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 45구담미경에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런 이야기가 있다. 그 비극의 주인공은 키사고타미 비구니이다. 출가 전에 외아들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과부였는데, 아들이 그만 병들어 죽고 말았다. 여인은 슬픔에 젖어 며칠을 눈물로 보냈다.

부처님이 여인의 사연을 듣고 위로하기 위하여 여인의 집을 찾아갔다. 부처님은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래도 죽은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겠다. 마을에 가서 한 번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서 그 집에서 겨자씨 한 알을 얻어오면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인은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여인은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니 고통이 반으로 줄었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기독교의 성경 누가복음 7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는 이와 비슷한 일화가 나온다. 여인의 외아들이 죽은 똑같은 사실인데 부처님과 예수님의 해결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 “여인아, 울지 마라. 내가 너의 아들을 살려주마.”,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였다.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사실이 각자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모양도 다르고 가치 평가도 다르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은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고정관념()이 형성되고, 그 거울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본다. 그것이 내가 만들어 낸 세계이고 우주이다. 태평양 원주민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도 천당도 극락도 없다.

<모든 번뇌의 경(맛지마니까야)>에서 모든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는 올바른 생각을 하면 괴로움은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현재 고통을 받고 있는 실제를 냉철하게 관찰하여 고통의 실상(實相)을 사실대로 이해하고, 그릇되게 인식한 허상(객진번뇌)을 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적 진리(교리)가 이치에 맞아야 하고, 과학적 진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대과학의 요구에 부합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밖에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전법선언에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이치에 맞고 의미를 갖추어 설법하라고 하였다. 법사는 설법의 주제와 내용이 논리적이고 이치에 합당하도록 설해야 한다.

언어문자는 인간의 약속된 부호이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수단인 언어문자가 중심이다. 인간의 사유도 언어문자를 통해서 한다. 불교의 교리를 청법 대중에게 이해시키려면 불교의 전문용어를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고, 어법에 맞는 쉬운 일상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는 복잡한 말과 비논리적인 말을 심리적으로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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