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의 길에 어떠한 게 닥치더라도 다 치우고 가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공한 이치 깨달을 수 있나요

질문 : 요즘은 정말 언제 어떻게 내 앞에 죽음이 닥쳐올지 정말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생사 없는 공한 이치를 깨달아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몸 벗기 전에 정신 차려 이 마음 도리를 알고 가야 될 텐데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까요?

답변 : 어떻게 해야 사람이 깨닫는가. 그런데 깨닫기 이전에 모두 살아나가면서 극하게 욕심을 부리고, 극하게 집착을 가지고, 아주 극히 그 모든 사물에도 그냥 그 많은 생각들을 하시기 때문에 거기에서 사람 사는 게 많이 달라집니다.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극히 그 욕심 안 내는 것만치 다 갈 수 있다 이런 소립니다. 여러분께서 때로는 병이 들고 때로는 집안이 안되고 요새 경제 가 안 돌아가서 뭐 어쩌니 저쩌니 그런 일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 눈물을 흘리고 여러 가지죠. 가지가지죠, 뭐. 어떻게 고것뿐이겠습니까.

새록새록 너무나 천차만별로 많은 그 뜻을 제가끔들 이렇게 움켜쥐고 사시는데 그 움켜진 것을 그냥 놓고 사세요. 그걸로 인해서 내일 죽는다 이따가 죽는다 하더라도 죽는 거를 겁내지 않는다면, 나를, 죽는 거를 겁내지 않고 버린다면 살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죽을까 봐 겁을 내니까 이게 그 겁내는 그 반면에 모든 게 틀어지고 문제가 일어나는 거지, 겁을 내지 않는다면, 겁내지 않고 부지런히 뛰고 부지런히 한다면 뭐가 안 되겠습니까.

겁내지 않고 사시는 방법을 수 해를 두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고 나오죠. 여러분들이 입산을 하지 않았는데도 입산을 한 것처럼 모두 여러분들을 지금 스님네들과 같이 이끌어 가고 있는데, 우리가 같이 이렇게 이 땅에 앉아서도 우리가 마음을 그렇게 태연하게 가지고 살 수만 있다면 불구덩이도 들어갈 수 있고, 물도 건널 수 있고, 어떠한 마구니 틈에도 벗어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가면 가는 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길은, 마음공부다 이러는 이 길은 참 무척, 그 길이 대로로 돼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좁고 아주 엉망으로 된 길입니다. 그 길을 갈 때에 어떠한 것이 닥치더라도 다 치우고 그렇게 가야 되겠죠.

여러분들이 지금 살림을 하고 모두 살고 계신데 이 공부 한다고 그것은 등한시하고 이렇게 살면 결국은 나중에 그걸 또 해야 되니까 내 앞에 닥친 거는 누구한테 밀지 말고 꼭 여러분 자신들이 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살다 보면 그 길이 어지반 어지반 다 당도해서 갈 때가 있죠.

그래서 아무리 고통이 온다 하더라도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없을 때 고통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 뜻을 아신다면 그 고는 바로 멸도로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뛰어넘은 일이 얼마나 있나. 지금 우리가 얼마만큼 뛰어넘고 있을까. 어떠한 게 닥쳐도 오만과 아만, 아상 이런 거를 다 버리고 우리가 얼마만큼 받어들이고 뛰어넘을 수 있을까.

난 여러분들한테 말을 예쁘게 매끈하게 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잘하지 못하는 그 말은 참 진실한 말입니다. 나만 진실하다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정말 여러분들과 같이 울어도 같이 울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나 이 모습으로는 여러분들보다 제가 하루라도, 한 발짝이라도 더 먼저 뛰겠네요. 하하하. 그런데 저기 모셔 놓은 분들한테 얘기 들어 보면요, 먼저 간 것도 없고 나중에 간 것도 없다 이러시거든요. 뭣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이겁니다. 먼저 간 것도 없고 먼저 온 것도 없고 늙은 것도 없고 젊은 것도 없고 모두가 평존하니까 그것이 공법이라고 하지 않느냐.

