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중국 영향 벗어난 고려

찻물 온도 지켜내기 고민해
탕호를 다구로 활용하는 등
고려인 취향·실용성 반영
中문화 모방 점차 줄어들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청주 주자와 승반(받침).

고려시대 비색 청자 다완(茶碗, 찻사발)은 찻그릇의 예술미와 실용성을 두루 갖춘 일품의 차 도구이다. 맑고 은은한 비색 사발이 주는 안정감은 맑고 따뜻한 차의 색, 향, 미를 담아내기에 족하다. 그러므로 간극의 예술미를 갖춘 청자 다구의 완성이란 바로 고려인의 차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 그 시대의 문화적 성숙도를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찻그릇은 그 시대 차 문화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인 셈이다. 이런 관심으로 고려시대 다구를 살펴보면, 청자 찻그릇의 형태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차를 즐긴 고려인의 취향과 실용성이 담론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다구(茶具, 점다할 때 사용하는 차 도구)의 쓰임새를 주목해 가는 과정에서 고려인의 실용성이나 응용력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이런 문제를 풀어 줄 중요한 문헌이다. 그가 기록한 12세기 고려인이 사용했던 다구로는 탕호(湯壺)와 은로탕정(銀爐湯鼎), 비색 다완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도경〉 ‘기명(器皿)’, ‘다조(茶俎)’에서 드러난다. 〈고려도경〉에 언급된 탕호의 모양과 쓰임새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탕호의 모양은 마치 꽃병과 같은데, 조금 납작하다. 위에 뚜껑이 있고 아래에는 승반이 있어 따뜻한 기운이 식지 않도록 했는데, 또한 옛날 온기(溫器)에 속한다. 고려인은 차를 끓일 때, 흔히 이 탕호를 사용한다. 전체 높이는 1척 8촌이고 지름은 1척이며, 용량은 2말이다. (湯壺之形 如花壺而差扁 上蓋下座 不使泄氣 亦古溫器之屬也 麗人烹茶多設此 通高一尺八寸 腹徑一尺 量容二斗)

윗글은 ‘기명’의 일부 내용으로, 탕호는 뜨거운 물을 담는 용구이며 용량은 2말이었음이 드러난다. 당시 고려인은 가루차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탕호에 뜨거운 물을 담아 이동했을 것이며, 탕수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기 위해 승반(承盤)을 사용했다. 이는 가루차를 격불(擊拂, 다선으로 차를 휘저어 거품을 만듦)할 때,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다화(茶花)가 곱게 섬세하게 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탕호를 이용하여 뜨겁게 끓인 물을 이동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원래 승반(承盤)은 호(壺, 주자(注子), 혹은 주전자)에 들어 있는 물질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뜨거운 물을 담아두는 용기이다. 주자(注子, 주전자)의 받침에 해당된다. 그리고 서긍은 탕호를 설명하면서 “옛날 온기(溫器)에 속한다”고 하였다. 온기(溫器)는 그릇 속에 들어 있는 물질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그릇이다. 승반이 있는 탕호는 온주(溫酒, 따뜻하게 먹는 술)를 담는 용기나 혹은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탕류(湯類)를 담았던 그릇이다. 그런데 12세기 고려인들은 차를 끓일 때 탕호를 사용했다는 것이 서긍의 증언이다. 탕호를 다구(茶具)로 응용했던 고려인의 지혜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송나라에서는 탕호를 사용한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 고려인의 개방적이고도 활달한 응용력이 돋보이는 탕호의 쓰임새다.

한편 탕호의 모양이 꽃병보다 낮고 퍼진 납작한 형태였고, 뚜껑과 승반이 있었다는 사실도 서긍을 통해 밝혀진 것인데, 현재 고려시대 유물 중에 승반이 있는 탕호는 술주자(注子)와 차 주자(注子)로 썼다. 그런데 현재까지 어떤 것이 술주자이며 어떤 형태가 차 주자인지는 분명하게 분류되지 않았다. 차후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개진되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고려시대 다구에 관한 기록은 ‘기명’의 ‘다조(茶俎)’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좋아하여 도구를 잘 만든다. 금화오잔, 비색 작은 다완, 은로탕정은 모두 중국 것을 모방해 만든 것이다. 무릇 연회를 열면 뜰 중앙에서 차를 끓여 은하로 덮어 천천히 걸어와서 내려놓는다.(邇來頗喜飮茶 益治茶具 金花烏盞翡色小췛銀爐湯鼎 竊效中國制度 凡宴則 烹於庭中 覆以銀荷徐步而進)

보스턴박물관이 소장한 은제 주자와 승반.

