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속이 상해도 주인공에 넣어 한번 돌려놔라

질문 대행 스님 법문을 들어 보면 일체가 둘이 아닌 도리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항상 여러분들한테 “둘로 보지 마시라. 둘로 생각하지 마시라. 둘로 행동하지 마시라. 생시에 그렇게 아주 뿌리가 내려서 완벽하게 자기가 잡혔다면 꿈에도 하다못해 벌레를 봐도 둘로 보지 않는다. 어떠한 무서운 귀신을 본다, 어떠한 뱀을 본다, 어떠한 짐승 큰 거를 본다 하더라도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무서운 것도 앞에 닥치지 않는다.” 그러죠. 우리가 생시에 모른다면 죽어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공생이라는 거를 한번 생각해 보셨느냐는 얘기 많이 하죠, 공생. 내 몸뚱이 하나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공생입니다. 그 이치는 다 아시죠?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도, 오장육부에 다 생명들이 들어 있다고요. 그래서 내 몸 하나를 봐도 공생이요, 외부의 모두를 봐도 공생으로 산단 말입니다. 그러니 공, 공을 갖다가 수만, 수십만 개를 한데 합쳐도 공은 공이거든요.

이러니까 또 거기에 달라붙는 게 뭐냐 하면 마음입니다. “마음은 없는 게 마음이다.”라고 한 것은 어떤 마음을 마음이라고 이름을 부르느냐 하는 얘깁니다. 어떤 마음을 쓸 때에 마음 썼다 이럴 수 있습니까. 이거는 사람이 사는 데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그렇게 자유스럽게 쓰라고 내놓았는데도 여러분들은 모두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깐 자기 차원에 따라서 마음을 쓰게 되겠죠. 작으면 작은 대로 쓸 거고 크면 큰 대로 쓸 거고, 더 크면 더 큰 대로 쓸 거고, 마음이 바다라면 바다같이 크게 쓸 거고. 그래서 이 마음이 크고 작은 대로 그냥 쓰고 살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어떤 게 진짜 마음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그러니깐 모두 작은 거나 큰 거나, 나쁜 거나 좋은 거나 한데 합쳐서 한마음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한마음 속에서 모든 게, 좋게 나오든지 언짢게 나오든지 그 한마음 속에 있다.

근데 그 한마음 속에 있는 거는 알지만 실천하기는 극히 어렵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알고 한다고 하더라도 삼 일이 못 가서 그것은 다 폐지가 돼 버리고 말죠. 그런데 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은 그냥 사흘도, 이게 날짜를 두지 않고 끝없는 날을 그냥 여여하게 그냥그냥 그대로 사는 거죠. 그대로 ‘이것이 이렇게 잘못됐구나. 이게 잘했구나. 이게 못했구나.’ 이런 게 없이 그대로 그렇게 그런 마음이 돼 있어요, 아주. 그런 마음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 천차만별의 마음을 쓰는 그 뜻을 그대로 쓰고 살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영계들이나 어떠한 무서운 악령들이라든가 무서운 악의 어떠한 문제도 달려들지 못한다 이런 뜻이죠. 왜냐. 그걸 둘로 보지 않기 때문이죠. 생명도 내 생명같이 생각하고, 내 생명같이 존중하고, 내 생명 아닌 생명같이 생각하라. 내 마음 아닌 진짜 마음, 이게 즉 한마음입니다.

우리가 모습은 다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그 산다는 생명이라는 건 하루 만에 죽는 거나 며칠 만에 죽는 거나 여든 만에 죽는 거나 백 살 만에 죽는 거나 생명이라는 자체는 똑같아요. 모습은 죄 다르지만 그 마음 씀씀이야 어디 둘이겠습니까. 이게 바로 공체입니다.