이 모두가, 여러분들과 같이 이렇게 앉아 있지만 내가 여러분들 차원에 내가 들어간다면 여러분이 될 거고, 여러분이 내 속으로 들어온다면 내 차원이 되는 거고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모습은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마음이야 어찌 똑같지 않겠습니까. 생명도 같고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말입니다. 그러니깐 아귀다 아수라다 축생이다 이렇게 하는 것도 이게 마음 탓입니다. 마음으로 인해서 자기 모습을 그렇게 못살게 만드는 거죠. 마음으로 인해서 자기 속에 있는, 육신 속에 있는 심부름꾼이라고 그러지만 그 심부름꾼도 아니죠. 서로 주고 사는 거죠.

이 생활 속에서 행 하나하나 하는 것이 다 참선입니다.
만약에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진다면 그 길을 당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사도 놓고 가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공생으로 사는 거죠. 공체로 사는 거고. 외부나 내부나 똑같죠, 모두. 그런데 살면서 실천에 옮기는 게 문젭니다. 실천이 되고 안 되고가 문제예요. 내가 진짜 나한테 있는가 없는가 그거를 발견하시고 그걸 수긍해서 쥐고 나간다면 그게 반야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그저 한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그냥 놓으세요. 놓고 가세요. 그리고 여러 가지 묶인 걸 볼 때에 묶인 것이 다 어디서 나오는가 봐서 그냥 뛰어넘으시고요.

지금 내가 말씀드린 거는 다 알아들으시겠죠? 모두 이것저것 이렇게, 사성제니 육바라밀이니 팔정도니 뭐, 이렇게 해 놓은 것을 볼 때 그것이 다 어디서 나오는가 이거를 보신다면 바로 뛰어넘을 수가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뛰어넘지 않는다면, 하날 가지고 붙들어 매 가지고 그걸 집착을 하고 그런다면 그거 어느 때에 벗어나겠습니까. 모두 나와 더불어 몽땅몽땅 놓는다면 더더욱 좋을 거고요.

그러니까 모두 여러분들이 그 살아나가는 데 고만 거기에서 매달려서 애를 쓰지 마시고, 그냥 죽는다 산다를 떠나서 그냥 사시라는 겁니다. 마음으로 괴롭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거는 인간 공장에서 인간을 만들려고 이렇게 하고들 가는 거니까 그저 내 앞에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말고 그냥 여여하게 하고 나가시면 되는 거죠.

함이 없는 거예요. 자기가 없이 그냥 어떻게 하는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저 ‘주인공에 의해서 모든 걸 그냥 하고 이렇게 산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사세요. 그러다 보면 그것이 스스로 녹아서 나중에는 스스로 해말갛게 다 없어질 때에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자기가 그렇게 되게 된다면 ‘아, 내가 이렇게 하다 보니까 이쯤 왔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지요.

그리고 자기가 알게 되고, 자기가 또 그렇게 된 걸 알게 되면 그 아는 자기가 바로 자기한테 수기를 주게도 되고요. 모든 게 서로서로가 이렇게 하기 때문에요, 누가 수기를 주고 누가 수기를 받고 이런 게 없죠. 없으면서 그렇게 하고 있죠, 자꾸 화해서 말입니다. 내 자성 주인공이 화해서, 참 연등불로 화해서 나한테 수기를 주어도, 그것이 그놈이 나를 줬고 내가 그놈이 됐고 그러니까 누가 준 놈도 없고 받은 놈도 없죠. 그렇게 해 가는 것이지, 누가 수기를 주고 잘했다 잘못했다 이러고 주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자기 사실을 자기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이렇게 해야 진짜 자기 법으로 자기가 하는 것이 그냥 법으로 되고 이렇게 되는 거지, 자기가 모르고 그냥 입으로만 알고 귀로만 듣고 안다면 자기가 실천을 못 하기 때문에 그거는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면서 왜 어려운 게 없겠습니까마는 어려운 게 없습니다. 이 욕심이 딸려 있으면 그냥 모두가 살기가 어렵지만 욕심이 깔려 있지 않다면 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글쎄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거하고 제가 생각하는 거하고는 아마 다를 겁니다. 왜 다른가. 나는 지금 금방 죽는다고 펄펄 뛰어도 고만이고 살았다고 벌떡 일어나도 그만이니깐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찌 그냥 눈 번쩍 뜨고선 그냥 여여하게 그냥 한 길을 맞겠습니까.

