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해의 길 38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이 있다. 콩나물이나 시금치 등을 비롯한 각종 나물들을 밥과 함께 비벼서 먹는 간단한 음식이다. 그런데 밥과 나물들이 잘 어우러져 고유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고추장과 참기름이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빔밥은 나물들 각자의 맛은 유지하면서도 공존과 조화라는 새로운 맛을 낸다. 이 음식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모색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상징과도 같다.

비빔밥은 한국불교의 성격을 설명할 때도 종종 등장한다. 혹자는 한국불교를 가리켜 ‘비빔밥 불교’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종파불교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하나’로 회통(會通)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회통이란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서(會) 싸우는 것이 아니라 원만하게 소통(通)한다는 뜻이다. 화엄이나 유식, 천태, 선 등 다양한 종파들은 저마다 고유한 사상과 전통, 의식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선을 수행하는 이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화엄경〉과 〈법화경〉을 공부하며, 진언을 독송하기도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이런 한국불교의 성격을 비빔밥에 비유한 것이다.

회통이란 용어 앞에 원융(圓融)이라는 말이 더해지면 그 성격이 더욱 분명해진다. 원융이란 글자 그대로 원만(圓)하여 막힘이 없다(融)는 뜻이다. 아무리 다른 사상과 문화가 만난다 해도 두꺼운 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이를 허물고 서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한국불교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불교 내의 다양한 사상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 신앙과 회통하려는 모습은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자들은 사찰에 가면 대웅전에 참배하고 자연스럽게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들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한국불교가 항상 원융 회통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신라 때는 내 학설은 옳고 다른 학설은 그르다는 쟁론(爭論)이 ‘강과 바다’를 이루고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선종과 교종이 서로 ‘원수처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때마다 여지없이 회통의 에너지가 작동하곤 했다. 한국의 불교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사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곤 했다. 원효나 지눌, 휴정 등은 회통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대가들이다.

원효를 예로 들면, 그는 개합종요(開合宗要)라는 논리를 통해 당시 종파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는 각 종파에서 소의로 하고 있는 경론(經論)은 ‘하나인 마음(一心)’의 펼침(開)이며, 이것을 모으면(合) 다시 일심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각각의 종파 또한 일심을 펼친(宗) 것이며, 요약(要)하면 일심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를 물과 얼음, 수증기에 비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은 필요에 따라 여러 모양의 얼음으로 펼칠 수 있으며, 이것을 녹이면 다시 물이 된다. 여름에 팥빙수를 먹기 위해서는 물을 얼려야 하며, 겨울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물을 끓여야 한다. 건조한 공기를 촉촉하게 하려면 수증기도 필요하다. 물이나 얼음, 수증기는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H2O라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일심도 물과 같아서 필요에 따라 화엄이나 유식, 천태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원효의 생각이었다. 참으로 멋진 발상이다.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성향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DNA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회통사상은 나와 다르다고 해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서로 적대시하는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공존과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불교사상을 담을 수 있는 양푼, 요즘말로 플랫폼과 같다 할 것이다. 그 양푼 옆에는 여러 음식들을 맛있게 버무릴 수 있는 고추장과 참기름이 늘 놓여있다. 남은 것은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고 맛있게 비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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