요만한 모습도 있다는 거, 움죽거리고 산다는 거 이거죠. 공체. 우리가 전부 공체죠. 이 사람이라고, 짐승도 이렇게 소나 무엇도 딱 배 갈라서 이렇게 다 해 놓으면 참 그거 볼 만할 겁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죠. 육신을 잘라서 갈라 놓으면 그 육신이 죽는 바람에 그 육신 속에 있던 생명들도 다 같이 소하게 되죠. 죽게 되죠. 그러니까 공체며 공용이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을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다 이게 어느 정도 돌아가야 진짜 보살행으로 넘어간단 얘깁니다. 남이 보살이다, 보살이 아니다 이러기 이전에 말입니다. 스스로서 행동하는 거 보면 벌써 알아요. 그 행동은 자기가 마음 쓰는 대로 행동이 나오는 거니깐요. 그게 공용이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이다. 공용을 하는 거기 때문에 공식으로 돌아간다. 찰나찰나 환경이 바뀌고 또 환경이 바뀌고, 찰나찰나 바뀌어서 돌아가는 일들을 그냥 여여하게, 그냥 바뀌는 대로 그냥 바꿔지면서 살아나가고 있다. 본래 우리가 여여한 생활을 산같이 물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 마음들이 그렇게 되질 않아서 그걸 인식도 못 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그게 어렵게 생각되고 그냥 잠재해 버리죠.

몰락 그냥 놔 버리면 스르르르 봄이 와서
얼음장 같은 그 딴딴한 마음이
다 녹아 버리는 거예요.
일체가 둘이 아닌 도리에 대해

공식 하면 벌써 원식이데 그걸 먹는 걸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이 몸이 있는데, 이 모습이 있는데 모습이 이 모습 안으로 싹 들어갔을 때를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모습 안으로 이 모습이 천차만별로, 만 개가 들어갔는데도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 있는 자체가 바로 공식이기 때문이죠. 공한 자체기 때문에 이 공한 자체에 이 공한 자체가 모두 들어가면 그냥 공식이 돼 버리죠.

그래서 부처도 중생도 둘이 아니다. 보살도 중생하고 둘이 아니다. 벌레하고도 둘이 아니다. 이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그 점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정말 우리가 그 도리를 모른다면 우리 도깨비장난 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영상으로 그냥 체가 생겨 가지고 그냥 구름 위에 떠다니면서 그냥 움죽거리고 사는 것과 같은 거죠.

이걸 정신 차려서 듣지 않으신다면 요다음 생에 자기가 훨훨 털고 나설 수가 없어요. 이건 ‘듣고 보는 데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하는 그 자체 가운데에 바로 듣고 알 수 있다는 얘기죠. 이 모습 아닌 모습, 생명 없는 생명, 마음 아닌 마음, 함이 없는 용, 또 모든 것을 함이 없이 할 수 있고, 먹을 수 없이 먹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을 다, 바닷물을 다 삼킨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닷물을 삼켰으면 바닷물을 토해 낼 줄을 알아야 하는 그 도리가 원식이라고 할 수 있죠. 지금 말로 “공식이다” 이렇게 말을 해도 됩니다.

그러면 그 바닷물을 다 집어먹었을 때에 그 물속에 뭐든지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을 테죠. 죽는 것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아픈 것도 들어 있고 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그 마음 속에, 별의별 가정 속의 마음들이, 그 애타는 마음들, 이쪽에는 이런 거 저쪽에는 저런 거 모두가 이렇게 들어 있는 그 자체가 몽땅 그 바닷물 한 속에 들어 있어요. 바닷물 한 속에 들어 있는 거를 다 삼킬 수 있어야만 그게 공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걸 진짜 공식이라고 하려면 그것을 내놓을 수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그 물을 정화시켜서 내놓을 수도 있어야 된다 이런 소리죠.

이 문제가 참, 우리가 그냥 듣고 그냥 보고 이렇게 그냥 헤어지고 이러지만 그걸 헤어지든지 듣든지 잠을 자든지 깨든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살아나가면서 시시때때로 악한 사람도 만나고 선한 사람도 만나고 악한 일도 생기고 선한 일도 생기는 데서 다 이 둘 아닌 도리를 배우시란 얘기죠. 이 악한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을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으로써 둘이 아니게끔 관해 놓으면 그것이 스스로서 둘이 아니게 처리가 된단 얘기죠. 그것이 이렇게 공부하는 길이거든요.

또 우리가 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악한 문제가 생기게 되면은 그거를 내 탓으로 돌리고 그걸 관해 놓아라. 그것은 상대방도 자기이기 때문이죠. 그럼으로써 그것이 성취된다거나 그것이 잘 무마가 된다거나 이렇게 된다면 그게 바로 경험이자, 바로 자기가 길을 가는 데에 걸림 없이 여여하게 걸어가는 길이죠. 이게 모두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그런 겁니다.

주인공에 맡기는 것으로도 화두참선을…

질문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간화선으로 화두 참선을 중시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주인공에 맡겨 놓는 것으로도 화두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인지요?

