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중도(中道)

〈산꼭대기 사람과 네거리 사람〉

법좌에 올라 말했다.

“한 사람은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으면서 몸이 나올 길이 없고, 한 사람은 네거리에 있어서 나아가고 물러날 데가 없다. 어느 것이 앞에 있고 어느 것이 뒤에 있는가? 유마힐이라 하지 말고 부대사라 하지 말라. 수고했느니라.”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우뚝 솟은 산봉우리 위(孤峰頂上)에 있고 한 사람은 네거리(十字街頭)에 있다고 했다.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몸이 나올 길이 없고 네거리에 있는 사람은 향배(向背)가 없다. 향배가 없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나은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유마힐이나 부대사의 경우로 보지 말라고 충고를 한다.

산꼭대기(高峰頂上)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 네거리(十字街頭)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말하는가? ‘높은 산봉우리’는 수행의 궁극적인 경지에 이른 절대 평등의 세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 네거리는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는 곳으로 상대적인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전자를 진제(眞諦) 혹은 출세간(出世間)이라 한다면 후자는 속제(俗諦) 곧 세간이다. 조동종에서 써온 선(禪)의 용어로 말하면 본분(本分) 정위(正位)와 현성(現成) 편위(偏位)다. 이 두 경계가 상즉(相卽)해 있는 도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평등 속에 차별이고 차별 속에 평등’이라는 말이다.

유마힐은 〈유마경〉 ‘입불이법문품’에 설해져 있는 마지막 장면처럼 침묵을 지킨 두구(杜口)의 장본인이요 부대사(497~569)는 양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많은 설법을 한 인물이다. 고봉정산에 있는 사람을 유마거사로, 십자가두에 있는 사람을 부대사 같은 사람이라고 구분해 보지 말라는 충고를 또 해 놓는다. 이 대목의 법문은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중도(中道)를 밝혀 놓은 법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불법이 단지 세간에 있으니 세간을 여의고 부처를 찾는 것은 토끼 뿔을 찾는 것이다.(佛法只在世間中 離世覓佛求兎角)”는 송구의 뜻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길가는 일과 집안 일〉

법좌에 올라 말했다.

“한 사람은 겁을 논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길에 있으면서 집을 떠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은 집을 떠나서 길에도 있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을 만한가?”

‘길에 있는 것’과 ‘집에 있는 것’을 두고 대중에게 질문을 한 법문이다. 길에 있는 것이란 도중사(途中事)를 말하고 집에 있는 것이란 가리사(家裏事)를 말한다. 가사(家舍)가 바로 가리사다. 수행이나 공부에 있어서 안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본분의 공부를 하는 쪽을 가리사라하고 외부 대상세계에 응하여 방편을 응용하는 쪽을 도중사라 하여 서로 상대적인 말로 써왔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중사에 몰두하되 가리사도 잊지 않고 또 한 사람은 가리사도 잊어버리고 도중사도 내몰라 하니 두 사람이 판이하다. 이걸 두고 어느 쪽이 잘하는 것이냐 하고 물었다. 인천의 공양을 누가 받을 만하냐고 물어본다. 우열을 판단해 보라는 뜻으로 말한 것 같지만 속뜻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가리사니 도중사니 운운하는 것이나, 둘 다 부정하는 따위의 일을 집어치우라는 말이다.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중도(中道)를 천명한 법문이다.

흔히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역할을 가리사(家裏事)와 중도사(中途事)라고 짝을 지어 말한다. 또한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은 행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둘이 원융무애하게 조화가 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불법(佛法)의 마지막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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