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려왕실 전해진 용봉차

황제용 어차(御茶)의 전파
가문의 영광으로 받아들여
제다법이 보다 세밀해지며
고려의 차문화 발달 이끌어

서긍의 〈고려도경〉 관회부분. 여기에서 사신과 고려 관속들이 차로 우의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차 문화의 융성은 좋은 차를 생산할 인력 및 찻그릇의 생산기반이 갖춰진 것 외에도 관료 문인들의 차 애호에서 기인했다. 특히 문인들은 차를 즐긴 여운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차 문화의 토양을 한층 풍성하게 만든 자양분을 공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구법승들이 중국을 왕래하며 당송의 발전된 차 문화의 흐름을 소개함으로써 고려의 차 문화는 송나라와 대등한 문화를 구가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송 황실이 보낸 황제용 어차(御茶)는 고려 차의 품질이 더욱 고급화되고 정밀할 수 있었던 자극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 차 문화는 송이 향유했던 새로운 음다 문화를 구가하며 융성한 차 문화를 실현했다.

고려 차의 향상에 자극제가 되었던 용봉차는 11세기 송 황제가 고려 왕실에 보낸 최고품의 차였다. 이런 사실은 고려사세가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문종 326월 정묘에 태자를 순천관에 보내 송나라 사신을 인도하여 오게 하였다.따로 보낸 용봉차가 10근인데, 한 근씩 금으로 도금한 은죽절합자에 넣어 명금오채로 장식하고 요화판 붉은색 칠을 한 갑에 담아 붉은 꽃무늬비단 겹보로 각각 쌌다. 용차가 5근이고 봉차가 5근이었다.(文宗 32年 六月丁卯 命太子詣順天館導宋使別賜龍鳳茶一十斤 每斤用金鍍銀竹節 合子 明金五綵 裝腰花板朱漆匣盛 紅花羅夾?複 龍五斤鳳五斤)

윗글에 따르면, 문종 32(1078)에 송 황제가 용차 10, 봉차 10근을 보낸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용봉차는 흔히 용봉단차라 부른다. 용단은 황제용 차이며 봉단은 왕자, 공주 등 귀족용 차이다. 용봉차는 연고차(硏膏茶)의 일종이다. 북송 때 정위(丁謂, 966~1037)가 대용봉단(大龍鳳團)을 만들어 황제에게 올린 후, 복건전운사(福建轉運使)였던 채양(蔡襄, 1012~1067)이 소용봉단을 만들어 명차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이는 건안 지역에서 생산된 차였다. 이로부터 건안은 최고의 명차 산지로 부상하였다. 제다의 원리에 밝은 정위와 채양은 대소용봉차를 만들어 높은 지위를 올랐고, 천하는 용봉단이라는 명차를 얻게 되었다.

당시 용봉단에 대한 문인들의 흠모는 대단하였으니 이는 구양수(歐陽脩, 1007~1072)귀전록(歸田錄)에 나타난다. 용봉단차에 대한 당시의 인식과 그의 찬탄은 아래와 같다.

차의 품질은 용봉보다 귀한 것이 없다. 이를 단차라 부른다. 무릇 8병이 한 근이다. 경력(송 인종, 1041~1048) , 채군모가 처음으로 소편 용차를 만들어 올렸는데 그 품질이 정밀하고 뛰어나 소단이라 하였다. 무릇 20병이 1근이며 그 값은 금 2냥에 해당된다. 그러나 금은 얻을 수 있지만 차는 얻을 수가 없다. 매번 남교에 재를 올림에 따라 서중과 추밀원에 각 일병을 하사하시니 네 사람이 나눴다. 궁인이 금으로 용봉을 화려하게 오려, 차를 장식했으니 대개 그 귀하고 중함이 이와 같다.(茶之品 莫貴於龍鳳 謂之團茶 凡八?重一斤 慶曆中蔡君謨 始造小片龍茶以進 其品?精 謂之小團 凡二十?重一斤 其價令金二兩 然 金可有而茶不可得 每因南郊致齋 中書樞密院各賜一餠 四人分之 宮人輒金?龍鳳花貼其上 蓋其貴重如此)

윗글에 따르면, 구양수가 처음 언급한 단차는 바로 대용봉단을 말한 것이다. 정위가 처음으로 대용봉단차를 만들었는데, 이는 당시 세상에 나온 모든 차 중에 가장 진귀한 차였다. 왜 그런 인식이 생겼는가 하면 대용봉단차는 연고차(硏膏茶)였기 때문인데, 당시로서는 가장 정밀한 제다 공정을 거친 신기원의 차였다. 연고차의 공정 과정은 시루에 찐 찻잎을 절구에 찧어낸 후, 다시 연()에 넣고 미세한 가루가 될 때까지 갈아 틀에서 찍어낸 차이다.

용단은 바로 용의 문양이 찍힌 차이며 봉단차는 봉황의 무늬를 박아 넣었기 때문이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대용봉단차의 단위는 근이며 한 근이 8덩이로 구성되었는데, 이 차를 만든 사람은 정위(丁謂)이다. 그는 대용봉단을 황제에게 진상된 후, 후한 상을 받았다.

