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코로나 상황서의 사회적 기여

6-1 안개가 짙게 깔린 강에서 배들이 부딪칩니다. 강 위쪽과 강 아래쪽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위쪽에서는고함 소리가 들리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아래쪽은 가끔 쿵하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조용합니다. 똑같이 배들이 부딪쳤는데 강 위쪽과 아래쪽에서 벌어진 차이는 무엇때문일까요? 안개가 옅어지면서 진상이 드러납니다. 위쪽 배들에는 사공이 타고 있었고 아래쪽 배들은 빈 배였습니다. 배가 충돌한 상황은 같은데 사공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반응은 천지 차이군요.

마음의 안정 먼저 찾고
사회적 고통 관조하면
부정적 카르마 제거돼

위쪽 배들은 사공들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상대의 잘못을 비난하다가 급기야 화를 못참고 삿대를 들어 위협하며 싸우기 시작합니다. ‘삿대질한다’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군요(웃음). 말꼬투리를 잡고 싸움을 계속 이어가다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사공들은 자기 쪽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당성과 상대의 부당함을 강조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마을 사람들이 두 쪽으로 나뉘어 편싸움이 일어납니다. 편가르기도 여기서 시작되었군요(웃음). 좀체로 싸움이 진정되지 않더니 큰 마을로 번지다가 마침내 나라 전체가 두 쪽이 나 싸움에 휩싸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의 ‘빈 배’ 이야기를 각색해본 것입니다.

6-2 ‘코로나 블루’란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감염자는 물론 비감염자도 분노와 우울, 불안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천지를 탓하고 정부를 탓하고 중국과 일본을 탓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탓(투사)하기와 눈치보기를 일삼습니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으로 굳어진 무의식적 방어 방식이지요. 습관화된 마음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어 우리를 지배합니다. 에고(몸과 마음의 주체)의 방어 기제는 자신에 대한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지만 자신에 대한 강력한 집착과 애착을 낳습니다. 자신에 대한 보호와 이기심이 지나치면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원인이 되고 결국 자기 자신마저 해치게 됩니다

눈을 감고 잠시 숙고해봅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타인과 관계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 일들을 떠올려보세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관계가 모두 에고이즘-이기주의의 결과임을 보세요. 에고이즘은 정파적 종파적 민족적 국가적 이기주의로 발전하고, 자신이 신봉하는 신념에 대한 집착은 집단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처럼 수많은 생명을 살상하는 전쟁으로 되었음을 돌아보십시오.(1-2분)

6-3 이렇게 에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부정적인 카르마(업)로 무의식에 저장되어 현재와 미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단 무의식에 입력되면 맘(의식 수준)대로 조절할 수 없게 됩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무의식에 입력된 카르마는 반복적으로 현실에 등장하곤 합니다. 부정적인 습관인 줄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성향들이 그것입니다. 에고를 애지중지하는 한, 에고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카르마(온갖 부정적인 생각, 감정, 욕망, 행위들)는 모두 에고에 대한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남에게 탓을 돌리는 모든 분쟁의 원인이 되지요. 에고이즘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것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하여 비난하고 삿대질하며 혐오감 적대감을 키워나가 마침내 살인까지 발전시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여 화를 참고 안으로 돌리면 우울증 화병이 되거나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을 처벌하여 자살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6-4 이처럼 에고이즘(이기주의, 자기중심성)은 살아가면서 모든 불행과 장애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 전쟁도 세계대전도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나요? 그래서 에고이즘을 해체시킬 강력한 해독제가 필요합니다. 무엇일까요?

예, 그것은 이타심입니다. 붓다가 무아를 천명한 이유입니다. 이타심은 에고가 가짜 나이고 모든 존재와 연결된 존재라는 동체대비(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의 자비심입니다. 히틀러가 게르만 선민 사상으로 국민을 선동하여 유태인을 무차별 학살한 것도 민족적 에고이즘입니다. 그 독일이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과 보호를 외치면서 난민 수용을 거부할 때에 외국 난민을 117만명이나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자각한 결과이지요.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사죄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자국의 이익만 도모하는 강대국들의 행동과 대조적입니다. 독일 국민의 고양된 의식은 과거의 잘못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깊이 성찰하여 깨달은 결과입니다.

6-5 ‘마음이 모든 행위의 주인이니 마음을 잘 보고 다스려라, 분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특정 종교적 가르침이 아닌 삶의 법칙입니다. 바다에는 거친 파도만이 아니라 잔잔한 파도도 있습니다. 분노나 욕망이나 원망같은 강렬한 감정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그런 격한 파도가 가라앉으면 도로 본래의 잔잔한 바다가 되듯이. 명상의 가장 좋은 점은 격한 감정들을 장애물로 여기기보다 마음공부하기 좋은 재료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나 감정이 거친 파도가 되어 몰아칠 때에 호흡에 주의를 모으고 심호흡을 하면서 포효하는 감정을 바라보면 아무리 난폭한 감정일지라도 저절로 가라앉음을 봅니다.

