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민주주의는 대세 정치체제

소크라테스와 대화했던 아테네의 수많은 지식인은 소크라테스를 무척 미워했을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질문하면 소피스트라 불리웠던 당대의 지식인이 답하고 다시 질문하면 답하는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소피스트들이 질문에 답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답변이 모순됨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러한 대화법을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라도 부른다. 얼마나 창피하고 화가 났겠는가? 대화가 진행될수록 소크라테스의 적은 많아졌다. 소크라테스는 명문가의 자제에게 인기가 좋았고 그들이 제자가 되자 점점 질시의 대상이 된다.

독재 단점 막아 대중 선호
불교선 ‘참여’의 가치 강조
‘衆愚’ 막는 새 대안을 형성

급기야 다른 신을 섬기고 청년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넘겨졌다. 그에 대한 판결은 아테네 시민이 투표에 의해 결정했는데 조개껍질에 투표를 했기에 도편투표라고 불리우는 방식이다. 여성과 노예는 투표권이 없었지만 시민의 대표가 투표한게 아니라 모든 자격 있는 시민이 투표했기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의 효시라고 불리운다. 소피스트를 비롯한 아테네의 정치권력은 우매한 대중을 선동했고 아주 근소한 차이로 소크라테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아테네의 황금 시절은 지나가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의 정치적 불안은 어느덧 소크라테스라는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외국으로 도망가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직전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떤 제자가 눈물을 흘리자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위로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빚진게 있다며 제자에게 갚아달라고 부탁한다. 이게 그 유명한 마지막 유언이다. 즉 닭 한마리를 빚졌다는데 빚진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아테네인이 아플 때 기도하는 치료의 신이다. 즉 치료의 신에게 닭 한마리를 빚졌다는 거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유언이다.

이 모든 비극을 지켜보던 수제자 플라톤은 아테네에 실망하고 아테네를 떠나 수십년 동안 외국을 돌며 공부한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있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란 인류 최초의 대학을 설립하고 제자를 양성한다. 플라톤의 수제자가 바로 아리스토렐레스이다. 아리스토델레스는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어리석은 대중의 정치임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실망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오늘날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어리석은 대중의 정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지만 독재의 위험이 있는 다른 대안보다는 낫다. 그 어떤 선진국도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대부분의 정치학자도 민주주의 결함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직접 모든 주요 정치의사결정을 하는 직접 민주주의였다. 오늘날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는 스위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간접 민주주의다. 우리가 선출한 정치인이 주요 정치의사결정을 하는 간접 민주주의는 최근 들어 흔들리고 있다. 인터넷과 IT기술의 진보로 인하여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하는 제도이다. 스위스처럼 아주 훌륭하게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도 있다. 대중은 감정과 선동에 쉽게 좌우되며 정보와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명하지 못한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보와 전문성이 있다는 정치인이 과연 국민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가는 의문이다. 더구나 아테네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국민의 교육 수준과 정보 접근성이 대폭 향상된 시대를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의 폐해 같은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아이큐(IQ)는 ‘지능지수’라고 표현한다. 집단의 아이큐(collective intelligence)는 따라서 ‘집단지성’이 아닌 ‘집단 지능’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오늘날은 집단 지능이 높은 시대이다. 정치의사결정에서 천재가 있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천재 한명 보다 평범한 시민 10명의 판단이 더 나은 시대이다. 당장 인터넷 기사를 보면 기자나 정치인보다 댓글의 수준이 더 높은 경우가 많다. 기자, 정치인, 국민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기자나 정치인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면 문제가 되지만 국민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국민을 위한 정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불교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다. 승가의 의사결정은 구성원의 대표가 참여하여 결정하기보다 전원이 참석하는 만장일치였기에 직접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 사후 가르침을 정립하는 1차결집은 기록에 의하면 500명, 1000명 혹은 1000명 이상이 참여한 모임이다. 2차 결집은 70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마이크와 음향 장치가 없던 시기에 500명이 참여했다고 해도 대단한 규모다. 모든 구성원이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최대한 많이 참석한 규모로서 직접 민주주의에 더 가깝다.

민주주의 탄생지는 여러 가지로 볼 때 아테네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어원도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오늘날 그리스를 민주주의의 모범국으로 칭송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에는 재미있는 제도가 있다. 만약 국민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제도이다. 투표에 불참했다고 당장 벌금을 주거나 처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어 가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은 불이익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한다. 국민의 정치 참여를 높이기 위한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 즉 투표에 불참하면 관공서에서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두배의 요금을 내도록 한다든가,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가산점을 받게 한다든가, 각종 다양한 이익과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제도가 없이도 인터넷을 통한 전자투표를 도입하면 투표율을 높일 수 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부분적으로 전자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미 기술적으로는 오래 전에 가능하지만 정치적 이유로 도입이 안되고 있다.

오늘날 간접 민주주의의 폐해를 보완하기 위해 각종 주민참여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산편성과정에 주민이 참여하거나 정책의사결정 과정에 주민이 참여하여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이다. 요즘은 정책의사결정만이 아니라 집행과 평가 단계에서도 주민이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 민주주의는 계속 확대되리라 생각한다.

불교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마가다국 왕이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어 밧지국을 점령할 지혜를 요청했다. 부처님은 사신에게 대꾸하지 않은 채 제자 아난에게, “밧지족이 자주 모임을 갖고 많은 사람이 참석하느냐? 밧지국 사람들은 윗사람 아랫사람이 서로 화목하며 함께 국정을 운영한다는 데 사실이냐.”고 묻는다. 우리는 무기나 재정, 인구의 많고 적음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난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부처님은 “밧지족은 번영이 있을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다.”라고 설했다. 많은 사람이 자주 모임에 참여하여 화목하게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적 행위가 국가의 번영에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불교 민주주의가 참여 민주주의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이다.

<사분율>은 “희망하는 뜻을 위임하지 않고 떠나면 계율을 범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비구가 떠나야 하므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없다면 자신의 의견을 대신 표명해달라고 위임해 놓고 떠나야 한다. 위임을 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개진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난다. 부처님은 모든 비구가 항상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시하기를 바라셨다. 이러한 조항은 투표하지 않은 국민에게 불이익을 주는 그리스 제도와 비슷한 맥락이다. 1차 결집과 2차 결집에서 소수의 엘리뜨 출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많은 출가자에 의해 경전이 확립된 것도 참여 민주주의적 성격이다. 4부 대중이 모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도 참여 민주주의다.

인터넷과 IT 기술로 연결된 현대 사회는 불교의 인드라망을 연상하게 만든다. 중중무진의 법계연기는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21세기를 묘사한 것이 아닐까? 인터넷과 IT 기술의 대두로 이제 국민이 정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미 스위스에서는 크고 작은 정치의사결정이 모두 직접 민주주의에 의해 결정된다. 주민은 정치의사결정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한다. 불교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집단 지능은 점점 더 위력을 발휘하고 아테네식의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폐해는 최소화 될 것이다. 어쩌면 직접 민주주의의 시대, 참여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닐까? 오래 전 부처님에 의해 꽃피웠던 불교 민주주의가 다시 꽃피울 시대가 왔다. 불교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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