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사회계약론

18세기의 사회계약론을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주장하셨다.

루소는 대단한 인물이었던가보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매일 산책을 했는데 너무나 규칙적이었다. 시계가 보편화되지 못했던 당시에 마을 사람들은 칸트의 산책에 맞추어 시간을 확인하고 업무를 보았다. 예를 들어 빵집 주인은 칸트가 지나갈 때 해야 할 일을 정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칸트가 산책 시간을 지키지 않고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칸트에 맞춰 일을 하던 마을 사람에게 대혼란이 생겼다고 한다. 칸트는 왜 그날 늦게 산책을 했을까? 칸트는 그때 루소가 저술한 ‘에밀’이라는 교육에 관한 책을 읽다가 책에 빠져 산책에 늦었다. 루소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

자연법상 권리인 사회계약론
부처님도 <장아함경>서 주장
자유·평등주의 근간한 불교

쾨니히스버그 대학 교수였던 칸트에 비하면 루소의 이른바 스펙은 초라하다. 일단 정규 교육은 받아본적도 없고, 귀족이 아니었으니 가정교사를 통한 고급 사교육에 접할 기회도 없었다.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던 루소는 어느 귀족 과부의 후원을 받아 실컷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루소의 명저 중 하나인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당시에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어 소각 된 후에 금지되었고 루소는 온갖 사회적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루소는 고향인 스위스로 도망가지만 스위스에서도 정부에 쫓기고 심지어 시민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왕과 귀족의 권위를 부인하였지만 계몽주의 사상가를 비판하면서 루소는 사면초가가 된다. 게다가 자신을 후원했던 귀족 부인과 연인 관계가 되고, 나중에 여관의 하녀와 동거하면서 자식을 5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고아원에 맡겨 세상의 비난을 받았다. 노후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록’이라는 책에 솔직하게 참회하였지만 수많은 적을 만들며 힘든 삶을 살았던 천재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루소의 사상은 인정 받았고 헤겔, 칸트 같은 대철학가들의 칭송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났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국민은 계약에 의해 정부를 탄생시켰기 때문에 만약 정부가 인간 본연의 권리를 억압하면 인간은 이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권리는 실정법에 의해 보장되지 않더라도 자연법상의 권리이므로 그 누구도 부인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18세기 유럽의 정치 상황에서는 혁명적인 선언이었고 프랑스 혁명이 루소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게 무리가 아니다.

부처님은 ‘장아함경’에서 사유재산으로 인해 다툼이 생기고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세운다고 설하셨다. 루소도 ‘사회계약론’에서 재산과 인간의 약함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세운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은 ‘장아함경’에서 ‘이제 차라리 한 사람을 세워 주인으로 삼아’라고 국민이 왕을 세운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장아함경’에서 ‘우리들은 이제 곧 한 사람의 평등한 주인을 세워..’라고 ‘평등한’이라는 형용사를 ‘주인’ 앞에서 수식하고 있다. 즉 우리가 주인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가 평등하기에 우리 위에 군림하는 군주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중국은 황제를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했다. 유럽에서 왕이란 신이 내린 직위였다. 교황이 대관식에서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왕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동양에 퍼지게 된 것은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최근의 일이다. 유럽에서는 18세기에 계몽사상가에 의해 왕이 신이 내린 존재라는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셨으니 얼마나 불교가 개혁적이고 가히 혁명적인 종교인지 알 수 있다.

서양은 동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등주의적으로 보이며 동양은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 언어를 통해서도 이와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언어는 존칭이 복잡하지 않지만 우리말은 상당히 복잡하다. 일본어는 한 술 더 뜬다. 일본어를 배울 때 가장 힘든 점이 복잡한 존칭어라는 말도 있다.

서양보다 동양은 군주에게 훨씬 더 강한 권위와 권력을 부여한 것 같다. 일단 왕과 신하의 관계가 서양이 더 평등했다. 영국 귀족이 청나라 말에 중국 황제를 알현할 때 어떤 의례를 갖출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다. 조선 시대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이 중국 황제를 알현할 때는 엎드려 이마를 마루에 대고 3번 소리가 크게 나도록 부딪히고, 다시 일어나서 이 행위를 3번 되풀이하기 때문에 총 9번 이마를 마루에 꽝꽝 찍어야 했다. 오랑캐의 사신이라 이 정도를 요구했으며 청나라 황제의 신하는 이 정도의 예를 갖출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귀족이 보기에 청나라 신하가 청나라 황제에게 하는 예는 도를 넘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왕이라 할지라도 영국 귀족은 그런 예를 갖추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 귀족은 청나라 관리의 요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고 그런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이처럼 권위주의와 왕의 권한이 훨씬 더 강력했던 동양에서 2,500년 전에 부처님이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였으니 더욱 더 그 의미가 크다.

