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타 스님 2

 

일타 스님 서신.

 

설적산중(雪積山中)이라 일체왕래(一切往來)가 절(絶)한 곳. 한 달 만에 좁쌀 팔러 下山했던 자명이가 한 아름 찾아 온 편지와 소포, 그리고 소포 속에 또 접은 소식, 산중 사람 반가움을 한껏 더해 주었다네. 애기 하나 더 낳았다고? 우선 명과 복을 빌지만 이젠 고만 낳고 몸을 생각하도록. 내가 인디아에 갔을 적에 벽보판을 보니 아빠와 엄마 그려놓고 딸 아들 하나씩 밑에 그려 가족계획 전단을 붙여 놓았는데 사람들이 옆에다 꼬마 하나씩 더 그려 낙서 해 놓았더군. 곳곳마다 많이 낳고 싶은 욕심이 있는지 모르지만 골병드는 거 아닌지? 그러나 모두 행복하다니 불심광명의 소치라 다행이며 갱가신심 다하기 바라는 마음. 희자 소식은 어째서 없는지? 여기는 人跡(인적)이 미치지 않는 적적 심산.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내 모습이니 아무도 나를 얽매이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것 없이 순수한 나의 존재. 만사가 무비몽중임을 깨달으니 삼천대천세계가 한 낫 거품일세.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언젠가는 하산하겠지. 그럼 그때까지 안녕.

                                                                                       태백산중 도솔암에서

일타 스님이 경북 태백산 도솔암에서 상좌 자명 스님과 생식 수행으로 정진하실 때 율무를 보내드린 적이 있다. 율무를 받으시고 답으로 보내신 서신이다. 몇 줄 안 되는 서신에서 친정아버지 같은 마음을 느꼈다. 평소 늘 그랬지만 염려해 주시고 살펴주시는 마음이 내겐 늘 ‘아버지’였다. 이 서신을 받고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일타 스님은 평소에 도솔암을 고향처럼 그리며 언제가 한 번은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하셨다. 마침내 그곳에서 수행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한 번 가보고 싶어졌다. 나는 연꽃모임 도반들과 도솔암에 가기로 했다. 나는 떠나기 전 날 밤늦게까지 일타 스님께 드릴 김치와 일행 28명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도솔암은 쉬운 나들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먼 길인지도 생각해보지 않고 무작정 떠난 길이었다. 산 밑에서 일타 스님과 상좌스님을 만나 걷기 시작했는데 길은 거친 바위와 자갈뿐인 힘든 길이었다. 날은 어두워졌고 우리는 일타 스님이 가지고 계신 작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산행을 이어갔다. 커다란 김치통을 들고 낑낑거리는 내 모습을 보신 스님이 김치통을 스님 걸망에 옮겨지셨다. 스님과 우리 일행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 도솔암에 도착했다. 정말 힘든 길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뻥 뚫리고 환한 달이 나왔다. 도솔암이었다. 법당과 작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모두 앉아있기에도 좁았다. 우리는 각자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밤을 보냈다. 하지만 어려운 길 끝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 일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 일이 더욱 깊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일 때문이다. 나와 도반들은 다음날 하산때 스님들이 생식수행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밀가루와 솔잎 등 생식만 하신다는 것이었다. 힘들게 지고 올라간 김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김치를 힘들게 지고 올라가신 스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나 마음이 짠하다. 나는 도솔암에서 돌아온 후 율무를 보내드렸고, 율무를 받아보신 스님도 아마 그날을 생각하시며 서신을 보내신 듯하다.

1968년 범어사 보살계 수지. 일타 스님(중앙)과 대원성보살(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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