가족들이 속을 썩여요

질문 : 제가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하나같이 속을 썩이네요. 그래서 마음공부도 한다고 하는데 제가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건지 크게 변하지 않아요.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 자기를 놔두고 상대를 믿는다면, 자기 빼놓고 상대를 믿는다면, 그 믿는다고 하더라도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똑바로 아시고, 똑바로 행하시고, 진짜로 믿어야 그 도리가, 무궁무진한 도리가 바로 나오고 ‘이 세상의 우주 천체가, 은하계나 태양이나 돌아가는 이 우주 천체가 우리네들 살림살이와 똑같구나. 수명이 짧고 길고 그럴 뿐이지 그것은 똑같구나.’ 하는 거를 느낄 거예요, 아마.

그리고 가정에서도 남편이 잘못하더라도, 예를 들어서 화투를 잘한다, 술을 잘 먹는다 그래서 속이 썩는다 이러더라도, 그리고 하루 이틀 안 들어온다 이러더라도, 자식이 잘못하고 안 들어온다 이러더라도 입으로 욕을 하고 그걸 말로다가 끌려고 그러면 절대 끌리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마음인데, 둘이 아닌 주인공인데 너만이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잖아!’ 하고서, 열흘이 됐든 스무날이 됐든 들어오면 부드럽게 말해 주고 “그 스무날이나 다니면서 몸이 해쳐지면 어떡하느냐.” 외려 위로를 해 주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생각이 들겠죠. ‘저 사람이 부처가 됐나? 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게 생각하는 대로 입력이 되면서 ‘에이! 뭐, 해 봐도 만날 그 타령이고….’ 인제 그때는 하기가 싫어져요, 또. 그래서 안 하는 거예요. 안 먹게 되는 거고요.

자기가 스스로 하기 싫고 스스로 먹기 싫고 그래야 안 먹는 거지 남이 먹지 말란다고 안 먹고 남이 욕을 한다고 그거 듣나요? 마음으로 고장 난 건 마음으로 이끌어 가야 돼요. 그리고 보이는 데서도 부드럽게 해 주시고요. 자식도 그렇고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부모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업이 그냥 입력된 게 다 없어지고 새 입력이 들어가서 모두 물러서게 하죠, 녹여 버리고. 용광로에다 다 넣듯이.

여러분운 아상이나 아만이나 이런 게 말로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습관이 되고 관습이 돼 가지고 그냥 남을 섭섭하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주인공에다 맡기지, 상대방을 가지고 네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느니 네가 미우니 하고 원망하고 이러지 마세요, 절대로. 그것 참견하다 보면 자기가 가는 길을 잃어버려요. 도의 길은 관 속에 들어가야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탓을 하고 그런다면 물질세계에 사는 거기에 얽매이는 거지, 그게 도의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몸뚱이가 통입니다. 통 안에는 별의별 그 모든 그 생명들 의식들이, 즉 저희들이 살아온 그 의식들이, 차례차례로 업보며 유전성이며 다 가지고 있는 생명들이 살고 있다고요. 그러니 이게 팥죽과 같지요. 팥죽 방울 나오듯 하는 거죠. 그 통에는 팥죽이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그 팥죽 방울을 나오지 않게 하려면 불을 첫째 물려야 합니다. 불을 물리면 팥죽 방울이 나오지 않잖아요.

지금 우리는 죽은 세상을 공부하러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산 세상은 공부 다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세상을 다 알아야 보이지 않는 데서 산 세상을 둘 아니게 이끌고 나가죠. 그러니깐 ‘죽어야 너를 본다’ 이런 소리예요. 근데 죽으러 가는 놈이 이것 탓하고 저것 탓하고….