답변 그런데 중요한 말이 하나 있죠. 모든 것을 색만 보고 급급하게 돌아가지 말라. 주인공에 일임하면 그렇게 화목하게 되고, 남을 죽이지 않게 되고, 욕심이 안 나고 사상(四相)이 안 생기고, 모든 욕심이, 삼독이 빠진다 이겁니다. 그건 왜 그런가. 보이지 않는 무(無)의 세계의 그 무전자의 능력으로 하여금, 무전자는 부동하지만 능력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하여금 유전자는 수가 없이 생기는 거죠. 수가 없이. 그래서 갖가지로 생기죠. 금방 아팠다가 금방 이게 가난하고 돈도 없고 뭐, 고독하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회사의 일도 안되고 뭐, 술집을 하는데 술도 안 팔리고 밥집을 하는데 밥도 안 팔리고, 전부 이렇게 여러 가지로 되어 있는데, ‘이걸 주인공에다가만 맡기면 이게 되나?’ 이렇게 생각하겠지마는 거기에는 수가 없이 그것이 다양하게, 아무리 꺼내도 꺼내도 줄지도 않고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도 않죠.

그러면 그게 뭐냐? 유전자로 해서 분신이 화한다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유전자로 하여금 이 전부, 내가 저 사람이라면 저 사람으로 그냥 돼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체가 없는 겁니다. 수천수만이 된다 할지라도 그 손이 없는 손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손이 되고, 그 손이 된다면 이거는 아무리 손이 많이 있어서 많이 쓴다 하더라도 쓴 사이 없이 쓴 것이고, 그 손은 되남는 겁니다.

그걸 떡으로 비유한다면, 부처님께선 공양 한 그릇으로 표현을 했어요. 그 떡 하나라면 그 떡을 가지고 이 세상만사에 다양하게 천차만별로 씀씀이가 되는 거를 그 떡 하나로 다 해결을 하고 떡 하나가 되남더라는 얘기예요. 그건 그대로 고정, 즉 말하자면 부동하게 그냥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무궁무진한 겁니다.

그러니 그걸 말로 어떻게 다 합니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거죠. 한 가지만 돼 있어야 한 가지 ‘이런 것이다’ 하고 말할 텐데, 천차만별로 돼 있으니 이것이 다양하게 여여하게 돌아가는 거를 어떻게 요런 것이 요렇다, 조런 것이 조렇다 하고 얘길 할 수 있겠어요.

부처님 경전에도 이렇게, 화엄경이니 금강경이니 반야경이니 아함경이니, 이 모두를 해 놓은 게 바로 여러분의 근기에 따라서, 어느 거든지 하나만 그것을 깨치면 바로 여러 가지가 다 주산이 놔진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래서 “천칠백 공안이 다 도의 문이니라.” 한 것이, “그것이 바로 화두고 그러니라.” 했는데, 나는 모르는 사람 앞에 화두를 또 준다면…. 이 공한, 이 사대가 공한 이 자체가 이 세상에서 나오고부터 그대로 화두며 그것이 진리예요. 그 사대가 공한 이것이 진리거늘 여기에다가 또 화두를 남한테 받아 가지고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이건 근래에 있는 거예요. 전자의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 법이 없었어요. 그냥 네가 생긴 것이 태초요, 네가 생긴 것이 화두니라.

그런데 딴 사람이 내 밥을 대신 먹어 줄 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구원을 받으려고 그러고, 항상 내가 잘되는 걸 타의에서 받으려고 한다면, 이건 전자의 석존으로부터 가르쳐 내려오신 조사 스님네들에 그 누가 되는 겁니다, 첫째. 둘째, 내가 이롭지 못하고 세세생생에 끄달릴 테니 얼마나 누가 되는 거냐. 얼마나 불충이냐 이겁니다. 육신적으로 뼈를 빌리고 살을 빌려서 내가 이렇게 생긴, 이 나를 낳아 준 육신 부모들한테도 누가 되는 거죠, 전부. 나 하나만 깨치면 전체가 다 공해서 일심으로, 공용으로서 돌아가기 때문에 내 가정 내 집들도 다 유유히 편리하게 돌아가는데 아, 나 하나가 그렇게 모르니 전부 끄달려서 인과응보와 유전성이 그냥 얽히고설켜서 뭐, 녹아지기는, 풀어지기는커녕 외려 덧붙여지지 않으면 다행이죠. 그러니 우리가 녹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덧붙여 놓는 셈이다 이겁니다, 몰락 놓지 않는다면.

