 짊어진 채, 짊어진 것도 없고 안 짊어진 것도 없이 같이하고 계십니다. 과거의 부처님이 따로 계신 게 아니라 현실에도 그렇게 계시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살아 계시니까 같이 계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몸뚱이 속에 업식이 뭉쳐 있습니다. 업식을 받아 가지고 나왔으니까 고덩어리죠. 우리 중생은 고덩어리를 짊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수없이 악업 선업의 업을 지어서 인연이 돼 가지곤 잔뜩 짊어지고, 카세트 하나를 짊어지고 말입니다, 거기 죄 담겼거든요. 짊어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부모가 짝짓는 데로 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뭘 받느냐? 자기가 지고 나온 업식을 그냥 짊어지고 그리로 들어가되, 아버지한테서는 뼈를 빌리고 어머니한테서는 살을 빌려서 집을 짓고 나옵니다. 집만 받아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각자 업식은, 그 고덩어리는 자기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오는 겁니다. 임신이 되면 수십억 마리가 다 없어지고 자기 영혼 자체 하나가 부모가 주는 모습, 집을 받는 거죠. 집을 받으면 거기에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그 업식들이 다 골고루 퍼져서 그 몸뚱이에 그냥 전부 같이하고 말아 버리죠. 그러면 그게 점점점점 자라 가면서 커지고 그러니까 ‘자기가 지은 거 자기가 받는다’ 이런 게 나오죠.

그러니까 부모도 혼자 왔다가 혼자 가고, 자식도 혼자 왔다가 혼자 가죠. 모두가 대신 가 줄 수 없고, 여러분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을 때 같이 갈 양으로 애를 써도 돈이 안 가 줍니다. “네가 나를 좋아서 따라다녔지 내가 너를 좋아서 따라다닌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난 못 가겠어.” 이러고 안 가요. 몸뚱이도 안 갑니다. 몸뚱이도 따라가 주질 않아요. 그렇게 이 몸뚱이를 아끼고 쓰다듬고 온통 만지고, 추우면 더운 거 입혀 주고 더우면 시원한 거 입히고, 질척질척하면 깨끗하게 씻어 주고 이랬는데도 안 따라가는 겁니다. 죽을 때 가서는 안 따라가요. 또

자식들도 보십시오. “얘야, 내가 가는데 외롭고 그러니 너희들 좀 따라가 주지 않으련?” 그러면 “아버지든 어머니든 누구를 막론해 놓고 나는 같이 가 드릴 수 없어요. 그저 산소까지나 화장터까지만 가 드릴게요.” 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가 주지 않습니다. 자식이 죽어도 부모가 가 줄 수 없고요.

그러나 수억겁 전부터 같이 진화하면서 모습을 바꾸고 바꾸고 해서 자기를 형성시켜 온 그 절친한 벗,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 절친한 벗은 누구냐? 자기 주인공입니다. 영원한 자기 생명의 근본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그 주인공은 죽으나 사나 함께 있습니다. 지금도 죽으나 사나 끌고 다니고 죽으나 사나 끌려다닙니다. 허허허….

그러니 여러분은 어딜 믿으실 거예요? 여러분은 어딜 믿으실 겁니까? 나 자신을 버리고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그렇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것과 더불어 이렇게 끌려다니고 끌고 다니면서 둘이 아니게 같이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법당을 짓는 데도 서쪽을 등을 지고 동쪽을 향해서 이렇게 하는데, 거기 무슨 뜻이 있느냐? 동쪽은 해가 뜨는 데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근데 우리 공부는 “동쪽이나 서쪽이나 둘이 아니니라.” 이랬습니다. 왜? 다른 혹성에 가 보면 서쪽이 동쪽이니까요.

그러니까 좁게 생각을 하지 말고 넓게 생각을 하십시오. 동쪽이 서쪽이고 서쪽이 동쪽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방향을 두는 거는, 법당을 넓고 높게 두어야 우리에게 좋겠으니까 그냥 그렇게 하는 거고, 또 우리 동양에서는 동쪽을 향해서 해야 되겠으니까 그럽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여기대로 환경에 맞게 용도에 따라서 쓰는 거고, 저기 가면 저기에 맞게 따라야 하고 그런 것이니 유의 법, 무의 법, 이 도리를 혼란하게 하거나 질서를 문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께 오순도순 이야기도 해 드리고 착한 행동으로 효도한다면 자식들도 차차차차 착해져서 효도할 줄도 알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또 모든 부처님 법을 알게 될 겁니다, 아마. 그러니 꼭 모든 깨달음을 자기로부터 깨달을 수 있게 하십시오. 여러분도 다 이렇게 공부를 해서 부처님께서 사월초파일 날 나오신 것처럼 그렇게 탄생하시도록 하십시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9년 4월 23일 국내지원법회 법문 중 일부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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