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이해의 길 34

“야구가 죽어야 축구가 산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모두 식은 어느 날 공공화장실에서 발견한 낙서다. 어느 축구 팬이 뜨겁게 불타오르던 축구의 열기가 식고 다시 프로야구의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패러디해서 쓴 것 같았다. 지나친 경쟁의식이 낳은 해프닝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가대표 경기를 제외하면 축구보다 야구를 더 좋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야구가 죽어야 축구가 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좋아하는 스포츠를 선택해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연출된다. 불교는 중국인들과 가까워지면서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불교 경전이 중국어로 번역된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경전을 중심으로 일종의 모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예컨대 수많은 경전들 가운데 〈화엄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이 화엄종이다. 〈법화경〉과 〈열반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천태종이라는 종파를 만들었다. 대학에서 축구나 야구, 농구 동아리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중국의 종파불교, 교학불교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중국에서 형성된 종파는 건전한 경쟁을 통해 자신들이 소의(所依)로 하고 있는 경전의 주석서도 만들어내면서 교학의 발전이라는 지적 성과를 이루어낸다. 그 과정에서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뛰어난 승려들이 많이 등장한다. 중국의 화엄종을 대표하는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과 천태종의 천태지의(天台智?, 538∼597)는 종파 간의 경쟁 속에서 배출된 중국불교계의 걸출한 인물들이다.

천태종을 비롯한 각 종파에서는 방대한 양의 경전들을 주제별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한다. 흔히 교판(敎判)이라고 불리는 이 작업은 서점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물리학, 문학, 생물학 등 주제별로 분류해서 배치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그 코너에 가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교판은 경전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천태종에서는 5시교판(五時敎判)이라 불리는 경전 분류 작업을 하였다. 말하자면 불교의 모든 경전은 붓다가 다섯 번(五時)에 걸쳐서 완성했다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 맨 처음 설한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너무 어려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4성제나 8정도와 같이 비교적 쉬운 〈아함경〉을 설하고, 그 다음으로 〈방등경〉과 〈반야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로 설한 가르침이 천태종의 소의 경전인 〈법화경〉과 〈열반경〉이라는 것이 5시교판의 주요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불교의 모든 경전은 이 교판 안에서 주제별로 구분이 되기 때문에 그 위치가 선명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붓다와 경전을 소재로 한편의 소설을 구성한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경전에 가격을 매겼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천태종의 소의 경전인 〈법화경〉과 〈열반경〉이 만원이라면, 〈화엄경〉은 8천원, 〈아함경〉은 5천, 이런 식으로 계산되었던 것이다. 가수 조용필이 전성기 때는 처음이나 중간이 아니라 맨 마지막에 등장하여 무대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천태종에서는 〈법화경〉과 〈열반경〉이 조용필이었던 것이다.

화엄종에서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만의 교판을 따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조용필은 〈화엄경〉이기 때문에 만원을 책정하고, 〈법화경〉은 6천 원 정도로 깎아내렸다. 종파간의 지나친 경쟁이 낳은 결과다.

한국불교에도 이러한 ‘우리 경전 최고’ 의식이 남아있다. 특정 경전 제일주의는 붓다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다. 붓다는 대중들의 성향과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지향하였다. 그저 자신에게 맞는 경전을 선택해서 신행(信行)의 기초로 삼으면 되는 일이다. 붓다의 모든 말씀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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