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이해의 길 35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경전에 따라 다양한 종파로 확대되고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종파(宗派)는 앞서 살펴본 격의, 교판과 함께 중국불교를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다. 여러 종파 가운데 천태(天台)와 화엄(華嚴)은 철학적인 반면에 정토(淨土)와 선(禪)은 실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천태와 화엄은 중국의 교학불교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며, 두 종파의 성격도 사뭇 다르다. 화엄이 아름다운 이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천태는 진흙과도 같은 현실에 시선이 닿아있다. 두 종파 간에 세계관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로 하는 종파다. 〈법화경〉은 본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준말인데, 대승불교 초기에 해당되는 50년경부터 150년경 사이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대승경전이다. 이 경전이 설해진 장소는 그 유명한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에 위치한 영취산(靈鷲山)이다. 우리나라 불보사찰인 통도사가 자리한 영취산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붓다가 〈법화경〉을 설할 때 마가다국의 왕인 아사세와 대신들뿐만 아니라 1만 3천의 제자와 8만의 보살, 10만이 넘는 괴수(怪獸) 등이 참석한다. 그때 삼천대천세계의 국토가 진동을 하면서 땅이 열리고 무량 천만 억 보살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고 한다. 현실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학자들은 “〈법화경〉은 인도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인도인의 상상력이 실크로드의 모래바람을 맞고 건너와 중국인의 사유와 만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천태종이다.

〈법화경〉을 우리말로 풀면 ‘진리(法)의 연꽃(華)’ 경전이 된다. 그런데 청정하고 아름다운 백련이 서있는 곳은 다름 아닌 더러운 진흙 밭이다. 진흙은 부조리와 고통이 가득한 현실세계를 상징한다. 천태종이 응시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연꽃으로 상징되는 진리의 세계, 부처의 세계는 중생들 삶의 터전인 현실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결코 피어날 수 없다. 비록 모든 것이 공(空)하다고 하지만, 온갖 모순과 악으로 넘쳐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에서 천태종을 확립한 인물은 천태대사라고 불리는 지의(智?)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왜 천태종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가 17세 되던 554년 조국인 양(梁)나라는 멸망하고 고관을 지냈던 부친마저 죽고 만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낀 그는 이듬해 출가를 한다. 그런데 제2의 조국인 진(陳)나라마저 수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두 번에 걸친 망국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죽고 말았다. 그는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 천태학이라는 사상의 금자탑을 이루어냈다. 더러운 진흙 밭에서 아름다운 연꽃을 피워낸 셈이다. 이러한 경험은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라는 독창적인 사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글자 그대로 한 생각 속에 3천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3천이나 되는 세계에는 극락과 부처도 있지만, 지옥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중생도 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지옥과 극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간다. 지의는 지옥과 같은 경험을 통해 중생의 실존을 자신의 사상 속에서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법화경〉을 중시했던 이유도 ‘진리의 꽃(法華)’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천태의 입장에서 화엄은 지나치게 순수하기 때문에 지옥과 같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보았다. 지의는 자신이 살았던 혼돈의 시대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천태의 시선이 화엄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불성의 현현(顯現)이라고 보는 화엄의 긍정적 세계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다.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독재와 야만의 시대에 인생은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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