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임제선의 돈오돈수

“여러분, 마음의 법칙은 형상이 없으면서도 온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으로는 본다 하고, 귀로는 듣는다 하며, 코로는 냄새를 맡는다 하며, 입으로는 말한다 하며, 손으로는 잡는다 하며 발로서는 걷는다 한다.

본래 하나의 정명(精明, 마음)이 나뉘어 여섯 가지 화합이 되었으니 한마음이 없어지면 어디서나 해탈이다.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뜻이 어디 있는가 하면 도를 닦는 사람들이 밖으로 치달리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저 옛날 사람들의 부질없는 기용(機用)과 경계에 끌려가 놀아나기 때문이다.

여러분, 산승의 견해를 가지고 말한다면 보신불, 화신불의 머리를 깔아뭉개버려야 한다. 십지의 수행을 채운 보살도 아직 빌어먹는 거지와 같고 등각, 묘각도 목에 형틀 걸치고 발에 족쇄를 찬 죄인에 불과하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뒷간의 똥오줌 같고, 깨달음이라느니 열반이라느니 하는 것도 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이다. 어째서 그런가? 도를 닦는 이들이 삼아승지 겁이 공한 줄을 알지 못하기에 이런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인이라면 이렇지는 않다. 다만 인연을 따라 묵은 업장을 없애며, 형편대로 옷 입고, 가고 싶으면 가고, 앉고 싶으면 앉을 뿐 한 생각도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무슨 인연으로 그러한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생사에 윤회하는 큰 조짐이라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어지면 어디서나 해탈이다.’ 이 말은 외부의 경계에 끌려가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외부의 경계에 끌려가면 마음속에 어떤 관념적인 생각이 생긴다. 그러면 본래의 공적지심(空寂之心)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임제의 법문은 이 대목에 와서 매우 강렬해진다. 도를 닦는 수행자가 어떤 관념적인 생각에 묶여 있는 것을 타파하는 말들이 계속해서 설해지고 있다. 먼저 마음이 시방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이 말은 마음이 시공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마음이 툭 터지지 못해 경계를 의식하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해탈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보신불이니 화신불이니 하는 부처에 사로잡혀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보살 십지(十地)나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지위도 부질없는 것이고, 나한이나 벽지불도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점교(漸敎)나 점수(漸修)의 수행방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제의 근본 종지(宗旨)인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대의가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다. 임제선의 특징이 바로 돈오돈수다.

선수행에 있어서 종지를 세워 실참(實參)을 할 때 대표적인 두 가지가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다. 규봉종밀(圭峰宗密ㆍ780~841)의 〈도서(都序)〉에는 돈점(頓漸)의 문제를 7가지 유형으로 설명, 7대 돈점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에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돈점의 문제를 대표한다. 돈오란 단번에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뜻이다. 이는 ‘한번 뛰어서 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一超直入如來地)’는 말과 같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취지를 나타내는 말로 중국 선종 특히 남종선의 특색을 이루며 일반화된 말이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포착하여 시간적인 과정을 빼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육조단경〉에 혜능이 직접 말하기를 “홍인 화상의 문하에서 한 번 듣고 바로 깨달아 진여의 본성을 단번에 보았다”는 말이 나온다. 또 실제적인 참된 수행이 돈오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미혹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것은 무명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迷心修道 但助無明)”고 하였다. 그리하여 단번에 깨닫고(頓悟)부터 점점 닦아(漸修)나간다는 말이 일반적인 말처럼 쓰이다가 돈오의 순간에 점수가 함께 완성된다는 돈오돈수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근기가 뛰어난 상상지(上上智)의 사람의 경우라고 규봉은 설명했다.

마지막 대목에 와서 하는 말은 진정한 도인은 자기 업(業)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기 때문에 불과(佛果)를 구하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업(業)을 지어 부처가 되려는 것은 부처가 바로 생사윤회의 큰 조짐이다”는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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