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 박사학위 받은 법타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北조불련 연구’로 박사 학위 받아
조불련 전문 연구 박사 논문 ‘최초’
북한불교 총망라 종합 연구서 평가

美유학 중 다양한 정치이념 접하며
‘민족苦 해결 위한 통일운동’ 서원해
스님 방북 1호… 온갖 고초 겪기도

1992년 평불협 창립… 운동에 전념
사리원시 국수공장 열고 국수 배급
“밥이 통일”… 北 지원 아끼지 않아

5.24 조치 이후 남북관계 경색 국면
“美 휘둘리지 말고 민족문제 해결을”
불교계, 통일 운동 적극 지원나서야

법타 스님은… 추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967년 1월 법주사에서 추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7년 4월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1985년 미국 유학 중 북한 자료를 보며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발원을 갖게 됐다. 이후 1989년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방북하면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1992년 귀국해 불교 최초 통일운동단체인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를 창립하고 30여 년 동안 북한에 옷과 밀가루 등을 전달하며 통일운동을 펼쳐왔다. 지난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동국대 정각원장을 역임했으며, 2016년에는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소임을 맡아 종단 통일 사업을 이끌었다. 총무원 총무부장, 제10교구본사 은해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201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됐다. 2018년 조계종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휴대전화 너머로 익숙한 노래 가사가 통화 연결음악으로 흘러나온다. 통화 연결음악으로도 통화의 주인공인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바로 조계종 원로의원 법타 스님이다. 

법타 스님은 통일운동의 불모지였던 불교계에 ‘통일운동’의 불길을 당긴 불교계 1세대 통일운동가이다.

평생을 수행자로서 통일운동에 매진해온 법타 스님이 이번에는 북한학 전문 연구자로 이름을 알렸다. 스님은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북한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로 올해 상반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간 북한 종교 전반에 관련해 조선불교도연맹을 함께 다룬 연구는 있지만 조선불교도연맹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은 법타 스님이 최초다. 스님은 1996년 ‘최근세 50년 북한 종교 변화’로 미국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지만, 이번에는 ‘북한학’이라는 전문적 영역으로 발을 넓힌 것이다.   

법타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 ‘북한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는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 양상을 비롯해 조선불교도연맹 역사와 조직체계, 문중, 법계, 신도조직, 사찰, 주요인물 등을 망라한 북한불교 종합 연구물이다. 실제 논문을 살펴보면 “북한불교의 뿌리를 캤다”는 스님의 자평이 과언은 아니다. 평생 모은 북한불교 자료들을 모두 수록했고, 그 중에는 스님이 발굴해 처음 공개하는 자료도 있다. 

이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종교관과 사찰 현지지도’ 챕터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챕터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찰 현지지도 횟수를 정리하고 누구와 어디를 방문했는지도 망라했다.    

“1991년 방북해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견학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유적지구 현지지도 내용이 정리된 전시 도판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만난 박물관장에게 도판의 촬영을 요청했고, 허락을 받아 촬영해 자료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의 현지지도 횟수와 내용은 북한의 종교 인식과 정책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같은 자료는 남한 사회에서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통일운동은 내 운명”
올해로 세납 76세를 맞은 법타 스님이 이처럼 열정을 갖고 북한불교 전반과 총괄조직인 조선불교도연맹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이 세운 평생의 원력 때문이다. 

법타 스님은 198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반공국가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 더 다양한 정치 이념을 만났고, “남북이 정치적으로 통일과 반공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세계 유일 분단 국가라는 복잡한 한반도 상황과 민족고(苦)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통일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든지 통일은 이야기해요. 하지만 통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남과 북의 정부 모두 반공과 통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만 했죠. 이런 상황에서 민족고(苦)를 해결하기 위한 타개책은 통일운동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통일운동은 이 시대의 호국불교가 나아갈 길이라는 깊은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법타 스님이 ‘통일보살’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이 같은 발심 이후다. 그러다보니 ‘1호 스님’이라는 수식어가 자천타천으로 붙게 됐다. 법타 스님은 한국 여권을 가진 스님으로서는 첫 번째로 방북해 ‘방북 1호 스님’이 됐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재외 거주 한국인은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됐죠. 1989년 제13차 평양 축전이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하고 싶어서 방북을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서 유학 중이었으니 재외 국민 조건을 갖춰  LA총영사관에 신고하고 출발해 서울에서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 스님에게 방북 신고를 마쳤습니다. 그 뒤 홍콩을 거쳐 중국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북한 땅을 밟게 됐죠. 이제 30년이 지난 일입니다. 처음 북한에 갔을 때 제 승복을 보고 신기해했던 북한 주민들이 생각나네요.”

1992년 법타 스님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다. 귀국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바로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 창립이다. 평불협은 불교계에서는 첫 번째 통일부 등록 불교계 통일단체로 남북한 교류와 지원에 다양한 역할을 했다. 

