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평상심

“대덕들이여, 시간을 아껴야 한다. 옆길로 빠져 바쁘게 돌아다니며 선을 배운다, 도를 배운다, 하면서 명구(名句)를 가지고 아는 척하며 부처를 찾고 조사를 찾거나 선지식을 찾아 그 뜻을 시험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단지 그대들에게 부모는 하나뿐이다.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려 하는가? 그대들 스스로가 자기 내면을 보아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연야달다(演若達多)가 자기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찾아 헤맸지만, 찾아 헤매는 그 마음을 쉬었을 때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덕들이여, 무엇보다 평상심이 중요하니 남의 모양을 흉내 내지 말라. 좋고 나쁨도 구별하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 같은 무리들이 있어 곧잘 나는 신을 보았다거나 귀신을 보았다면서 동쪽이다 서쪽이다 가리키면서 맑은 날이 좋다 비 오는 날이 좋다 하나니 이런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반드시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좋은 집안의 남녀들이 이들 여우나 도깨비 같은 무리들에게 홀려 괴상한 짓들을 하고 있다. 눈먼 중생들이여, 시주 밥 갚아야 할 날이 있을 것이다.”

선을 주체적인 자아확립을 위한 수행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누구냐?”는 자기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철저한 자기 탐구라고 말할 수 있다. 〈임제록〉을 읽으면 이러한 자기 확인에 대한 경책의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을 배우고 도를 배우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신의 내면을 반조(返照)하라고 일러준다. 반조란 보통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사자성어로 말하는데 외부 경계에 끌려가는 마음을 안으로 되돌려 고요히 자신의 심성을 관하는 것을 말한다. 육근(六根)의 창밖에 전개되는 것을 내다보지 말고 시선을 거두어 보고 듣는 성품을 관하라는 말이다. 옛 선시(禪詩)에 “청산은 티끌 밖의 모습이요 명월은 선정 안에 있는 마음이네. 꽃을 보고 색의 공함을 깨닫고 새소리를 듣고는 듣는 성품을 밝힌다.(靑山塵外相 明月定中心 看花悟色空 聽鳥明聞性)”고 하였다.

연야달다(演若達多)는 〈능엄경〉 4권에 나오는 사람 이름인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다 광기(狂氣)가 발동 자기 얼굴이 없어졌다 하고 얼굴을 찾아 실라벌성 거리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미혹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평상(平常)은 광기가 쉰 상태를 말한다. 연야달다의 광기가 쉬면 평상이다. 머리는 본래 없어졌던 것이 아니다. 아무 일이 없었는데 홀연히 광기가 발동한 것이다. 보통 평상심이라 하면서 이것이 도(道)라고 하였다.

어느 날 조주 선사가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남전이 대답했다.
“평상심이 도이니라.”

대화는 계속된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그 도를 붙잡을 수 있습니까?”
“잡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잡을 수 없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도’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도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생각으로 아는 것이라 하면 그건 망상이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면 자각이 없는 것이다. 안다든가 알지 못한다든가 하는 분별을 없애면 바로 거기서 도가 나타난다.”

여기서 나온 유명한 말이 ‘道不屬知不知(도불속지불지)’다. 도는 아는 데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 속하지 않는다.

“남의 모양 흉내 내지 말라.”는 것은 선의 절대 독립을 강조하는 말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결코 모방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서 남을 흉내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이런 말도 전해진다.

“장부에게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으니 여래가 간 곳을 따라가지 말라.(丈夫自有衝天志 莫向如來行處行)”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