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禪 대미 장식한 임제종 종파

북송 선종 5가서 7가로 발전해
황룡혜남·양기방희 선사 개산
임제종 황룡·양기파 선풍 융성
한국·일본 선종에도 영향 미쳐

중국 강서성 평향 보통사 조사전. 달마대사를 중심으로 좌측은 스승인 석상초원, 우측이 양기방회의 진영이다. 양기파 개산조인 양기방회는 보통사서 선풍을 펼치다가 이곳에서 입적했다.

북송의 선종은 5가에서 7가로 발전되었다. 곧 5가 가운데 임제종에서 황룡파와 양기파로 분파되었다. 양기파의 방회는 강서성 평향 양기산에서 선풍을 전개했고, 황룡파의 혜남은 강서성 남창 황룡산에서 선풍을 전개했다. 황룡파는 황룡 혜남에서부터 허암회창(虛庵懷敞, ?~?)까지 단 8대 200여 년간 지속되다 단절되었다. 이후 양기파만 남아 임제종을 대표했다. 북송 후기에서 남송대로 접어들어 선종은 이미 임제종 천하였고 조동종이 겨우 연명하고 있는 ‘임천하동일우(臨天下洞一隅)’였다. 

양기파는 송·원·명·청대에까지 가장 번성한 선종 종파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일본 선종도 양기파의 선풍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 실증적인 사례의 하나로 청나라 강희 연간에 발간된 섭선(혲先) 스님이 저술한 〈속지월록〉에 모두 710명의 선사가 등장하는데 그 중 470명이 양기파 선사들이고, 나머지 240명이 위앙종·조동종·운문종·법안종·황룡파 선사들이다. 곧 양기파의 선사들이 중국선의 대미(大尾)를 이루었다. 여기서 황룡파·양기파 개산조(開山祖)들의 행적을 보자.  
  
황룡 혜남 
황룡 혜남(黃龍慧南, 1002~1069)은 강서성 신주(현 상요) 출신이다. 강서성 남창 황룡산(黃龍山)에서 임제의 선풍을 전개했다. 혜남은 황룡파 개조이며, 1110년 송나라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에게 ‘보각선사(普覺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11세에 신주 회옥사에서 지란을 의지해 출가해 19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여산 귀종사와 서현사 등지에서 수행하고, 운문종의 늑담 회징(莘潭懷澄, ?~?)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서 임제종 문열(文惇, 998~1062)의 권유로 형악(衡岳) 복엄사(福嚴寺)에 주석하고 있는 석상 초원(石霜楚圓, 986~1039) 문하에 들어갔다.

혜남이 초원에게 인사를 하자, 초원이 말했다. 

“그대가 운문의 선을 배웠으니 반드시 그 뜻을 얻었을 것이다. 동산의 세 차례 몽둥이는 때려야 하느냐, 때리지 않아야 하느냐?”
“때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까마귀 울고 까치가 울어도 모두 몽둥이를 맞아야겠구나. (잠시 침묵 후에) 조주선사가 오대산의 노파를 내 이미 간파했다고 하는데, 조주는 무엇을 간파했는가?”

혜남은 초원의 질문에 쩔쩔매매 답을 못했다. 이튿날, 혜남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초원은 쉬지 않고 욕을 퍼부었다. 혜남이 말했다. “사람에게 욕하는 것도 자비입니까?”

혜남의 말에 초원이 반문했다. “너도 욕을 할 수 있느냐?”
혜남은 스승과의 법거량으로 깨닫고, 게송을 지어 바쳤다.  
“총림에서 걸출한 조주여! / 노파를 간파함은 유래가 없는 일이로다./ 지금 사해가 거울처럼 맑으니, / 행인은 길과 더불어 원수되지 말지니라.”
- 송대 혜방의 〈송고 38수〉
 

이후 혜남은 강서성 홍주(洪州, 현 남창) 봉서사, 황벽산 적취암 등에 머물다가 1036년, 34세에 황룡산 숭은원(崇恩院)에서 선풍을 진작했다. 이곳에서 조심·극문·상총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본성을 깨닫는 지점까지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선풍이 있다. 삼관(三關)이라고 하는데, 스승이 선자를 접인할 때, 제시하는 세 가지 관문으로서 학인의 공부를 점검하고 참구케 하는 것이다. 마치 관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무서운 수문장처럼 이 문을 통과하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혜남도 선자를 지도할 때 삼관을 활용했는데, 이를 ‘황룡삼관(黃龍三關)’이라고 한다. 혜남은 찾아온 학인들을 만날 때마다 출신 고향과 출가한 연유를 물은 뒤, 다음 세 가지를 질문하였다. 

① 사람마다 태어난 인연이 있는데, 그대가 태어난 인연은 무엇인가?
② 내 손이 어찌 부처님 손과 닮았다고 할 수 있는가?
③ 내 다리가 어째서 당나귀 다리와 닮았는가? 

태어난 인연(生緣)·부처의 손(佛手)·나귀의 다리(驢脚), 이 세 가지를 학인들에게 제시했다. 또한 혜남은 제자들에게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을 강조하여 “아주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極小同大) 하나의 털끝에 부처의 세계가 나타나고(于一毫端現寶王刹), 아주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極大同小) 겨자씨 속에 수미산을 넣을 수 있다(可納須彌山入芥子中)”는 법을 설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황룡파는 법맥이 끊겼으나 일본 임제종의 개조(開祖)인 에이사이(뽔西, 1141~1215)에 의해 1191년 선법이 전해졌다. 

