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임제의 ‘할(喝)’

임제가 대중에게 말했다.

“나는 어떤 때는 비추는 걸 먼저하고 활용을 뒤에 하며 어떤 때에는 활용을 먼저하고 비추는 걸 뒤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활용을 동시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활용을 동시에 하지 않기도 한다.

비추는 걸 먼저 하고 활용을 뒤에 하는 것은 사람(人)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요, 활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뒤에 하는 것은 대상(法)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비춤과 활용을 동시에 하는 것은 밭을 가는 농부의 소를 몰고 가버리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격이니 뼈를 두들겨 골수를 뽑아내고 바늘과 송곳으로 몸을 아프게 찌르는 것이다. 비춤과 활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은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는 것이며, 주인이 되기도 하고 손님이 되기도 하며, 물과 흙이 서로 합하여 섞이는 것처럼 근기에 맞춰 중생들을 제접하는 것이다.

만약 뛰어난 대근기의 사람이라면 앞에서 말한 법들을 거량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가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멀었느니라.”

이 대목에 와서는 조(照)와 용(用)을 가지고 수행자를 제접(提接ㆍ지도)하는 네 가지 방법을 말하고 있다. 조(照)는 살핀다는 뜻으로 상대의 태도를 관찰하는 것을 말하고 용(用)은 활용의 뜻으로 상대의 태도에 대응하는 수단이다. 이는 곧 지혜와 방편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다. 이는 주관의 영역과 객관의 영역으로 나눠진 의식 구조를 두고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로 공부의 상태를 시험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활용을 먼저하고 살피는 걸 뒤에 하며, 어떤 때는 반대로 살피는 걸 먼저하고 활용을 뒤에 한다. 그런가 하면 둘을 동시에 행하며 둘을 모두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인(人)과 법(法)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사람 중심, 혹은 대상 중심으로 상대하는 차이 때문에 네 가지 조용(照用)을 말해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용(照用)이 필요 없는 뛰어난 수행자 있을 경우가 있다. 그때 그는 “쓸 데 없는 소리 말라” 하고 벌떡 일어나 가버릴 것이다. 임제는 설사 이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 멀었다”고 인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는 끝이 없고 부처가 되면 부처가 없는 것이며, 조사가 되면 조사 자신에게는 조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제선의 특징을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맨손 단칼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 삼현(三玄), 삼요(三要)로 고금의 선지식을 가려내고 빈주(賓主)를 가지고 용과 뱀을 알아낸다고 하였다. 또 금강보검(金剛寶劍)으로 대나무에 붙어 있는 귀신들을 없애버리고 사자와 같은 기백으로 여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하였다. 푸른 하늘에 벼락이 치고 평지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임제종이라 하였다.

임제가 쓴 ‘할(喝)’이 임제를 상징하듯 임제의 가풍에서는 때로 와일드한 행동이 많이 나온다.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다 싶은 장면들이 많다. 이 모두 정법(正法)의 눈을 갖추어 진정한 견해를 가지라는 경책이다.

임제는 자신의 ’할‘을 네 가지로 구분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할은 금강보검으로 번뇌망상을 단칼에 끊어주는 역할을 하고, 어떤 할은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황금 털 사자가 사냥을 하듯 납자들의 병통을 잡아내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하며, 어떤 할은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장대에 묶은 풀(探竿影草)과 같은 역할을 하고, 어떤 할은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 할도 있다고 하였다.

임제는 마음을 사람 ‘인(人)’자로 자주 표현했다. 이것은 마음의 작용을 극대화시킨 표현이다. 이는 마음에 대한 추상성을 감소시키고 좀 더 선(禪)의 구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니 무의진인(無依眞人)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주종심(趙州從?ㆍ778~897)의 선풍이 자상하고 부드러웠다면 임제는 거칠고 파격적인 뉘앙스를 법문 속에 자주 풍기고 있다.

마지막 조(照)와 용(用)이 필요 없는 상상근기(上上根機)가 있다 하더라도 “아직 멀었다” 한 것은 깨달음의 경계에는 한계점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선의 세계에는 만점(滿點)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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