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칸 넘는 대가람 북녘 ‘흥왕사’ ?

고려 문종代 창건된 흥왕사
10만평 규모… 경복궁 버금
“궁궐보다 사치” 기록 남아
사찰 주위 성벽, 행궁 역할
최이 희사 금탑 流轉 ‘눈길’

국보 제214호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1229년 개풍군 흥왕사에서 사용할 용도로 제작됐다는 기문이 남아있다. 화려한 향완으로도 흥왕사의 당시 위상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은 어디일까? 

물론 땅 넓이로 따지자면 지역을 넘어 팔도 방방곡곡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 여럿 있지만 땅 넓이로만 놓고 ‘최대 규모’라고 하기에는 좀 머쓱하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대답하면 우리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은 개경 근처에 있던 흥왕사(興王寺)다. 건물의 수와 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문종 21년(1067년) 기록에 의하면 “흥왕사가 완성되었으니, 무릇 2,800칸이었으며, 12년에 걸쳐 공사가 완료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숙박 기능을 하는 원(院)이 여럿 딸렸었는데 그 중에 규모가 컸던 흥교원은 160칸이었다고 한다. 절과 원을 합치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대략 3,000칸 규모가 넘었다는 얘기다.

칸수로는 잘 짐작이 안 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넓이까지 부연하자면 전제 32만㎡(약 10만 평)다. 서울 경복궁 정도의 수준이다. 

건물 숫자나 칸수를 비교하자면 흥왕사에 버금갔던 절은 불국사 정도가 유일하다. 물론 지금의 불국사를 상상하면 안 된다. 1740년 동은 스님이 엮은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한때’ 불국사는 80종 건물에 2,000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불국사의 약 8배 규모다. 그래도 흥왕사 규모에 비하면 2/3에 불과하다. 

縣 하나를 통째로 옮겨 건립
흥왕사는 현재의 북한 개풍역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글 어스에 들어가 인공위성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개풍역 주변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평야와 그 길 끝에서 만나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사찰이나 산성 터로 짐작되는 곳도 보이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여하튼 평지가람이었다는 말이다.

흥왕사는 고려 문종 10년(1056)년 처음 지을 땅을 정하고 문종 21년(1067)에 완공했다. 12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절을 짓기 위해 현(縣) 하나를 통째로 옮겨버렸을 정도다. 이런 대규모 토목 공사에 반대가 없었을 리가 없다.

당시에도 시끄러웠고, 후세에도 그랬다. 고려 후기 문신 이제현은 문종의 치세를 극찬했지만 딱 한 가지 잘못이 있으니 흥왕사를 창건한 것이라고 했다. “그 절의 높고 훌륭한 집은 궁궐보다 사치하고, 높이 쌓은 성은 나라의 수도와 비슷하여 황금으로 탑을 만들었으며 모든 시설들이 이와 비슷하였다. 이는 거의 양 무제와 비교될 만하다. 문종은 후대에 자신의 덕을 찬미하고자 하는 자가 이것에서 탄식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적었다.

어떤 궁궐보다 크고 화려해
‘궁궐보다 사치했다’는 흥왕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흥왕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은 1948년 발굴 기록이다. 당시 발굴에 참가했던 동국대 황수영 박사가 〈불교와 미술〉에 남긴 기록을 보면 입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8각 목탑 터가 있었고 일직선상에 석등, 금당, 그리고 강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회랑 바깥쪽으로 동원과 서원이 있었다. 그 동원과 서원 바깥으로도 건물터가 이어진다. 회랑을 치고 원을 구분한 모습은 불국사와 흡사하다.

물론 이 발굴조사에서 나온 기록 등은 창건 당시 사원의 규모와 배치는 아닐 것이다. 흥왕사는 1067년 낙성됐지만 이후에도 불사는 계속됐다. 1070년에는 사찰 주변으로 아예 성을 쌓았다. 담이 아니라 성을 쌓은 이유는 이곳이 행궁의 기능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몽진했던 공민왕은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궁에 머물 수가 없자 흥왕사를 행궁으로 사용했다.

1078년에는 금탑을 올렸고 1080년에는 이 금탑을 보호하는 석탑을 쌓았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이 금탑은 은으로 내부를 만들고 금으로 표면을 입혔다고 하는데 은이 427근, 금이 144근 사용되었다. 144근이면 86㎏이 넘는다. 2000년대에 법주사 청동대불에 도금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사용된 금이 80㎏이었으니 대충 흥왕사 금탑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수영 박사는 ‘서쪽 가람지에서 이 석탑의 흔적을 찾았다’고 쓰고 있다. 

