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삼교 및 한유와 선종

중국사상사 유·불·도 조화
도교, 불교 이론·사상 모방
유교·불교 일찍 상호 교류
유교 선비 정토 수행·출가
한유, 훼불 선동하여 배척도
태전선사 만남 후 선종 심취

 

중국 사상사에서 유ㆍ불ㆍ도는 상호 조화를 이루면서 유구한 역사를 함께했다. 불교는 인도의 석가모니부처님을 기원으로 하며, 유교 기원은 공자를 효시로 하고, 도교는 노자 장자를 기원으로 한다.

중국의 한나라 초에 일찍이 도교가 한때 유행을 한 적이 있다. 한나라 이후 도교는 사실 장도릉(張道陵)이 창건했다고 한다. 유가는 일반적으로 종교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한나라 때 동중서(董仲舒)라는 유학자가 유교를 종교화 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위진남북조 이래로 이 세 가지를 삼가(三家) 혹은 삼교(三敎)라고 부른다.

초창기의 도교 이론은 비교적 옅으며, 처음에는 실재로 이론체계 및 수행체계도 수립된 것이 없었다. 외래에서 유입된 불교를 만나면서부터 이론 방면(사실은 경제방면)에서 모순적인 대립을 했을 뿐만 아니라, 처처에서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

사실 도교는 복식(服食) 연단(煉丹, 단약) 방술(方術) 이외, 이론 방면에서 불교와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도교는 목숨을 걸고 불교를 반대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몰래 불교의 이론과 사상 등을 표절했다.

도교의 〈태평경(太平經)〉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 등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낸 표절 작품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책들은 서진도사 왕부(王浮)가 위조했다고 전해진다.

도교는 노자의 탄생 이적 등 모두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설화를 베낀 것이며, 도교의 계율 등도 불교를 모방한 것이 많다. 또 도교는 천태종의 제2조인 남악혜사(南嶽惠思, 515~577)의 발원문(誓願文)을 표절하기도 했다.

남조 시기, 갈홍(葛洪, 284~364) 도홍경(456~536) 등은 도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갈홍의 저서로 〈포박자(抱樸子)〉가 있고, 이 책에서 ‘현(玄)’이라는 개념을 제시해서 천지만물의 근원으로 삼았다.

그는 온힘을 다해서 복식(服食) 연단(煉丹, 단약) 방술(方術) 신선 등을 제창했다. 도홍경(陶弘景)의 저술로 〈진고(眞誥)〉가 있다. 또 그는 아주 유명한 연단가(煉丹家)이자 정객(政客)이기도 했다. 호를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도 했다. 갈홍과 도홍경은 모두 신선과 불로장생을 선양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자세는 통치자를 현혹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들이 주장했던 사상은 기본적으로 불교와는 전혀 다른 물과 불 같은 관계였다. 현존하는 도교의 방대한 도장(道藏)의 내용도 긴 시간을 통해서 불교를 모방한 작품들이다.

그림, 강병호

 

반면에 불교는 탄탄한 이론적인 체계를 바탕으로 실천수행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실천수행을 통한 검증된 체험의 세계를 설하고 있다. 또 불교는 공환(空幻) 환유(幻有)를 주장해서 해탈 열반을 추구하면서, 생사윤회를 벗어나기를 강조하고 ‘무생(無生)’ 즉 무자성(無自性)을 주장한다. 불교의 이러한 사상에 대해서 도교는 격렬한 반대와 논쟁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양승유(梁僧裕)가 지은 〈홍명집(弘明集)〉과 당도선(唐道宣)이 지은 〈광홍명집(廣弘明集)〉에 잘 수록되어 있다.

불교가 최초로 중국에 전해질 때 유교와는 모순이 없었다. 후한 모융(牟融)이 지은 〈이혹론(理惑論)〉은 유교와 도교를 인용해서 불교를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강승회(康僧會)는 불교도로서 유교와 도교를 주동적으로 조화롭게 논하기도 했다. 위진 남북조시대에도 유교와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역사와 함께 공존해 왔다. 동진시대의 손작(孫綽)은 일찍이 〈논어주기(論語注記)〉를 지은 사람으로 지도림(支遁)을 가까이 하면서 〈유도론(喩道論)〉을 짓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유교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한집안”이라고 하면서 “주공이 곧 불타이고, 불타가 곧 주공이다. 대개 내외의 이름이 될 뿐이라고 했다”고 했다. 이때에 유가(儒家)의 선비들은 많은 사람들이 불교로 귀의했으며, 불교도 역시 유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이른바 여산십팔고현(廬山十八高賢) 중 뢰차종(雷次宗) 종병(宗炳) 등은 모두 유교의 선비로서 정토를 수행했다. 여산의 혜원선사 역시 유가를 깊이 연구하기도 했다. 남북조에서 수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출가자가 유학자 집안의 출신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유교와 불교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나라 때 한유 등은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유교는 도교처럼 극단적인 대립은 없었고 다만 개인적으로 반대한 정도였다. 그러나 불교는 판교를 할 때 유교를 가장 하위에 두는 판교를 하였다.