왜? 이런 거 보셨죠? 큰 얼음 덩어리가 있는데 그거를 녹이려고 끓는 물 한 바가지를 갖다 부어 보십시오. 잠깐 그 거죽만 이렇게 녹는 듯했다가 다시 끓는 물 한 바가지 부은 것이 되얼어서 같이 두더기가 돼 버립니다. 안 그럴까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몰락 그냥 놔 버리면, 봄이 오면 스스로서 끓는 물 한 바가지 떠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서, 그 딴딴한 얼음은 스스로서 녹을 것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속이 상해도 주인공에 넣어 한번 돌려놔라. 그러면은 금방 칼이라도 있으면 찔러 죽이리만큼 속이 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스르르르 봄이 와서 얼음장 같은 그 딴딴한 마음이 다 녹아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사대오온이 공해서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즉 말하자면 삼심이 공해서 일심으로써 이렇게 돌아가니 모든 걸, 너한테서 나오는 거 너한테다 놔라 이겁니다. 그것이 화두이자 바로 길이니까. 진리니까.

키우는 애완견이 축생고에서 벗어나길…

질문 요즘은 애완동물들을 많이 키우는데 그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동물로 태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간 곁에 있으니 마음공부를 하기가 더 쉽겠죠? 저도 애완견을 한 마리 키우고 있는데 그도 빨리 진화돼서 축생고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답변 여러분 가까이에 개나 고양이, 집에서 기르는 말, 소 이런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많이 보고 왔고요. 그런데 우리 사람들도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몇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런 짐승들도 몇 안 되지만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이 있습니다. 그네들은 인간처럼, 인간이 돼야만이 벗어날 생각도 해 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두 발로 걷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항상 사람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자기 생명까지 겁니다. 몽둥이로 때려도 울면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하면서 그렇게 바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보다 더 나은 짐승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주인의 은혜를 생각해서 항상 생명과 몸을 다 바쳐서 때로는 그 식구가 다 죽을 거를 면케 해 주는 그런 짐승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짐작하시겠죠.

옛날에도 내가 말했죠. 어느 대갓집에서 농사를 지으면 항상 이 쌀을 갖다 놓고선 그 싸래기 빻은 거는 항상 쥐들 먹으라고 풀어 놔 줬다고요. 그 주인이 지혜가 풍부해서 그렇게 마음대로 먹게 놔두니까 쌀을 건드리지를 않았더랍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식구가 다 죽게 생겼어요, 쥐들이 보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어떻게 갚을 길이 없어요. 그 은혜를 생각하고 많이 배웠어요, 쥐들이.

그래서 쥐 모습을 벗어 버리려고 무지하게 앨 쓰고 가던 중 어느 날, 그 옛날에는 기와집을 하면은 그 진흙을 갖다가 그냥 포겸포겸 놓아 가지고는 기와를 올렸더랍니다. 근데 그게 오래돼서 몽땅 가라앉으니깐, 자는데 그 식구가 다 죽겠거든요. 그래서 쥐 새끼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다 나와서, 마당에 나와서 막 삑삑거리면서 춤을 췄답니다. 막 춤을 추니깐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여러 마리가 그러니깐 ‘이거 잠 못 자겠네.’ 하곤 나왔더랍니다. “얘, 이거 구경해라. 쥐들이 춤춘다.” 하고 그러니깐 식구가 다 나왔다 이겁니다. 다 나와서 그 구경을 하는 도중에 지붕은 폴딱 그냥 가라앉아 버렸죠. 그렇게 지붕이 가라앉으니깐 그때서야 춤을 멈추면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다 헤어지더랍니다.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을 거쳐야 부처가 되는 까닭에. 부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걸 벗어 버리기 위해서지. 그렇게 해서 그 은혜도 갚을 뿐만 아니라 은혜라고 할 것도 없이 그네들은 인간이 그 너그럽고 지혜롭게 살림살이하는 거를 다 지켜보면서 배웠더랍니다. 그래서 그 식구들도 살리고 그 쥐 새끼들도 다 홀연히 다 벗어났더랍니다. 인간으로 말이에요. 인간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죠.