대용봉단차보다 더욱더 세밀하고 귀한 차는 소용단차이다. 이 차는 송 인종(1041~1048) 채군모(채양의 자)가 소편을 용차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를 소용단이라고도 부른다. 이 차의 단위는 한 근이 20덩이다. 차의 품질이 어찌나 섬세하고 뛰어났던지, 세상에서 소용단과 견줄 수 있는 차는 없다고 평가할 정도로 귀한 최상의 황제용 차였다. 그러므로 구양수는 소용단 한 근은 금 2냥에 해당될 정도로 값이 비싼 차이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차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당시 소용단이 얼마나 귀한 차였는지는 다시 구양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는 매번 남교에 재를 올림에 따라 서중과 추밀원에 각 한 덩이를 하사하시니 4사람이 나눴다. 궁인이 금으로 용봉을 화려하게 오려 차 위에 장식했다고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소용단 한 덩이를 네 사람으로 나눴으니 이 차를 받은 신하는 황제의 신임을 인정한 증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소용단차는 가문의 영광을 증명하는 것이며 황제의 신임을 확인하는 상징물일 뿐 감히 즐길 수 있는 차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용봉단차를 고려 왕실에 보낸 황제는 신종이었다. 당시 용봉차의 단위는 한 근이 20덩이였으니 용차 100덩이와 봉차 100덩이를 고려 문종에게 보낸 것이다. 그런데 송 희령(熙寧, 신종 연호 1068~1077)년간은 새로 제다법(製茶法)으로 만든 고급 차들이 세상에 알려진 시기이다. 희령년간 이후에 처음으로 밀운용이 황실에 공납되었는데, 이 차는 소용단보다 훨씬 섬세하고 진귀한 차였고, 매해 두강 같은 진품이 출현했던 시기도 신종(神宗) 연간이다. 11세기는 중국 차 문화사에서 가장 격조 있는 차품이 풍자되던 시기인데 11세기 말부터 고려에서는 뇌원차(腦原茶), 대차(大茶) 등이 생산되었다. 대차는 단차 종류로 추정되며 뇌원차가 소용봉단 같은 종류라 생각한다.

송나라에서 고려 왕실에 용봉단을 보낸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예종 12(1117)에도 차를 보낸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는 고려사절요송 황제가 계향어주와 용봉명단을 보냈다(宋帝所賜 桂香御酒龍鳳茗團)”고 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차를 보낸 황제는 휘종(徽宗, 1082~1135)이었다. 휘종은 북송의 마지막 황제이다. 차에 깊은 심미안을 가진 그는 황제였지만 차의 이론서인 대관다론(大觀茶論)을 서술한다. 그런데 휘종은 백차(白茶)의 전성시대를 연 황제였고, 차를 예술로 승화시킨 차 애호가였다. 깊이 있는 차의 감식안은 육우의 풍모를 이어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차 문화사에서 육우와 쌍벽을 이룬 인물은 바로 휘종이라 하겠다.

고품격의 차 예술로 승회시킨 휘종도 고려에 차를 보내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서긍(徐兢, 1091~1153)고려도경에서 드러난다. 당시 사신으로 파견된 서긍은 제할인선예물관이라는 직책으로, 개경을 방문하였다가 송으로 귀국한 후 그간의 경과와 고려의 전반적인 정황을 서술하여 휘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당시 그가 올린 사행보고서가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속칭 고려도경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서는 고려의 문화, 풍습, 궁중, 전각, 관료, 사찰, 승려 등 전반적인 고려의 실상을 기록한 것인데, 그가 사신으로 파견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의 일이다. 당시 북송은 북쪽으로 요와 금에게 위협을 받았고 서남쪽으로는 서하(西夏)가 위협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므로 휘종은 고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정화년간(휘종, 1111~1117)에 고려를 요와 대등하게 국신(國信) 수준으로 높였고 고려의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다.

한편 12세기 고려 왕실에서 행해진 음다 풍속을 살펴보면, 고려도경관사(館舍)’정사는 여유가 있는 날에는 늘 그 (향림정)에서 상절 관속들과 차를 마시며 바둑을 두며 종일 담소를 나눴다. 이는 마음과 눈을 유쾌하게 하며 더위를 물리치는 방편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사신들과 고려의 관속들은 서로의 우의를 다지는 방편으로 차를 즐겼다. 그리고 고려 관속들이 송의 전반적인 문화 경향이나 수준은 사신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그 흐름을 엿 볼 수 있는 기회였음도 드러난다. 이런 사실은 고려도경관회(館會)’에서 확인된다. 관회의 내용은 이렇다.

사방에 보배로운 기물(寶玩), 골동 그릇(古器), 법서(法書), 이름난 그림(名畵), 기인한 향(異香), 기인한 차(奇茗)을 늘어놓았는데, 아름다움 모양과 진귀함이 눈길을 끌어 고려인 중에는 경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 좋아하는 것들을 원하는 대로 집어 주었다.(列寶玩古器法書名畵異香奇茗 ?瑋萬狀精采 奪目麗人莫不驚歎 酒?隨所好恣 其所欲取而予之)

윗글에 따르면, 관사에서 연회를 열 때 사신을 접대하는 관반이 서신을 보내 송나라 정사와 부사를 초청하여 대접하였다고 한다. 낙빈정에 초청된 중국 사신들은 송나라에서 가져온 기물들을 늘어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당시 사신들은 북송에서 가져온 기이한 차는 고려 관속의 관심을 고조시켰던 듯하다. 이를 통해 고려 관속들의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기인한 송나라 차에 관한 관심이 결국 고려 차를 발전시킨 동력이었음을 나타낸 사료라 하겠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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