지금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바라보고 마음의 바다가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보실까요?

마음이 편치 않고 들떠있거나 침체되어 있거나 할 때 호흡을 주시하고 호흡이 가지런하고 편안하게 쉬어질 때까지 호흡을 해보세요. 하나 둘 셌하고 들이마시고 하나둘셋하고 내쉬며 잠깐 호흡의 끝을 느끼고 다시 하나둘셋 들이마시고 하나둘셋 내쉬고 잠깐 호흡의 틈새를 바라보세요.(1-2분)

파도의 격한 정도에 따라 시간이 걸리기도 하군요.

늘 호흡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6 이제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 다음 단계는 어떻게 그런 격랑에 휩쓸리게 되었는지 그 발생 과정을 숙고해볼 차례입니다. 대체로 감정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발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화로의 재 깊숙이 묻힌 불씨와 같습니다. 평소엔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바람이 불면 불씨가 되살아나 큰 불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바람은 무엇이 있을까요? 에고의 비교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지 않나요? 어떤 기대나 평가가 배경에 있었는지 알아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기대란 무엇인가요?

예상했던 것, 바랬던 것, 생각으로 자신이 원했던 그 무엇 아닌가요?

평가란 무언가요?

비교하여 우열을 재는 것, 비교하여 시비를 따지는 것, 비교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것 아닌가요?

그럼 평가 기준은 무엇인가요?

그 기준은 어디서 생겨났을까요?

기준은 이미 습득된 원칙이고 옳다고 굳게 믿는 신념 아닌가요?

그 신념은 어디서 생겨났나요?

부모님에 의해서, 교육에 의해서, 사회적 규범에 의해서, 종교적 원리와 오랜 전통의 신념 등 아닌가요? 내가 직접 터득한 깨달음이 아니라 듣고 배우고 반복 학습된 남의 지식 아닌가요?

신념은 모두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군요.

이렇게 탐구해 들어가는 게 숙고 명상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택법각지擇法覺支라 하였지요.)

그래서 명상을 기존의 지식과 신념을 해체시키는 작업이라고 하지요. 강력한 해독제는 외부의 그 무엇이 아니라 빈 배처럼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응시하는 힘이군요. 그러나 해체 작업은 단순히 마음을 고요히 기라앉히고 통일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집중된 마음 상태에서 사유하고 숙고해보아야 됩니다.

6-7 고통의 발생 과정을 낱낱이 보기 위해서는 에고가 분별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좋아하여 집착하거나 싫어하여 배척하는 반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비슷한 상황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마음의 고통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숙고와 성찰에 의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일상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일어나는 감정을 무시하거나 냉대하지 않고 귀한 손님처럼 대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무의식에 갇힌(억압된) 감정이 자유롭게 풀려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정신치료의 핵심이고 통찰명상의 요체입니다.(통찰은 숙고에 이은 깨달음)

에고는 상처 받는 것에 대해 분노, 걱정, 두려움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반면, 본연의 마음(불성/신성)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은 모든 치유의 근원입니다. 자비로 충만한 마음을 갖춘다면, 우리의 고통의 원인인 부정적인 카르마는 정화될 것입니다. 비난과 탓하는 대신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의 이익 대신 자신을 희생까지 하는 헌신을 택합니다. 살신성인이 의인이나 성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군요. 모두 몸 사리고 불안에 떨 때 불안을 무릅쓰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장에서 분투하는 의료인 자원봉사자들이 그 예입니다. 마음의 본성이 발현된 거지요.

에고의 집착을 내려놓으면 마음의 본성(불성)과 함께 하게 되군요. 쉽지 않다구요? (웃음)

안경에 손이 닿을 때마다 손자국이 남는 것처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마음밭에 뿌려진 씨앗(카르마)이 되었다가 적합한 조건을 계기로 싹을 틔웁니다. 자신이 살면서 뿌린 씨앗(업業)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게 하고 씨앗의 종류에 따라 각각 다양한 미래를 살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 을 안경 닦듯이 꾸준히 정화시켜야 합니다. 명상을 꾸준히 하면 점차 마음의 본성이 확고하게 되어 해묵은 습관은 점점 해체되고 뿌리 깊은 성향도 줄어들고 좋은 습관과 바른 성향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격랑의 바다도 있지만 평화로운 바다 또한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향. 그 고요함과 평화로움에 깨어있으면 거짓된 자아(에고)에 대한 오래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에고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본래의 고향에서 고요히 쉴 수 있습니다.

늘 지켜보는 마음을 견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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