윗글에 따르면 12세기 고려에서는 송나라의 다구를 모방하여 찻그릇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12세기 고려에서 생산하는 차와 다구들은 이미 중국 찻그릇의 모방하던 과정을 벗어나 고려 색채를 띤 차 문화를 형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다구의 형태에 있어서도 고려인의 기호와 안목, 풍토성을 함의한 찻그릇이 생산되어, 독특한 찻그릇을 완성했다. 특히 비색 청자의 맑고 은근함은 고려 색을 담아낸 그릇으로서 맑고 은근한 차의 품성을 담아내 비색과 어우러진 담백하고 생기 있는 고려 차의 풍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찻그릇이다.
그뿐 아니라 고려에서는 북송에서 유행했던 흑유잔도 생산되었는데, 백차의 구름 같은 차의 아름다운 색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효과를 준 그릇이 바로 금화오잔이다. 오잔(烏盞)은 검은색 찻잔으로 백차를 선호했던 시기에 유행했던 찻그릇이다. 그런데 금호오잔엔 검은 발색의 찻그릇에 찬란하게 빛나는 꽃이 그려진 찻잔, 이는 송대의 토호다잔(兎毫茶盞)이 넘볼 수 없는 예술미를 드러낸 찻그릇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려인의 상상력과 이상은 찻그릇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 고려인의 당당함은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 고려에서 만든 차를 대접했다는 대목에서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에서 생산하는 차의 맛은 쓰고 떫어서 입에 댈 수가 없다. 오직 중국의 납차나 황실에서 보낸 용봉단차를 귀하게 여긴다. 중국 황실에서 선물로 보낸 차 이외에 상인들도 판다… 중략 … (연회에서)시중드는 사람이 말하기를 ‘차를 다 돌렸습니다’라고 말한 뒤에야 차를 마실 수 있었으니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관사 안에는 붉은 찻상에 다구를 진열한 다음 붉은 비단으로 만든 상보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씩 차를 맛보는데, 이어 탕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탕을 다 마시면 반드시 기뻐하였고 혹 다 마시지 않으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여 불쾌히 여겨 가버리기 때문에 항상 억지로 마셨다.(土産茶味苦澁不可入口 惟貴中國臘茶幷龍鳳賜團 自錫賚之外 商賈亦通販… 中略… 候贊者云茶遍乃得飮 未嘗不飮冷茶矣 館中以紅俎布列茶具於其中 以紅紗巾쵸之 日嘗三供茶而繼之以湯 麗人謂湯爲藥 每見使人飮盡必喜 或不能盡以爲慢己 必怏怏而去 故 常勉强爲之黍也)

윗글은 고려시대 차 문화와 관련하여 서긍의 경험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보고 느낀 고려 차의 맛이 쓰고 떫어서 마실 수가 없었다고 말한 점이다. 그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간 시기는 선화 5년(1123)으로, 고려 인종 때이다. 당시 고려의 차 문화는 가장 난만한 문화를 형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생산한 뇌원차의 품격은 송에서 생산한 단차와도 견줄 수 있는 차였는데, 이는 이규보의 〈시후관에서 쉬면서(憩施厚館)〉에 “차를 다려 맛보니(試嘗一췛銘) 맑고 시원한 차 거품이 내 목으로 넘어가네(氷雪入我喉)”에서도 그 품격이 확인된다.

그런데도 서긍은 무슨 연유로 고려에서 생산된 차가 쓰고 떫어서 입에 댈 수가 없었다고 말한 것일까. 그 답은 이렇다. 바로 그가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 점이다. 당시 고려도 백차를 선호하여 단차류인 가루차를 마셨다. 단차의 음다법은 다완에 가루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후, 격불하여 다화(茶花, 차 거품)를 피워내는 점다(點茶)였다. 그런데 서긍이 말한 것처럼 식은 차를 마셨다는 것인데, 식은 차의 맛은 쓰고 떫어진다. 이는 바로 차의 탄닌 성분이 공기와 접합하면 쓰고 떫은맛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긍이 고려에서 만든 차를 입에 댈 수 없었던 연유는 의례 절차 때문에 그가 차를 마신 시점에는 이미 차가 식었을 것이다. 그러니 차가 쓰고 떫어서 차를 입에 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뜨거운 상태에서 차를 마셔야 그 효과가 증대되는 것인데, 이를 어겼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특히 윗글에서 주목할 대목은 고려의 탕법의 특징이다. 왕실에서는 사신을 위해 하루 세 차례 차를 올렸고 이어 탕을 낸다고 한 점이다. 그리고 고려인은 탕을 약이라 말했다는 것인데, 이는 식은 차의 문제점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로, 뜨거운 탕을 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려인은 식은 차를 마실 경우를 대비하여 차의 효능을 극대화할 방법으로 뜨거운 탕을 마시게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또한 고려인의 차에 대한 응용력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탕은 무엇일까. 끓인 물인가, 아니면 뜨겁게 차를 우린 것일까.

이에 문제를 해결할 문헌적 자료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12세기에 북송에서는 산차(散茶, 잎차)를 만들었으니 당시 고려에서도 산차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뜨겁게 우린 차를 탕이라 하고 약이라 말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극진히 손님을 대접하는 풍습은 고려 시대뿐 아니라 현대의 풍속에서도 남아 있는 모습이다. 현대의 생활 풍속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90대까지만 해도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정서는 여전하였다. 그러므로 서긍이 서술한 고려인의 습성은 현재까지도 실존하는 풍습이란 점에서 민족성이란 그 산하와 풍토 위에서 그 특징적 함수 관계를 축적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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