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각주방검(刻舟訪劍)이라고도 한다. 뱃전에 금을 새겨 놓고 검을 찾는다는 뜻으로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상황에서도 꽃놀이가 한창이다. 산수유마을에는 아름드리 산수유나무에 산수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꽃이 피어 있다’라는 표현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맞는 표현일까? 맞지 않다. 연기(緣起)에 깨어있어야 할 불자(佛子)에게는 더더욱 맞지 않는 표현이다. 불완전한 육안에는 꽃이 핀 채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꽃을 저속촬영해서 고속으로 돌려본다면, 꽃은 피는 중이거나 지는 중이다. ‘꽃이 피어 있다’라는 표현을 당연시하는 사람은 각주구검의 초나라 사람과 다르지 않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꽃의 생멸을 감안하지 않은 처사이기 때문이다.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삼매 중 가장 수승한 삼매라는 뜻의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는 처한 경우에 따라 수릉엄삼매, 반야바라밀, 금강삼매, 사자후삼매, 불성의 다섯 가지로 불린다.

수릉엄삼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6바라밀이나 10바라밀 중 제6의 공칭(共稱)이며. 모든 바라밀 중 제일이다. 6바라밀은 6근(根), 6경(境), 6식(識)의 제법(諸法ㆍ 만물과 현상)이 본래 공(空)한 그의 실상지(實相智)로써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실상지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혜로서 반야를 의미하고, 바라밀의 뜻은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지(實相智)로써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10바라밀의 10은 만수(滿數)라 저 실상지(實相智)의 반야행(般若行)이 원만히 이루어져 궁극에 이름이니 각각 순서를 체계적으로 보여 반야의 용(用)을 크게 구분한 것이다. 곧 10바라밀 또는 6바라밀의 체[體ㆍ바탕, 근본]가 반야바라밀이라 할 수 있고, 그 밖의 바라밀은 모두 반야바라밀의 용[用ㆍ작용]이라 할 수 있다.

금타(金陀) 저(著), 청화(淸華) 편(編)의 〈금강심론(金剛心論)〉 제1편 제1장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의 독해(讀解)〉에서 반야바라밀을 ‘심밀(深密)의 정지(正智)로써 피안에 도달하는 법’, ‘무위법(無爲法)의 무루지(無漏智)로써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는 법’, ‘실상지(實相智)로써 피안에 도달하는 법’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반야심경〉의 ‘行深般若液羅蜜多時’에 대한 금타대화상의 풀이는 ‘심밀(深密)의 정지(正智)로써 피안(彼岸)에 도(到)하는 법을 수행(修行)할 시(時)에’이다.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는 것은 오온(五蘊) 곧 ‘물질[色]과 마음[受想行識]’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를 비롯한 일체 고액(苦厄)의 고해(苦海)를 건너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물질과 마음은 항상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닌, 망상분별에 의한 가상가명(假相假名)으로서 본래 공(空)함을 지속적으로 조견(照見)하는 것이 반야일행(般若一行)이다.

심밀의 정지이며 실상지인 반야는 곧 연기(緣起)에 철저(徹底)한 공지(空智)이다. 여기에서 공은 단공[但空, 단지 비어있는 공]이 아닌 공즉시색[空卽是色ㆍ공이 곧 물질]의 묘유(妙有)인 진공(眞空)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ㆍ물질이 곧 공]의 진공이다. 곧 묘유가 진공인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조견하는 것이 반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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