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이해의 길 39

“니 눈빛만 보고 네게 먼저 말 걸어 줄 그런 여자는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한때 가요계를 강타했던 4인조 혼성그룹 자자의 ‘버스 안에서’라는 노랫말이다. 얼마 전 추억을 소환하는 TV 프로그램인 ‘슈가맨’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노래는 한 여인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 채 상대가 내 마음을 알고 먼저 다가오기를 바라는 소심한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다고 가수는 잘라 말한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는데, 어떻게 마음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에서 많이 작동하고 있는 마음과 언어는 선(禪)과 교(敎)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교종이 붓다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 중심의 불교라면, 선종은 이심전심(以心傳心)에서 드러나듯이 마음을 중시한다. 선은 달을 가리키는 수단인 언어에서 시선을 떼고 직접 마음을 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선불교가 국내에 소개된 것은 신라 말이다. 선종은 가지산문이나 실상산문을 비롯한 아홉 개의 산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가리켜 흔히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한다. 구산선문이 형성되면서 한국의 불교계는 화엄종이나 법상종과 같은 교학 중심에서 벗어나 실천을 중시하는 선 중심으로 재편되기에 이른다.

처음 선불교가 소개되었을 때, 기존 교학에서는 ‘악마의 말(魔語)’이라고 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평등을 강조한 선은 대중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으면서 차츰 그 영향력을 키워갔다. 당시의 교학불교는 돈과 지식, 권력을 지닌 소수의 왕족이나 귀족들만 향유할 수 있는 고급문화였다. 이러한 그들만의 리그를 모든 이들을 위한 불교로 확대시킨 것이 바로 선불교다. 선은 돈과 지식이 없어도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신문화를 바라문들이 독점하고 있던 상황에서 자신이 깨친 진리를 모든 대중들에게 개방한 붓다의 이념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열린 가르침에 대중들은 환호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계급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부처로서 평등하다는 선불교의 정신은 당시에는 혁명에 가까웠다. 이는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면서 평등을 외쳤던 2,600여 년 전 붓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정신이 선불교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들에게 선불교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전국에 구산선문이 형성되고 선종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교종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에 따르면 이 둘이 서로 ‘원수처럼’ 싸웠다고 하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둘을 소통시킬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선사(禪師)임에도 불구하고 교종에서 중시하는 〈대장경〉을 3년 동안이나 연구하였다. 그가 찾은 해답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禪是佛心)이며, 교는 부처님의 말씀(敎是佛語)’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곧 마음을 밖으로 드러낸 것이 말씀이니, 선과 교는 하나라는 뜻이다. 마음과 언어가 만나면(會) 서로 통(通)할 수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결론이다. 선교회통(禪敎會通)의 전통이 확립되는 순간이다.

불교를 아무리 다양하게 설명한다 해도 그 본질은 ‘깨침과 자비’에 있다. 그리고 깨침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자비를 통해서 실천되어야 한다. 깨침과 자비를 둘이 아니라(不二)고 하는 이유다. 깨침을 향한 길이 선(禪)이라면 자비, 즉 중생을 위한 길이 바로 교(敎)다. 마음으로 깨친 진리를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럴 때 비로소 깨침과 자비, 선과 교는 하나가 된다.

이를 일상에 적용하면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선이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교는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서운한 마음이 많이 있더라도, “사랑합니다”는 말 한 마디면 그동안 쌓인 모든 감정이 눈 녹듯 녹고 만다. 이처럼 말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마음과 언어가 만나면 소통이라는 엄청난 에너지가 작동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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