우리는 앞에서 정부가 왜 탄생했는가에 대한 불교적 설명을 보았다. 즉 장아함경에서 소유가 없던 시대에 토지의 경계를 정하면서 사유재산이 발생함을 설명한다. 장아함경에서는 계속하여 사유재산의 발생으로 인하여 갈등이 생기고 재산을 보호하고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를 세웠다고 설명하고 있다. 루소도 비슷하게 정부의 탄생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인도와 유럽의 교류가 원활했다면 루소가 부처님을 베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정도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의 넓이에 비해 인구가 희박하다면 인간은 구태여 네 땅, 내 땅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아무 곳에서 농사를 지으면 될 것이고 욕심 부릴 필요도 없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비옥한 땅은 줄어들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필연적으로 내 땅을 확보하려고 하게 될 것이며 사유재산이 발생한다. 영국이 미국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엄청난 땅에 비해 인구가 작았던 초기에는 이민자에게 무조건 땅을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들어온 이민자는 돈을 주고 땅을 구입해야 했다. 먼저 땅을 점유한 자는 그만큼 유리할 수밖에 없다. 사유재산은 인간불평등의 시작이며 다툼의 시작이다. 루소가 ‘인간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저서에서 사유재산을 불평등의 시초로 보고 있다. 최근 인류학의 연구에서도 인간불평등의 기원이 과거의 토지 소유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하니 인간 불평등에 관한 루소의 진단은 맞는 것 같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왕으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왕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갈 때 부처님 발에 입을 맞추고 부처님 주위를 세바퀴 돈 뒤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전에 이러한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우연히 일어난 단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코살라 왕이 카필라 왕국을 정벌하러 갈 때 부처님이 길에서 사실상 행진을 저지한다. 이렇게 두번이나 코살라의 출정을 저지하였으나 세번째에 이르러서는 부처님도 더 이상 저지하지 않고 막을 수 없는 인연사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이처럼 대단한 존경을 받았으니 부처님은 사실상 왕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치적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루소는 신이 내린 권력이라는 절대왕정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해 불교와는 다른 논리를 동원한다. 부처님은 사유재산의 발생으로 인한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과 왕이 계약했다고 설하셨다. 루소는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절대왕정은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면서 사회계약론을 제시하였다. 어쩌면 부처님은 강한 왕권이 등장하던 시기에 활동하셨지만 루소는 이미 신이 내린 권력으로 굳어버린 군주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약간 다른 논리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용이 든다. 장아함경은 세금의 발생에 대해 설명한다. 즉 각자 가진 쌀을 조금씩 내어서 평등한 주인에게 준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국민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알고 보면 우리의 돈을 가져다가 세금이라고 이름 붙이고, 우리의 신체를 끌고 가서 군복무라고 이름 붙인다. 여러가지 법을 제정해서 강제하고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고 심하면 감옥에 가둔다. 수십만년 전의 수렵채취 시대에 인간은 정부 없이 자유를 누렸다. 이제 우리는 정부가 없으면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정부의 모든 강제적인 행위는 우리가 자유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라고 보는게 불교의 관점이고 루소의 관점이다. 따라서 정부의 강제적인 행위는 국민전체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대리인에 불과하다. 세금은 정부의 권리가 아니라 정부의 의무를 위해 국민이 포기하는 대가이다. 왕이 군림하는 군주라면 정부의 행위는 은혜를 베푸는 행위이다. 왕이 계약에 의한 대리인이라면 정부의 행위는 계약의 이행에 불과하다. 만약 대리인이 주인인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민을 압박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선출할 수 있다. 왕은 대리인이고 국민이 주인이므로 불교의 정치관은 민주주의이며, 원래 우리는 자유로웠으나 사유재산으로 인한 다툼 해결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제약할 뿐이므로 불교의 정치사상은 자유주의이다. 인도의 4계급을 부인하고 평등한 상가를 구성했던 불교의 정치사상은 평등주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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