이 쥐 새끼만 그런 게 아니라 물에서 있는 거라든가, 허공에서 있는 거라든가, 들에서 있는 거라든가, 땅속에 있는 거라든가 다 공부하는 그 모습이 보입니다. 모습은 다 다르지만 오래오래 살다 보면 그런 마음이 진화가 되고 또 마음이 열리고 지혜로워지고, 그래서 남을 해치지 않고 독성을 뿜지 않고….

어느 보살님은 항상 개를 보면서 ‘너는 새끼를 뱄는데 나는 어째서 새끼가 없어서 대를 잊지 못하게 하느냐.’ 하면서 항상 눈물을 흘렸더랍니다. 그러니깐 그 개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항상 같이 눈물을 흘렸더랍니다. 그러다가 새끼를 놔 놓고는 금방 죽더랍니다. 그래서 ‘왜 죽었나. 새끼를 놔 놓고 죽었으니 이걸 어떡하면 좋은가.’ 하고 우유를 먹이면서 인제 새끼들을 기르는데 개 어미가 죽고 난 뒤 바로 애가 들어섰어요, 그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그 애를 기르는 데도 그렇게 영리하고 착하고 의리와 도의를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렇게 밝고 이름이 빛이 나더랍니다. 그 개는 순간의 모습이 개였지만 순간에 바뀌어서 사람으로 그렇게 탄생을 해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사람을 살리려고 그렇게 앨 써도 저놈의 강아지 왜 짖느냐고 그냥 듣기 싫다고 몽둥이를 가지곤 그냥 때리고 돌맹이질을 하고 그러거든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그래서 아이, 도둑만 알지 보이지 않는 데서 들어와서 사람을 헤치는 거는 모르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그 개는 수 년 그 집에 있으면서 그 인간의 도리를 다 배웠고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해 주려고 그냥 자꾸 짖고 하는 건데 ‘저놈의 개가 짖어서 잠도 못 자게 한다’고 돌맹이로 치고 이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뛰어 달아나갔다 또 와서 그러고 또 와서 그러고 그러더니 그냥 그 식구들을 위해서 개가 그냥 죽었더랍니다. 피를 토하고 죽었더랍니다.

근데 어느 스님이 지나가다 그걸 보시고 “어, 이 집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 개는 모습을 벗었구나.” 이러시면서 “허허, 그것 참 기특하구나.” 이러면서 “너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무지하게 인연을, 좋은 인연을 만나서 잘 배우고 사람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 것이니라.” 그러곤 그냥 말을 하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그 주인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선 그 개를 얼른 거둬다가 묻어 줬더랍니다.

그렇듯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두 발로 걷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 생명과 자기 모습을 다 버리고 나섭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인간이 되면은, 중생이라고 비유를 했지만 너는 곤충에 불과하니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수백 년 수천 년 내려오면서 진화가 돼서 사람은 됐으나 사람 속에 뭐가 들었나요? 그렇게 지은 인연밖엔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먹고 살아야 하고 입고 살아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그 구조가 완벽해서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죠.

그러니깐 이 참, 부처님께서도 얼마나 그거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래서 “조복하라. 네 몸속에 있는 중생들도 둘이 아니게 조복하라.” 그 모습 속에 있는 곤충들이 이 사람과 둘이 아니어서 하나로 공해야 이 곤충 몸을 다 벗어버릴 수 있는 거죠. 이해가 가십니까?

우리 인간의 이 모습은 곤충의 집합소예요. 그 모습은 인간이고 부처라고 하지만, 마음도 그렇다 하지만 마음도 천차만별로 마음을 쓰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곤충도 인간으로….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그 곤충도 인간으로 화해서 하나가 돼야지, 그걸 조복을 받았다고 하고, 우리가 죽어도 죽은 게 없고 살아도 산 게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어떠한 모습도 마다 안 하고 모습이 될 수 있고 어떠한 뭐든지 아니 하시는 게 없이 하시되 함이 없이 하십니다.

이 모두를 따져 보면 우리가 얼마나 인생이 남았습니까? 이 모습을 버리기 전에 우리는 이 모습 속에 있는 이 곤충도 다 하나로 부합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의식에서 나오는 그 어떠한 병세, 어떠한, 즉말하자면 세균성이나 영계성, 인과성, 유전성 이런 것이 다 몰락 그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의식이 둘이 아니라 모두가 공심으로 돌아갔는데 어떻게 그것이 곤충으로 남아 있으며 그게 어떡해서 죄로 남아 있으며 인과성으로 남아 있겠습니까? 유전성으로 남아 있겠습니까? 이게 참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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