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임제 법맥 선지식들

唐末~北宋 선종 면면히 발달돼
석상초원 등 선풍 생략 아쉬움
황룡·양기파 형성 전 선사 중요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 북송 대에 이르는 동안에도 선종은 면면히 발달하고 있었다. 이때는 5가 가운데 운문종·임제종·조동종의 선풍만이 전하였다. 선종사에서 임제종을 거론할 때는 임제종의 분파에서 나온 황룡파와 양기파, 즉 임제에서 시대를 거슬러 뛰어서 황룡과 양기만을 거론한다. 하지만 임제의 법을 받은 흥화존장~석상초원까지의 선풍을 생략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우리나라 조계종은 임제종 문하의 흐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황룡파와 양기파가 형성되기 이전까지의 선사들을 보자.   

풍혈연소 선사 
임제의 문하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3)는 어려서부터 출가할 뜻이 있어 어육이나 오신채를 금했다고 한다. 〈법화현의(法華玄義)〉에 깊은 뜻을 두고, 천태 교관인 지관정혜(止觀定慧)를 닦았다. 이후 남원혜옹(南院慧?, 생몰미상)의 문하에 들어가 원두 소임을 맡았다. 하루는 남원이 물었다. 

“남방에서는 이 몽둥이를 어떻게 헤아리느냐?”
“굉장하게 헤아립니다. 이곳의 몽둥이는 어떻게 헤아립니까?”
“방(棒) 아래, 무생법인이 기연을 만나고도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연소는 스승의 이 말에 크게 대오했다. 연소는 사형사제인 수곽(守廓)을 만나서도 공부에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연소도 스승이 되어 선풍을 떨쳤다. 
한 제자가 찾아와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부처 아닌 게 있더냐?”
“현묘한 말은 깨우치기 어려우니, 곧 가르쳐 주십시오.” 
“바닷가 모래톱에 집을 짓고 사니, 부(扶桑, 해가 떠오르는 곳)에 가장 먼저 해가 든다.”  
“밝은 달이 공중에 걸려 있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늘에서 빨리 돌아가는 것을 좇지 말고, 땅 속에 묻힌 것을 물어라.”
“옛 곡조에는 음률이 없으니, 어떻게 화합을 이룰 수 있습니까?”
“나무로 만든 닭이 야반삼경에 울고, 띠풀로 엮은 개가 새벽에 짖는다.”  

연소는 당시 유학과 불교학에 뛰어나 “그의 법석은 천하에 제일이고, 멀리서부터 학자가 찾아왔다”라고 한다. 법을 이을 제자가 없어 연소는 “총명한 사람은 많아도 자신의 본성을 구하는 이는 드물다”라는 한탄을 하였다. 마침 이 무렵, 수산 성념이 찾아왔다. 

수산성념 선사
수산성념(首山省念, 926~993)은 출가해 두타행을 하다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3000번 독송했다. 당시 그를 ‘념법화(念法華)’라 하였다. 수산이 연소 문하에 머물러 있는데, 어느 날 연소가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산이 연유를 물었더니, ‘임제의 법맥을 잇지 못하고 여기서 끊어지는 게 슬퍼서 그러네’라고 하였다. 성념이 ‘그러면 저라도 잇겠습니다’라고 하자, 연소가 ‘자네는 〈법화경〉에 걸려 있네’라고 하였다. 성념이 경전 독송을 끊고, 수행에 전념하자, 다음 공안을 수산에게 주었다. 

“세존의 불설의 설(不說之說)은 어떤 것인가?”
“가섭의 불문의 문(不聞之聞]은 어떤 것인가?”

이후 수산은 스승의 법을 받아 남방 일대에 크게 선풍을 진작했다. 수산의 선풍을 알 수 있는 몇 공안을 보기로 하자. 

수산이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며 말했다. “그대들이 만약 이를 죽비라고 불러도 어긋나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아도 어긋날 것이다. 그대들은 얼른 말해 보라. 이를 무어라 하겠는가.”
- 〈무문관〉 43칙 ‘수산죽비(首山竹귀)’ 

〈무문관〉의 저자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는 “죽비를 죽비라 불러도 안되고 부르지 않아도 안되는 이치를 알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답했다. 이 공안을 배촉관(背觸關)이라고 한다. 다음, 선사의 공안을 보자.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며느리를 나귀 등에 태우고, 시어머니가 고삐를 잡고 길을 간다.” 
- 〈종용록〉 65칙 ‘수산신부(首山新婦)’

위 내용은 부처로 상징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위치가 바뀐 것을 말하는데, 선은 격외(格外)의 도리임을 의미한다. 가다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위치가 바뀔 수도 있고, 나귀에 둘이 탈 수도 있으며, 나귀에 아무도 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정해진 법은 없다.