혜남은 세납 68세로 입적했다. 저술로는 〈황룡혜남선사어록〉 〈황룡혜남선사어요〉 〈서척집〉 등이 전한다. 한편 그의 4대(황룡-조심-사심오신(死心悟新)-조종혜방(趙宗惠方))에 걸친 어록집인 〈황룡사가집(黃龍四家集)〉(1141)이 전한다.  

양기 방회
양기 방회(楊崎方會, 996~1049)는 냉(冷) 씨로서 강서성 의춘(宜春) 사람이다. 원래 그는 지방 말단 관리였으나, 세속의 일들을 하찮다고 여기는 성품이었다. 방회는 20세에 출가해 처음 황룡 혜남 문하에서 수행했다.

스승이었던 혜남은 방회에 대해 늘 이렇게 말했다. 

“기량이 두텁고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늘 성실한 사람이다. 주위 승려들로부터 그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내색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늘 한결같은 사람이다” 또한 “방회는 과묵하며 부드럽고 이치에 맞는 사람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얼마 후, 방회는 혜남 문하에서 나와 석상 초원을 찾아갔다. 초원을 스승으로 섬기며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어느 날, 방회가 스승 초원에게 도를 물으니, 초원이 말했다.  “절의 일이 많아 그대가 할 일이 많으니, 얼른 가보시게”

또 며칠 후, 방회가 스승 초원에게 가르침을 구하자, 초원이 대답했다. “훗날 자네 문하에 천하의 제자들이 모일 터인데, 왜 이리 급히 서두르는가?”

한번은 초원이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길녘에 방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이 나타나자마자, 스승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이 늙은이야, 오늘은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으면, 스승이고 뭐고 주먹으로 칠겁니다”
“네가 이렇게 알고자 노력하면서 쉬지 않고 물으면 된다.”

방회가 스승의 말에 깨닫고, 그 자리에서 스승에게 절을 올렸다. 방회는 오랫동안 초원 문하에 머물며, 수행하였다. 이후 방회는 자신의 고향인 강서성 평향(萍鄕) 양기산(楊崎山) 보통사(普通寺)에서 개당 설법을 하고, 선풍을 전개했다. 

당시 방회 문하에 수많은 납자들이 모여 대중을 이루어 방사가 부족한데도 방회는 불사에 관심이 없었다. 대선사가 머물던 사찰인데도 비가 오면 새고 눈이 오면 눈 피해가 컸다. 당시 폭설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당우 전체가 피해를 입었다. 한 제자가 ‘당우를 불사해야 한다.’고 간곡히 청했으나 방회는 ‘불사 같은 일은 번거로운 것’이라며, 다음 시게를 읊었다. 

“양기산의 허름한 거처, 지붕과 벽이 엉성하니 방바닥 가득 뿌려진 눈의 구슬들! 목 움츠리고 가만히 탄식하며 생각하노니, 나무 밑에 거처하신 노숙(老宿)”

방회의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스승 초원의 기일 날,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방회는 초원의 진영 앞에서 두 손을 들어 일원상을 그렸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에 뒤로 물러나 절하는 모습이 마치 아녀자 같았다.-〈고존숙어요(古尊宿語要)〉” 스님의 선비 같은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황룡파 혜남의 제자인 각범 혜홍과 도솔 종열이 활약하면서 황룡파가 매우 융성했다. 특히 황룡파 선사들은 사대부들과 인연이 깊었다. 그런데 차츰 황룡파에서 양기파의 선풍으로 옮겨갔다. 방회의 법을 이은 제자는 백운 수단(白雲守端, 1025∼1072)을 비롯해 수단 이후 걸출한 선사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신자들 중에 관료출신들이 많았는데, 양기파 승려들이 사회적인 활동에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양기파 승려들 중에는 사천성四川省 출신과 절강성浙江省 출신들이 많았다. 양기파 선종은 사천불교나 절강 방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양기파 법맥은 곧 우리나라 조계종의 역사이다. 한국의 승려들은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이 주류인데, 이 간화선의 주창자가 바로 양기 방회의 5세손인 대혜종고(1089~1163)이다. 또한 고려 말기 태고 보우는 석옥 청공(1272~1352)으로부터 법을 얻었는데, 청공은 양기 방회의 12세손에 해당한다.(임제의현-양기방회-대혜종고-석옥청공-태고보우) 

앞의 혜남과 제자들의 어록집인 〈황룡사가집〉(1153)이 있듯이 방회 문하에도 〈자명사가록〉이 전한다. 곧 자명초원-방회-백운 수단-오조 법연에 이르는 4대의 어록이다. 양파에서 사가어록이 편집된 점을 볼 때, 이 무렵 선종마다 법계의식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사가록으로는 마조-백장-황벽-임제에 이르는 〈마조사가록〉(1085)이 전하며, 운문종에서도 덕산-암두전활-설봉의존-현사사비의 어록을 모은 〈덕산사가록〉이 전한다.(〈덕산사가록〉은 각범 혜홍의 〈임간록(林間錄)〉에 이름만 전함)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