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법정스님의 종교관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어수선한데 종교가 거들고 있어 한 걱정들이다. 확진 환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이 신천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또 코로나가 잦아들 때까지 종교 모임을 하지 말아 달라는 데도 예배 멈추지 않은 교회에서 다시 집단 감염이 일어났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이며 어떻게 종교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종파선 종교 내다봄 사라져
본질과 보편성 바로 보아야
종교의 장점 받아 들인다면
내가 의지하는 종교 넓어져

법정 스님은 말씀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종교나 신앙이 절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당이나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와 신앙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청정한 마음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에 옛 어른들께서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고 간절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님과 신과 하나님이란 이름이 사람 입에서 불리기 이전에 우주 질서가 엄연히 있고 사람 도리가 있었다. 이 우주 질서와 사람 도리를 바르게 믿고 의지하는 데서, 부처님이 나오고 신과 하나님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울러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새삼스러운 물음이지만, 그것은 자비의 실현이고 사랑의 실천이다. 진정한 종교는 교회나 절이 아니라 제 삶 속에서 진실을 스스로 발견해간다. 따라서 참 종교인은 개념화된 신이나 부처에 의존하지 않고 교단 조직에도 매이지 않으며, 무엇이 참 진리이고 어떤 것이 진짜 신인지, 스스로 묻고 탐구하고 알아차리고 눈을 떠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종교나 신앙이 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당이나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가 지닌 본디 뜻이 제 마음을 추슬러 자비와 사랑을 펼쳐가는 것이라는 말씀을 제대로 새겨야 한다. 교단에 매이지도 않고 참다운 진리를 스스로 묻고 찾아가며 눈을 떠가는 사람이라고 드잡이하는 스승은 신이나 부처에게도 기대지 말라고 말씀한다.

“안으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에게 물을 일이 하나도 없다. 의문이란 마음이 명상하지 않고 들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진정한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다. 밖에 있는 스승은 다만 우리 내면에 있는 스승을 만나도록 그 길을 가리켜 줄 뿐”이라고 한다. 또한 “성인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남한테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남이 겪어 말해놓은 것을 내가 아는 체할 뿐이다. 내가 몸소 겪은 것만이 참으로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를 이룬다.”라고 말씀한다. 제가 겪어 쌓은 안살림이 개체에서 전체로 나아가며 옹근 나를 드러낼 때 비로소 이웃을 아우를 수 있다는 말씀이다.

스승은 또 길상사 창건 10주년 법회에서 “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다. 절이 생기고 나서 수행이 따라온 것이 아니다. 절에 다닌 지 10년, 20년 됐다는 신도들을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버릇처럼 절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다. 깨어 있어야 한다. 오늘 내가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다져야 삶이 바뀐다. 삶은 바뀌지 않고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그 절이나, 교회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 때문에 절에 나가는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지 그때그때 냉엄하게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성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다”라고 하면서 “절에 사는 스님들과 신도들, 또는 절을 의지해서 드나드는 불자들이 저마다 맑고 향기롭게 사는가. 맑고 향기롭게 개선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맑음은 개개인 청정하고 진실함을 말하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과 진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 메아리이다. 도량에서 익히고 닦은 기도와 정진하는 힘으로 스스로는 물론 가정이나 이웃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씀한다.

절이 있기 전에 수행이 있었다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스승은 “행여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행한다고 받아들이지 말라. 굳이 말하자면 깨달음은 보름달처럼 (본디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수행이란 본디 우리에게 있는 말간 마음자리를 드러내어 이웃을 보듬어 안으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철 스님도 절은 불공드리는 곳이 아니라 불공드리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고 말씀했다. 무슨 말씀인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웃을 부처님인 줄 알아 절에서 배운 대로 공양 올리라는 말씀이다.

절에서 배운 대로 이웃에게 공양을 올리고, 성당이나 교회에서 배운 대로 예수님에게 예배드리듯이 이웃에게 예배드리는 이들은 누구인가. 돌림병을 옮길 수도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척하지 않고 기를 쓰고 절이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는 의료진을 비롯해 의료진들에게 잠자리나 밥을 나누는 이들이며, 손님이 없어 쩔쩔매는 가게 주인들에게 임대료를 받지 않겠다거나 덜 받겠다고 나선 이들이다. 또 코로나로 힘든 이웃에게 쓰라고 안 먹고 모은 돈을 내놓은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 같은 이들이며, 필터를 갈아 끼우는 면 마스크를 만들어 나누는 이들이다.