〈금강경〉에서 “무상정등각이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다(無有定法 名阿葺多羅三췐三菩提)”고 하듯 일정한 법은 있을 수 없다. ‘부처가 ○○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듯이 어떤 행이든 언어이든 삶의 어느 언저리에서든 무심(無心)한 도리가 중요하다. 

분양선소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는 14세에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불법을 구하고자 선지식을 찾아 발초첨풍하였다. 최후에 수산 성념에게 귀의해 깨달음을 얻어 그의 법을 이었다. ‘코끼리 가는 곳에 여우의 발자취 끊어진다(象王行處絶狐踪)’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시호는 무덕선사(無德禪師)이다. 

송대의 송고문학에서 공안으로 발전되었고, 다시 공안에서 화두가 나와 간화선이 발전되었다. 즉 송고문학에서 공안선이 성립되었고, 이 공안을 수행방법으로 전환한 것이 간화선이다. 송고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하는 송고(頌古) 100칙이 있는데, 선소가 최초로 〈100칙 송고〉를 만들었다. 〈100칙 송고〉는 수많은 공안을 시와 게송으로 해석한 것이다.   

선소는 속세의 번거로움을 싫어해 은둔해 살아서인지, 선소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다. 후대에 선소의 선풍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후대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종고(1089~1163)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종고를 따르는 스님들이 이런 말을 하였다.   

“사람이 살면서 신념 때문에 겪어야 할 불행이라면 구차하게 면하려거나 슬퍼할 필요 없다. 만약 선사께서 평생을 아녀자처럼 아랫목에 앉아서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대혜 선사께서는 옛 성인이 가신 길을 간 것뿐이다. 그대들은 무엇을 그리 슬퍼하는가. 옛날 자명(慈明)·낭야(瑯嗚)·대우(大愚) 세 스님이 분양선소를 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마침 서북 지역에서 전쟁으로 길이 막히자, 스님들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병사들 대열에 끼여 선소를 친견하러 갔다.”

바로 이 대목이다. 이 내용을 통해 당시 선소의 인물됨이나 선사로서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석상초원
석상초원(石霜楚圓, 986~1039)은 광서(廣西) 장족(壯族) 자치구(自治區) 전주(全州) 출신으로 속성은 이 씨이다. 자명(慈明) 초원이라고도 하는데, 처음에는 유생이었으나 22세에 출가했다. 출가 이후 만행을 하며 스승을 찾던 중 분양선소를 참문했다. 초원이 선소 문하에서 2년을 지냈으나, 아무런 가르침이 없었다. 하루는 초원이 스승에게 말했다. 

 “스님, 저는 스님 문하에서 2년을 보냈으나, 깨달음에 관한 것은 조금도 배우지 못하고 세속의 잡다한 일만하다 세월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산다면 수행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스승이 초원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말했다. “이 못된 놈아! 너 같은 놈이 내 문하에 들어오다니….”

대뜸 선소가 주장자로 두들겨 패자, 초원이 살려 달라고 외치며 도망갔다. 초원이 여기서 깨닫고 나서 말했다. “임제의 도는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나왔구나!” 

초원은 스승을 따라 경도(京都)에서 7년을 보낸 뒤, 여러 곳을 거쳐 강서성(江西省) 의춘(宜春) 남원사에서 3년을 주석했다. 이 때 초원을 알현한 제자가 양기 방회이다. 그 후 초원은 호남성의 도오사·석상사·복엄사 등에서 방장으로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복엄사에서는 황룡파의 개산조인 황룡 혜남을 제자로 두었다. 5가 7종 가운데 임제종계의 초원선사로부터 황룡파와 양기파가 분파되었으니, 초원의 선종사적 위치가 실로 크다고 볼 수 있다.    

북송 인종(1022~1063, 재위) 황제의 사위인 이준욱이 병이 들자, 초원에게 뵙기를 청한다는 전갈이 왔다. 초원은 부마가 살고 있는 경도로 달려가 부마를 위로하며 말했다. 

“본래 걸림이 없는 것이요, 어디서나 모나고 둥글든 임의(任意)에 맡기십시오.” 
부마가 말했다. “밤이 되니 몹시 피곤하군요.”
“부처 없는 곳으로 부처가 되어 가십시오.” 초원선사의 마지막 법어에 부마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초원이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흥화사로 돌아가는데, 인종 황제가 관선(官船)을 타고 가도록 하사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초원이 갑자기 중풍을 맞았다. “시자야! 내가 아무래도 풍에 걸린 것 같다.”

스승이 풍을 맞아 입이 비뚤어진 것을 보고, 제자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아이쿠! 이 일을 어쩌나?! 스님께서 평생 동안 걸핏하면 부처를 욕하고 조사를 꾸짖더니, 이제 그 업보를 받은 것 같습니다.”

시자의 말에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곧 바르게 해서 보여주마.”  

손으로 입을 어루만지니 비뚤어졌던 입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초원은 사찰로 돌아온 이후 좌선
삼매에 들어 다음 해인 1039년에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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