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사대부와 선종

당 문인 사대부 불교에 심취
현실과 다른 선경에 매료돼
백거이·왕유 등 불교 신봉

그림, 강병호

 

당대는 불교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로서 종파 또한 난립하였고 승려도 많았다. 불전은 천하에 유행하였고, 사원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건립되었다. 당나라 중엽에 이르러서는 보편적으로 사대부 문인들은 불교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불교는 그들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사유방식 및 심미적 추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가(詩歌) 예술에서 이들의 표현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시인들은 선학의 초월적 세계관에 많은 영감과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후한시대 인도에서 유입된 중국불교는 동진 이래로 중국 전역에 유행되었다. 학식이 있는 사대부들은 불법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인과 고승들 간의 교류가 유행하면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문인 사대부는 당나라 사회의 엘리트(精英)들이었다. 곧 사회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주체들이었다. 불교문화의 발전은 당연히 문인사대부들의 참여가 아니고는 크게 전파 할 수 없었다. 아울러 사대부 문인들 간의 교류는 당대 불교문화를 전파하고 발전하는 데 촉진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부분 황제들도 불교를 숭상하였다. 당대의 유원종이 말하기를 “옛적에 사문과 사대부들은 자주 교유를 하였다. 진송(晉宋)이래로, 도림(道林) 도안(道安)등과 교류를 했으며, 그들과 교류한 인사로서 사안석(謝安石), 왕일소(王逸少), 습착지(習鑿齒), 사영운(謝靈運), 포조(鮑照)등이 있다..., 진승법인(廬乘法印)을 말미암아서 유가의 경전을 병용했으며 사람들은 나아갈 방향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당대 사대부가 불교를 숭상한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총괄적으로 보면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당대 불교는 대부분 통치자의 지지와 선도가 있었다. 통치자가 불교를 장려하면서 당연히 사대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사대부들은 통치자들과 영합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사대부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승려들을 초청해 제단을 설치하고 의식을 베풀기도 했다.

두 번째, 사대부들이 과거시험공부를 위해서 사원에서 은거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불교문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종남첩경(終南捷徑)’이라는 고사가 생기게 된 동기도 불교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세 번째는 불교는 사대부들이 실의에 빠졌을 때 의지처가 되기도 했다. 이 점은 유가 전통문화의 보충이 되기도 한다. 유가의 근본 덕목 가운데 하나인 “뜻을 얻지 못했을 때 자기를 잘 관리해서 도덕적 수양을 쌓아야 하며, 뜻을 얻었을 때는 곧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얻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또 〈예기·대학〉에 보면 아주 자세하게 사대부가 할 일을 적시하고 있다. 즉 “옛적의 성현들은 천하에 인품과 덕행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먼저 그 나라를 잘 다스리고, 그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먼저 그 집안과 가정을 잘 다스리고, 그 집안과 가정을 잘 다스린 자는, 먼저 자신의 품성을 수양하고, 그 자신의 품성을 수양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의 뜻을 성실하게 할 것이며, 자기의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가 지식을 획득해야하고, 지식을 획득 하는 방법(순서)을 알아서 만사만물의 이치를 연구해야 한다. 만사만물에 대해서 얻어진 지식을 바탕으로(아는 것을 통해서), 연구한 후에 비로소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며, 지식을 획득한 후에 생긴 견해가 비로소 진성(廬誠)이다. 진정한 견해를 얻은 후에 비로소 마음이 단정해지며, 마음이 단정해 진후에 비로소 성품을 수양할 수 있다. 성품을 수양한 후에 비로소 가정과 가족을 잘 관리 할 수 있으며, 가정과 가족을 잘 관리한 후에 비로소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다. 국가를 잘 다스릴 때 비로소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고 하는 〈대학〉 ‘팔목(八目)’의 핵심사상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역시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가에서도 개인의 수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수양이 완벽할 때 사회 국가에 대해서 봉사 헌신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서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유가의 이러한 사상은 불교의 사상과 매우 유사점이 있으며, 특히 대승불교의 보살도 정신과 매우 흡사하다. 즉 자신의 수행의 경계가 깊어졌을 때 비로소 타인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며, 선종의 심지법문과도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유가의 사상과 불교의 유사점이 존재했던 관계로 유교와 불교가 크게 부딪치지 않고 함께 상호 의존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에서 발전해 올 수 있었다.

네 번째, 선종이 문인에게 준 영향이다. 〈중국통사간편(中國通史簡編)〉에서 말하기를 “선종은 중국 사대부 입맛에 맞는 종교이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대부 관료들의 일상생활은 지극히 긴장된 삶의 연속이었다고 하겠다. 끝없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언제 어떻게 정세가 변할 지 알 수 없었고, 오늘의 아군이 내일은 적군이 되기도 하는 미래를 예측 할 수 없는 현실도 그들에게는 지극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복잡한 현실을 떠나서 잠시나마 정신적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곳은 한적한 선종의 총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선사들과 교류를 했을 것이다, 고승들과의 교유를 통해서 복잡한 현실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선림속의 경계를 맛보았을 것이며, 아울러 선사들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현실세계와 전혀 다른 경계인 선경의 세계에 그들은 점점 매료되어 갔을 것이다.

