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타 스님 4

 

 

<서신1>

대원성 보살아. 세상사리 자미 있는지? 만사(萬事)가 무비몽중(無非夢中)인데 그저 그 말 할 테지. 꼬마들 충실하고 아빠 처사도 度世攝心(도세섭심)에 불자의 긍지를 잃지 않고 지내는지? 떠나기 전에 부산가면 꼭 한 번 가 보아야지. 꼬마 木鐸(목탁) 희자가 빨리 안 보낸다고 극성 하는 바람에 나도 大木(대목)에게 빨리 야단쳐서 칠도 안하고 보내니 농방 같은 데 가서 칠을 하면 예뿔게다. 자 해제하고 나가면 들리기로 하고 이만 안녕. 관음보살.

1972년 여름, 내가 결혼한 후 처음 일타 스님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오시기 전에 주신 편지다. 내게 목탁을 선물하자고 희자 스님이 일타 스님께 건의했던 이야기와 칠도 안 한 목탁을 보내게 된 사연을 적고 있다.
나는 결혼 후에도 집에서 매일 기도를 올렸는데, 아마도 스님께서 나의 기도정진에 힘을 보태주시려 했던 것 같다. 목탁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목탁을 볼 때면 일타 스님과 희자 스님이 떠오른다.

 

 

<서신2>

여러 불자들의 성의에 다만 합장할 뿐. 복되게 쓰겠습니다. 요즘 자연보호운동 때문에 나무창고, 변소깐 등 불량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새로 짓는데 일꾼들이 계속 일하고 있다. 마당에 담장 쌓고 마당 아래도 단장하고 일이 많았지만 이제는 다 끝났으니 아무 염려 마시오. 연꽃모임 돌 날 모두 오십시오. 무엇을 준비했다가 드릴까? 가야산 스님.   ※법해월이 보낸 김공양 잘받았습니다.

일타 스님이 해인사 지족암에 계실 때다. 크고 작은 불사를 하실 때면 연꽃모임 도반들과 함께 찾아뵙곤 했다. 가끔 해인사를 다녀오면 도반들 모두가 환희심과 신심에 가득 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와 도반들은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통도사, 범어사 등 여러 사찰을 찾고 스님들 법문도 많이 청해 들었다. 당시는 우리 같은 젊은 신도들이 많지 않아서 우리 도반들은 가는 곳마다 환영일색이었다. 그러다보니 우리들의 신심도 나날이 커질 수 있었다.
스님이 가끔 우리 집으로 오시는 날엔 집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집안이 터질 지경이었다. 스님은 “아이구, 눈이 너무 가까이 있어 민망스럽구나”하시면서도 신이 나서 법문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스님의 법문을 차분하게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법회를 연 집주인으로서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집은 늘 스님과 신도들로 북적거렸다. 길에 서성이는 스님만 보이면 이웃 사람들은 우리 집을 찾는 줄 알고 우리 집을 알려 줄 정도였다. 다른 많은 도반들이 자신의 집에서도 스님을 모시고 법회를 보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난다. 스님은 비좁은 공간에서 법회를 보시면서도 불편한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으셨고, 법회가 끝나고 우리 집에 묵으실 때도 불편한 내색 한 번 없으셨다. 오히려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책이며 장난감들을 일일이 치워주셨다. 새로 들어온 도반들의 법명도 일일이 챙겨 지어주셨고 신심 돋게 하는 법문도 많이 해주셨다.

연꽃모임 도반들과 일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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