당나라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생들이 비교적 불교를 많이 반대하였는데, 그 이론이 그리 깊고 체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한유를 꼽을 수 있는데 그 역시 불교에 대해서 그리 깊은 식견을 가지고 불교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가 지은 〈원도(原道)〉를 보면 더욱 극명해진다. 그는 유학자의 입장에서 유교전통을 통해서 중국전통문화를 보호하려 했다. 이른바 도통(道統)이라는 이론을 수립해서 유가의 덕목인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가지고 유가를 보호하려 했다. 그는 불교의 면세, 부역 해택 등에 대한 불만 및 승려들이 노동하지 않고 무위도식한다고 여기면서 불교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한유는 훼불할 것을 제창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을 환속하게 하고 사원을 개조해서 일반 백성이 거주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유(韓愈, 768~824)의 자는 퇴지(退之)이다. 등주(鄧州)인이며, 세칭 한창려(韓昌黎)라고도 한다. 그는 불교사에 등장하는 태전선사와 홍연의 일화속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대의 유명한 철학가 문학가 교육가이면서 당송 팔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문성(文聖)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유는 우리 불교사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귀양처에서 태전선사와 만남으로 인해서 호불(好佛)로 바뀐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도통학(道統學) 및 불교를 비판한 사건은 송명이학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당나라 헌종 때(819)에 국가적인 행사로 부처님 사리를 봉행하는 성대한 불교의식을 행하였다.

법문사의 부처님 손가락사리(手指骨)를 모셔서 궁중에서 공양하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불교신자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한유는 이러한 불교의식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서 부처님 사리를 궁안에 영접해서 법회를 봉안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하면서, 헌종에게 상소를 올려 옛적의 양무제를 빗대어서 말하기를 “불사를 해서 복을 구하면 더욱 화를 입는다”고 했다. 또 비평하기를 ‘불불족신(佛不足信)’리하고 하면서, 불교는 본래 오랑캐의 것인데(佛本夷狄), “입으로 선왕의 법을 말하지 않고, 몸은 선왕의 법복을 입지 않고, 군신의 의와 부자의 정을 알지 못한다.”며 “부처가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어서 말라 썩어버린 뼈다귀에 불과한데, 어떻게 황제께서는 죽어서 오래된 뼈다귀를 친히 궁정에 맞아드리는지 신이 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고 했다. 또한 “지금부터 이 뼈를 없애고 영원히 근본을 끊고 천하에 의심을 끊게 해서 후대에 의혹을 끊어야 합니다.”고 대담하게 황제를 훈시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유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다는 것은 너무도 황당한 것으로 사리를 불에 태워버려서 영원히 그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헌종의 분노를 사서 즉시 처형하라는 황제의 어명이 떨어졌는데 배도(裴度) 최군(崔群) 등이 적극적인 보호로 극형은 면하고 조주자사(潮州자사, 광동성 작은 해안도시)로 좌천되었다. 유배지에서 태전선사(大?禪師)를 만나면서 말년에 도리어 선종에 심취하게 되었다.

한유가 황제의 노여움을 받고 조주(潮州)에 유배되었을 때, 어느 날 길에서 고승을 만나게 되었다. 모양새가 매우 흉악하게 생겼는데, 특히 입 밖으로 삐져나온 두개의 치아가 더욱더 보기가 흉한 형상이었다.

한유는 생각하기를 분명히 저 스님은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단정하고 마음속으로 저 입 밖으로 삐져나온 치아를 없애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아에 돌아오니 문지기가 빨간 주머니(紅包) 하나를 주면서 어떤 스님이 주고 갔다고 했다.

그가 그 빨간 주머니를 열어 보자, 그 안에 두개의 치아가 있었는데 조금 전에 본 그 스님의 치아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내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는 사람을 보내서 그 스님에 대해서 알아보게 하였다.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그 유명한 조주 영산사(靈山寺)의 태전선사였다.

태전선사는 박학다식한 선승으로 유명했다. 한유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선사에게 사과를 했다. 이후 두 사람은 깊은 교유를 하였으며, 후래인들이 이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서 암자를 지었는데 고치암(叩齒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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