그동안 익힌 정진, 어제로 끝나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

스승은 도량은 그곳에 사는 사람과 도량에 드나드는 사람들 삶이 맑고 향기롭게 바뀌어야만 비로소 도량다운 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거듭 말씀했다. 또 ‘길상회’라는, 파리에 있는 길상사를 열 때 힘을 보탠 어머니들과 정기 모임에서 “신앙생활은 예습이 없다.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다. 영적 체험은 복습을 거듭하며 얻어지는 것”이라며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어제까지 익혔던 정진은 어제로 끝났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스승이 말씀하는 정진이나 수행을 사람들이 흔히 여기는 정진이나 수행과는 결이 다르다. 스승이 책이나 편지에서 덕담을 나누면서 가장 많이 나눈 덕담이 “날마다 새롭게”라는 글월이 들어간 말씀이다. 어제 밥을 먹었더라도 오늘 또 새로이 밥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듯이 어제 이웃과 나눈 사랑은 어제로 끝이 났다. 그러니 오늘은 또 새롭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을 수행자라는 스승 말씀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가 쓴 <두 노인>이 그것이다.

두 늙은이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한 사람은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남에게 욕을 한 적이 없을 만큼 모든 일에 어김없는 고지식한 부자 농부 예핌 따라스비치 세베료프. 다른 한 사람 에리쎄이 보도로프는 돈도 별로 없으나 마음씨 좋고 명랑한 사람으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말 그대로 사나이다.

순례 길에 몇 주일째 걸으며 걸음을 멈추려 하지 않는 예핌. 에리쎄이는 잠깐 물을 얻어 마시고 올 테니 예핌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한 농가에 들어선다. 온 식구들이 굶주림 끝에 돌림병을 앓아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는 것을 본 에리쎄이는 성지순례 가기를 그만두고 그 사람들을 돌보기로 했다.

먼저 길을 떠난 예핌은 성지로 가면서도 논밭은 제대로 가꾸고 있는지 가축은 잘 돌보고 있는지 온통 집안일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한편으로는 지갑을 도둑맞지나 않을까 경계하느라 늘 바빴다.

에리쎄이는 앓는 이들을 돌보는 한편,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 집안 식구들이 병을 털고 일어난 뒤 먹고 살 식량과 땔감을 마련해놓고 집으로 돌아와 언제나처럼 명랑하게 집안일을 살폈다.

예루살렘에 닿은 예핌은 순례자들이 빼곡한 성당으로 들어가 예배를 올리려다가 둥근 빛에 둘러싸인 에리쎄이 뒷모습을 본다. ‘저 친구가 언제 왔지?’ 싶어 다가서려는데 친구 모습은 홀연히 사라지고. 이와 같은 일을 세 차례나 겪은 예핌은 집으로 돌아와 뒤늦게 깨닫는다. ‘아, 나는 몸만 다녀왔구나. 이 세상에서는 죽는 날까지 사랑과 선행을 다 하는 것이 사람 된 도리이구나.’

깨달으면 불자이기를 멈춘다는 스승은 “우리가 신앙을 가지려면 힌두교, 유태교,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처럼 종파라는 문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스승은 종파라는 울 안에 갇히면 드넓은 종교 지평을 내다볼 눈을 잃는다. 종파는 가지를 거쳐 줄기와 뿌리로까지 내려가지 않고서는 종교에 담긴 본질과 보편성을 바로 헤아리기 어렵다. 가지는 자세히 살피면서 뿌리를 잊어버린 사람은 길을 잃은 나그네와 다르지 않다. 한쪽 가지만을 붙들고 그게 다라고 거기 집착하면 독선이요 맹신과 광신에 떨어질 위험이 따른다. 그러니 종파에 구애받음 없이 여러 종교가 지닌 좋은 특성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다면, 내가 믿고 의지하는 종교 영역이 그만큼 넉넉해질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 끝에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마가복음)”라고 덧붙이셨는데 요즘 종교인들이 새겨둬야 할 가르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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