내가 왜 이 집 짓는 데도 상관 안 하느냐. 이거 봐요. 부처가 있으면 할 거고 없으면 고만이지 나한테 꼬리표 붙여 놨습니까, 그 절 지으라고? 돈이 없어도 그놈이 있으면 할 거고 돈이 있어도 아니면 못 할 거고 그런데 아, 그놈이 하는 거를 내가 시자로서, 둘 아닌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합니까? 그런데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걱정을, 걱정할 거나 안 할 거나 다 한단 말입니다, 그냥. ‘왜 공부가 안되느냐, 왜 답답하냐’ 이런 것도 걱정이죠. 그것도 그놈한테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딴 놈한테서 나오는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만 아상을 끊으려고 하고 이런대서야 어떻게 끊어집니까, 그게? 물 흐르듯 하는 건데.

물은 바로 똥물이나 구정물, 핏물, 고름물, 흙탕물, 맑은 물 다 섞인 게 한바다예요. 바다라면 그걸 다 가라앉혀서 그냥 아무게 들어가도 바닷물이지 똥물이라고 안 그럽니다. 더군다나 그 한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똥물이든 핏물이든 젖는 것이 법의 도리다. 젖는 거. 어디에나 다 젖죠. 그러니 똥물에 젖는 거나 맑은 물에 젖는 거나 핏물에 젖는 거나 젖는 거는 매일반인데 이거는 내버리고 저거는 갖고 이럭하면 그 젖는 도리를, 크게 생각해서 광대하고 무변한 그 도리를 절대 납득할 수가 없죠.

그리고 죽으러 가는데, 만약에 사찰에서 무슨 일을 주지라든가 뭐, 그 아랫사람이 했는데 그거 서로 얘기를 안 하고 한 것도 있고 얘기를 하고 한 것도 있고 이렇다 하더라도 그거를 개의치 말고 부드럽게, 부드럽게 아이, 형님이 되면 “형님!”, 아우가 되면 “아우, 그건 이렇게 나한테 말 좀 하고 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잖아!” 이렇게 하면 “아이, 형님! 이럭하고 이러이러해서 그랬어요.” 하고 얘기를 할 때 다 풀리는 거죠, 그게.

그런데 그거를 그렇게 안 하고 꽁하고 여기다가 넣어 둔단 말입니다. 넣어 두니까 같이 사는 것도 밉고 같이 보는 것도 뭐 그렇고,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어색한 게. 그런 게 자꾸 싹튼단 말입니다. 싹트게 되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그때는 다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렇게 헤어져 버려요, 마음이. 그러면 육체도 ‘아이구, 내가 이럭하고 살면 뭘 해?’ 그러곤 이쪽으로도 떠나고 싶고 저쪽으로도 떠나고 싶은 그런 충격이 드는 거죠. 우린 비구니만 그런 게 아니라 비구도 그렇고 비구니도 그렇고 우리 일상생활하는 사람도 그렇고, 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그럭하고 어떤 사람은 그럭하지 말라 이러는 게 아니에요.

옛날에는 그 상대방이 얼마만큼 다져졌나 그걸 보기 위해서 고승들끼리 문답을 했죠. 어떤 사람은 가다가 말고 일행이 뚱그렇게 그려 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는 “너 여기 그어 놓은 데 여기 들어오면 그냥 안 둔다.” 하니깐 아무 소리 없이 가서는 그 뚱그렇게 그려 놓은 거를 발로 쓱쓱 지워 버리고선 합장을 하더랍니다. 그 소리 어떠세요? 그만큼 되려면 지금 우리 중들도 어떻게 집을 짓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건 서로 좋게 얘기해서 좀 거슬리면 “이건 이렇게 이렇게, 제 생각에는 이러이러하는 게 좋다고 생각이 되는데 형님은 어떠세요?” 또 아우가 그랬으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생각했는데 아우는 어떠냐?” 하고 이렇게 해 나간다면 얼마나 화목하고 또 얼마나 그것이…. 즉 말하자면 죽은 세상의 도의 길을 걷는다고 하더라도 손색이 없죠. 가고 옴이 없이 왕래하면서 가고 오고, 함이 없이 일체 법을 다 행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생활 속에서 행 하나하나 하는 것이 다 참선입니다. 그렇게 하고 들어가야지, 만일에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한다면 그 길을 당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사도 놓고 가야 된다 이겁니다. 잘된다 못된다 이런 말이라는 건 필요 없어요. 실질적으로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러면서 보람 있게 살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고생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어차피 인생으로 태어나서 한 번 다 죽는데 그걸 뭘 그렇게 연연하고 그렇게 사십니까. 그저 오는 거 내치지 말고 가는 거 잡지 말고 그냥 편리하게 사람의 도리로 그냥 사는 거, 이거 잊지 마세요.