가장 큰 족적은 황해도 사리원에 금강국수 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1998년 1월 가동을 시작한 금강국수 공장은 활성화 됐을 때에는 하루에 7700인분의 국수를 생산할 수 있었다. 2011년에는 평양에 금강빵공장을 설립해 평양 주민들이 빵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왔다. 

“저는 ‘밥이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잘 먹고 잘 살아야 통일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 공장을 짓고 국수와 빵을 보급한 것입니다. 금강국수 공장과 금강빵공장을 세웠을 때가 통일운동을 하며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밀가루와 식품도 지원하고 양파 씨앗 등 농업 지원도 진행했죠. 의류, 신발, 생필품 등도 꾸준히 북한에 보냈습니다. 2012년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약 20년간 평불협이 북한에 지원한 물품들은 약 46억원 가량 됩니다.”

통일운동은 ‘인내’다
199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남북불교교류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와 금강산문화유적복구협약을 맺고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평양 법운암 단청과 삼존불 개금, 사리원 성불사 단청 및 삼존불 개금 등 북한 사찰과 불교문화재 보존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지난 2016년에는 조계종의 통일 종책을 전담하는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으로 임명돼 종단 대북 사업을 총괄하기도 했다. 

지금은 불교계 대표 통일운동가로 이야기되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실제 스님은 ‘국보 1호’로도 불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해서다. 법타 스님은 1994년 신공안정국 국면에 젊은 시절 주체사상과 불교를 함께 연구한 경력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105일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주위에서 좌파, 빨갱이로 자신을 매도할 때였다. 

“옥고는 통일운동하면서 치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위 스님과 대중이 저를 친북 승려, 좌파, 빨갱이로 매도할 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또한 종단이 자체 통일 사업만을 신경쓰고 NGO단체에게는 무심할 때에도 마음이 좀 아팠죠. 제일 안타까운 것은 5.24조치 이후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고 있는 대북 관계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내렸던 5.24조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북한과의 교류를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스님이 이끄는 평불협 역시 5.24조치 이후 어떤 활동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에서도 4.27판문점 선언 이상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스님은 “현 정부가 미국 눈치를 보지 않고 담대하게 통일 정책을 펼치라”고 주문했다.

“현 정부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대북 관계 진전이었지만, 4.27판문점 선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최근에는 북한의 ‘남한 패싱’이 이뤄지고 있죠. 정부는 대북 관계에 있어서 미국에 끌려가지 않고 요구할 것은 자신있게 요구했으면 합니다. 또한 북한과의 교류의 물꼬는 민간에서부터 이뤄져야 합니다. 민간에서 교류와 소통이 이뤄지면 대북 관계는 충분히 진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님은 종단의 통일 정책에 대해서는 지속성과 내실화를 당부했다. 특히 내실화 부분에서는 “북한과 북한불교를 바로 보는 교육을 자주 열어 종단의 통일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사부대중을 양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인터뷰 말미, 법타 스님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죽을 때까지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북한 전역 사찰 성지순례, 탈북자 결연 사업 등 다양한 사업계획들을 쏟아냈다. 

“통일운동은 ‘인내’입니다. 버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버티면서 통일운동을 할 겁니다. 북한 동포에 삶이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보살행입니다. 이것이 저의 수행입니다.” 
 

법타 스님의 ‘북한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는

북한불교 뿌리 찾아낸 전문 연구서

조계종 원로의원 법타 스님은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북한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 ‘북한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는 조선불교도연맹 역사와 조직체계 등을 망라했다.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의 태동은 1946년 12월 26일 북조선불교도총연맹(1972년에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로 개칭) 결성 당시 상무위원으로 사회주의 승려 대부분이 취임해 북한 불교계를 이끌면서부터다. 실제 한국전쟁 이전 사회주의 성향의 승려 56명이 월북한 바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의 종교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복무하는 인민단체조직으로 국가와 종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조선불교도연맹은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6국의 지도를 받으며, 또한 조국전선중앙위원회 제6국에 속한다. 중앙위원회에서 업무 전체를 관장하며, 서기국에서 각 업무를 조율해 시행한다. 별도 기구로는 승려 대상 교육기관인 불교학원이 있고, 법계자격고시위원회가 있다. 이들의 주요 역할은 남한을 포함한 제3국과의 종교 교류와 북한 불교 정체성 유지, 사찰 관리 등이다.

조불련은 2003년 신설한 조불련 전국신도회가 신도조직과 조직의 구성과 운영을 주도하며, 회장·부회장·위원 관리직·일반 신도로 조직돼 있다. 운무 라영식 회장과 안심행 리현숙 부회장이 중심이며, 선죽 리명희 위원과 성각 정영호 평양시신도회장이 주로 활동하고 있다.  

법타 스님은 “이제 종교를 북한 사회의 한 부문으로 이해해야 한다. 조선불교도연맹의 조직과 역할을 재조명함으로써 향후 남북한의 종교교류를 정상화하기 위해 북한 종교에 대한 연구들을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향후 이 같은 연구들로 사회주의 체제와 종교가 공존할 수 있음을 밝히고 북한에 제공해 종교활동이 자유롭게 자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