흥왕사 금탑은 이밖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무인 집권기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희사한 13층 금탑이다. 충렬왕 때 원성공주가 흥왕사 금탑을 궁궐로 옮겨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최우가 희사한 금탑이었을 것이다. 또 이동이 가능했던 걸로 봐서는 야외에 세운 대규모 탑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사용된 금은 200근이 넘었다고 한다. 

웅장하고 화려했던 자씨전과 금탑
거개가 그렇듯이 종교 건축물이나 조각은 순수한 창작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되 부분적으로 변화를 주는 형식이 많다. 흥왕사의 건물이나 탑 등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금당 앞에 있던 팔각목탑 두 기는 고구려 시대의 목탑이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 사찰은 목탑이 많았는데 평양 청암리사지(혹은 금강사지)에 있던 7층 팔각 목탑은 그 높이가 60미터 이상으로 추정되고, 정릉사지 팔각목탑의 경우도 그 규모가 청암리사지 목탑과 비슷한 규모였다. 흥왕사에 있던 두 목탑은 고구려 대목탑 규모의 1/3정도로 추정된다. 다만 황수영 박사는 금당터 앞의 목탑은 그 건립 연대가 흥왕사 창건 연대와 비슷한 중국 산서성 응현 불국사의 팔각 5층 목탑이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 흥왕사 건물이나 내부 장식의 많은 아이디어는 중국에서 온 것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와 고려의 모습을 기록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흥왕사 불전 내부는) 문왕이 사신을 보내 중국의 상국사를 모방해 양쪽 벽에 그림을 그렸다’고 되어 있다. 

역시 상상이긴 하지만 흥왕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물을 꼽으라면 자씨전과 그리고 최이(최우)가 희사했다는 금탑을 꼽고 싶다. 

자씨전은 흥왕사가 낙성된 지 3년 후인 1070년 지어진 건물이다. 자씨전 하면 낯설지만 용화전, 미륵전, 장륙전이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바로 미륵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아마 금산사 건물이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금산사에는 현재의 미륵전을 비롯해 3층짜리 건물이 세 개나 있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이(처음에는 최우로 불리다 나중에 최이로 개명)가 희사한 금탑의 유전(流轉) 역시 남다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금 200근이 넘게 들어갔다는 이 금탑은 이동이 가능한 크기였던 것 같다. 그 덕에 부침을 겪는다.

충렬왕은 고려 왕 중에서는 최초로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인물이다. 부인이 바로 원성공주 즉 제국대장공주였다. 제국대장공주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충렬왕이 요양 차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어떤 절에 가던 길이었는데 시종하는 사람이 적다는 이유로 충렬왕을 지팡이로 때리고 돌아갔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흥왕사에 갔던 제국대장공주가 금탑을 보고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아예 금탑을 내궁으로 들여놓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공주가 (금탑을) 마음대로 쓰고자 하니 왕이 그만 두게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 (충렬왕)은 내내 울기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금탑은 결국 흥왕사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 갑자기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자 제국대장공주는 관리에게 치료법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금탑을 도로 흥왕사로 돌려보내야 한다”였다. 남편을 구박했지만 과부가 되기 싫었던 제국대장공주는 금탑을 냉큼 흥왕사로 돌려보낸다. 이후에 충렬왕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는데, ‘꾀병’이었다는 의심은 나에게만 드는지 모르겠다. 

몽골 침입으로 불탄 흥왕사
1231년 10월 몽골군의 1차 침략이 시작됐는데 〈고려사〉에는 12월 25일(양력) 몽골군이 흥왕사를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을 쌓고 행궁 역할도 했으니 군사가 있었을 터이고 결국 몽골군이 이곳을 공략 대상으로 삼은 것이리라. 

여하튼 이때 흥왕사는 거의 모든 건물이 전소된다. 금당은 물론 목탑도 불탔을 것이다. 웅장한 자씨전도 함께 사라졌으리라. 

전쟁이 끝나자 흥왕사 재건이 시작됐다. 이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찾았다고 하나 위용이 그대로였을지는 모르겠다. 이후에도 절은 그 명맥을 이어가다 조선 초 어느 때 기록에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다만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 있으니 최이가 희사한 금탑이었다. 이동이 가능한 형태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고려 멸망 후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야사에 따르면 흥왕사의 보물인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탐냈다고 한다. 심지어 명나라 영락제까지도 “금탑을 가져올 수 없을까”라고 묻곤 했단다. 결국 명의 요구가 귀찮았던 태종 이방원은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 손에 들려 보내줬다고 한다. 물론 ‘야사’일 뿐이다. 중국의 어떤 기록에도 이 금탑의 행방은 없다. 발굴이 덜 된 북녘땅 어디에라도 고이 모셔져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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