큰스님처럼 자비하게 아이들을…

질문 : 저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격이 좀 무뚝뚝한지 아이들이 제게 가까이 오는 거를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도 아이들을 엄마같이 따뜻하게, 큰스님처럼 자비하게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까요?

답변 :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틈을 주지 않는 마음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비행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 거기에 한 치의 틈도 없이 돌고 있는 도리를, 본래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 치의 틈도 없이 돌고 있는 이 세상을 바로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부터 자기의 근본은 시공을 초월하고 모든 상대적 세계를 초월하여, 고정된 바 없이 쉴 사이 없이 나투어 돌아가고 있으므로 본래 그 어떠한 악업 선업마저도 붙을 자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상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항상 얘기하듯이 부처님께서는 ‘생활에 어떠한 악업 선업이 있다 해도 결코 거기에 속지 말라, 걸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근본 자리는 어디에도 고정되게 머무는 바 없고 그 어디에도 쉴 새 없이 나투어 돌아가고 있으므로, 그것을 “공했다, 주인공이다”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로지 자기 주인공만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진실하여 결코 물러섬이 없다면, 마치 타는 불에 떨어지는 눈처럼 어떠한 악업이라도 스스로 녹아버려 해결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인공에 대한 믿음에 물러섬이 없다면 자연히 일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일체를 둘 아니게 보게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내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자비가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백지 위에 그려진 글씨를 알려고 10년, 20년을 애쓰지 말고, 글씨 쓴 백지, 곧 “너 자신부터 알아라! 너 자신부터 믿어라!”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 마음이 탁 터지게 되고 또 모두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일체 모든 것을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왜 그 ‘고(苦)’를 당하고만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알려고만 하지 하나라도 실행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그러니 알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고, 알려고 하는 그놈이 누구인가를 지켜보십시오.

환자들과 하나 되어 치료하는데…

질문 : 저는 의사로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마음공부를 하면서 환자들과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치료를 했더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진 환자 중 일부는 다시 나빠지는 경우도 있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 그거는 선생님이 앨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게 아니에요. 진짜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참자기가 하는 거지 지금 자기가, 모습이 하는 게 아니죠. 그러니깐 근본 자리에 그냥 맡겨 놓으시면 되죠. 편안하게 그냥, 마음은 항상 거기에 집중하고 있겠지만 그걸 편안히 놓으세요. 놓으시면…, 사람이라는 게 죽을 때 되면 꼭 죽습니다, 그건. 살 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요. 그 죽은 사람은 꼭 죽어야 돼요. 그거는 누구가 살라고 살라고 아무리 해도 그거는, 죽어가는 사람은 꼭 죽어가야 돼요.

그래서 이런 예가 있죠. 생사천에 가 보니까 그냥 모두 촛불이 켜 있는데 그 불이, 초가 가는 것도 있고 굵은 것도 있고 아주 짧게 다 켜져서 있는 것도 있고 그렇게 있더랍니다. 그런데 아주 요만큼 남은, 생명이 요만큼 남은 것도 있고 그래서 그 요만큼 남은 생명을 보니까 사람들마다 다 그런 거를 알았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죽는다 산다, ‘죽는 거를 꼭 내가 살려야지.’ 이렇게 하지 마시고요.

그거는 죽는 것도 살리는 게 되는 겁니다. 그게 왜냐하면 죽는다 하더라도 그 모습만 벗었지, 그 영령은 그대로 살리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그런 유전을 가지고 그렇게 고생 안 하고 살 거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깐 살려도 살리는 거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겁니다. 그 사람들한테는 그 정말 말할 수 없는 복이죠. 그거를 신경을 자꾸 쓰시고 그러면 몸이 편안치 않죠. 허허. 몸을 편안하게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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