당나라는 비록 도교를 숭상하였지만 불교도 그에 못지않게 번성하였다. 당대의 문인 사대부들도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다. 백거이는 자신을 향산거사라고 부르며 가족 모두에게 불교를 신봉하게 하면서 “비록 출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청정한 마음으로 집에서 수행을 한다.”고 하기도 했다. 이상은(李商隱)도 역시 당대의 문인으로 지현(知玄)이라는 승려의 제자가 되어서 불교를 연구하기도 했으며, 고승과 교류를 하였던 표식이 되기도 한다. 이백도 역시 당시의 사조에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비록 도교에 흠뻑 빠져 자칭 ‘적선인(謫仙人)’ 이라고 하면서 배정(裴政) 등과 조래산(巽徠山)에 은거하면서 “죽림육일(竹林六逸)”이라고 하면서 단약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도 역시 불교를 신봉하면서 많은 고승들과 교유하였고, 많은 가람을 유역하기도 했다. 자칭 “청련거사(행蓮居士)”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가 많은 사찰을 유람 하면서 남긴 시문으로 찬(贊) 송(頌) 명(銘) 서(序) 비문 등이 있다. 특히 현존하는 것으로 ‘로군엽화상찬(魯郡葉和贊)’과 ‘숭명사불정존승다라니동송병서(崇明寺佛頂尊勝陀羅尼幢頌갞序)’가 전해지고 있다.

왕유 역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관료로서 자칭 ‘유마’라고 하면서 불교를 돈독하게 믿었다. 당 중엽의 문단을 말할 때 시선(詩仙)은 이백, 시성(詩聖)은 두보(杜甫)라고 하는데, 왕유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시인이자 문인 화가였다. 그의 예술세계는 생전 및 사후에 후래인 들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독특한 그의 예술세계를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했다. 때문에 그를 후래인들은 ‘시불(詩佛)’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와 가족은 평생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많은 고승들과 교유했다. 그의 모친은 북종의 신수 스님의 제자 대조선사(大照禪師)의 돈독한 재가 제자였다. 그도 일찍이 하택신회에게 귀의한 적이 있으며, 평생토록 불자로서 지켜야할 계율을 지키면서 살았다. 따라서 그의 인생관은 불교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는 수연(隨緣) 임운하면서 불전에 복전을 구하지도, 오직 식심견성(識心見性)해서 자신과 현실 내지 사회의 모순을 극복 개선해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예술세계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그는 육조혜능선사비(六祖慧能禪師碑)을 짓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장기간의 은거를 통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선기(禪機)는 물론이거니와 도교의 사상도 깊이 묻어나고 있다. 특히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서 많은 불교사상을 담은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는 신회선사의 교유로 인해서 그 예술창작 세계의 전환점이 되었다고도 하며, 육조 혜능의 비문을 쓰게 되는 동기도 하택신회의 부탁을 받고 썼다고 한다. 그가 말년에 지었다는 ‘오명간(鳥鳴澗)’에서 “적정해서 사람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곳에 계화꽃은 스스로 피었다가 스스로 떨어지고, 깊고 고요한 밤의 봄산은 광활하고 넓기만 하다. 그때에 달이 뜨니 산새조차 놀라고, 잠이 깬 새가 봄 계곡에서 지저귄다.”고 하는 이 시는 뛰어난 그의 예술세계 및 인생을 달관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유종원(柳宗元)도 일생동안 신심이 돈독한 불자로서 많은 선승들과 교유를 하였다. 그가 비록 불자였지만 사상의 기본적인 바탕은 유가였기 때문에 그의 일생은 그리 담박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일생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는데, 하나는 영정개혁(永貞革新)의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영수 역할이었다. 이 고문운동에는 한유와 함께 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경세지용(經世致用)의 사상과 관계가 깊다. 그는 유가를 바탕으로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그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 그는 비록 천태종에 귀의한 불제자로서 천태사상을 깊이 학습하였고, 천태종 스님들과 깊은 교유를 하기는 했지만,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통합유석(統合儒釋)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불교사상을 유교사상체계에 귀납시키고자 했다. 그는 정토신앙을 크게 선양하기도 했는데, 그의 정토신앙은 천태종 내용의 정토신앙이다. 본래 지자대사도 정토신앙을 추종하기도 했었다. 그는 “불도는 큰 포용력이 있으며, 무릇 마음은 물욕을 떠나서 세간의 어지러움을 제어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심정은 그가 개혁을 실패한 후에 좌천을 당해서 영주(永州)에 있을 때의 진실한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개혁이 실패하고 영주(永州)에 좌천된 후에 정신적으로 큰 좌절을 맛보면서, 문학 및 서화를 통해서 자신의 울분을 감추면서, 시간이 날 때 낚시를 즐기면서 자신의 고결하고 도도한 감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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