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북조시기 선을 수행한 양대 집단

남북조 통치자 불교의지
관선, 정치적 특권 누려
전체 불교문화 발전 주체
하층민선 숫적으로 우세

 

중국에서 남북조시기(420~589)는 중국이 분열되었던 복잡한 시대였다. 이때에 선을 수행했던 양대 집단으로 ‘관선(官禪)’과 ‘하층민선(下層民禪)’이 있었다. 먼저 관선은 중국의 남북조시기의 선정(禪定)수행을 하던 승려들을 가리키며, 이들은 통치계급으로부터 각 방면에서 지지를 받으면서, 집단 선수행의 활동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경제적 지원은 당연히 통치자들로부터 원조를 받았고, 일상생활의 각 방면에서도 역시 통치자들의 공양을 받았다. 때문에 종교 활동을 실천하는 가운데 은연중 통치자의 의지가 반영되기도 했다. 이렇게 통치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선수행을 한 승려집단을 세칭 ‘관선’이라고 부른다. 물론 학계에서 이 개념에 대해서 인정을 한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며, 이 관점은 일부 학자들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하층민선’은 반대로 모든 조건에서 매우 열악하였고, 의식주를 모두 자체로 해결하는 단체였다.

종교 활동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영역의 문제로서, 정신활동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종교는 대체적으로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매우 신성시하거나 혹은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점은 통치자들도 벗어날 수 없는 부분이다. 남북조시대에 불교가 유행을 하면서 통치자들도 심리적으로 불교를 의지하려는 강렬한 종교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승려들을 돕고 사원을 건립하고 승보를 돕는 것은 당연한 종교적인 활동이었을 것이며, 한편으로 그러한 불사행동은 곧 자신의 공덕을 쌓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덕을 지으면 자연히 그 공덕이 고스란히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철저한 믿음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도 사회 저변의 곳곳에 침잠되어 있는 중요한 사상 중 하나가 바로 인과응보사상이다. 즉 인과불허(因果不虛)로서 각자의 내생과도 직결된다는 믿음이 있으며, 윤회사상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도 중국의 TV연속극을 보다보면 결말은 항상 인과응보, 권선징악 등이 기본 줄거리이다. 매번 결말에 악인이 파멸하면서 내뱉는 말이 있는데, 바로 ‘보응(報應)’이라는 말로 자신을 저주하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된다. 이 보응이라는 말은 곧 ‘과보를 받았다’라는 말로서 자신에 대한 응징이자 절규이다. 이러한 관념의 시작은 아마도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유구한 역사와 함께 선악징벌이 하나의 문화가 된 것 같다. 따라서 당시의 통치자들 역시 승려들을 부양하고 지원한 이면에는 종교적인 정신을 흡수하고 받아들여서, 때론 종교를 통한 정신적인 함양을 위해서, 때로는 통치하는데 이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른바 ‘하층민선’의 구성원은 다름 아닌 일반백성들로 형성된 선수행 집단을 말한다. 즉 통치계급으로부터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사회적 우대도, 경제적 지원도 받지 않고, 민간에서 자생한 자립적 선정수행 단체이다. ‘하층민선’을 ‘관선’과 비교해서 몇 가지로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가 있다. 첫 번째, 선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통치자들로부터 특별한 대우 및 경제적 원조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또한 정치적으로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매우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두 번째, 이들은 심리적으로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종교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매우 자유로웠고, 그들의 종교적인 의식 활동도 대부분 개인사에 국한된 것으로, 가깝게는 친치 혹은 친구 등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극히 사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정치적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세 번째, 종교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규모와 영향력을 ‘관선’과 비교를 할 때,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이들의 구성원도 ‘관선’의 집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즉 이들은 대부분 하층민으로, 어쩌다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람도 있었지만 지극히 미미했다. 네 번째, 당시 시대가 전쟁이 빈번한 관계로 백성들은 자주 이동을 해야 했고, 생활 또한 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들 집단은 주로 민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역 종교 및 문화적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다섯 번째로 이 집단은 자발적으로 구성이 되었기 때문에 안정적이지 못했다. 왕왕 자생자멸(自生自滅)하기가 부지기 수였다. 게다가 일단 이 단체의 세력이 증가해서 힘이 생기면 통치계급들로부터 이용을 당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들로부터 타격을 받기도 했다.

역사에서 배웠듯이 남북조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아주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각국의 황제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자주 전쟁을 일으켰고, 신하가 황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되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은 끝없이 일어났고, 흉년과 기근도 끊이지 않았고 거처할 곳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아침에 저녁의 일을 보장할 수 없었다. 통치자들도 역시 본인들에 대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정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북위(北魏·땜魏·西魏·北펭·北周)는 상대적으로 남조(宋·펭·梁·냈)에 비해서 더욱더 많은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해를 안겨 주었으며, 원래 농업을 생업으로 살아가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땅과 집을 잃게 되는 경우가 빈번해졌고, 부득이하게 삶의 터전을 떠나서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불교는 이러한 시대적 문제를 안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당시 사회가 매우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불교의 역사적인 각도에 볼 때, 이때 불사활동이 매우 빈창하였고 사원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의 활동도 매우 활발하였다. 또 이때에 땅과 집을 잃은 유랑민들은 연이어서 출가를 하기 시작했다. <우서석로지(魏書·釋老志)>에 의하면, 북위 태화 원년(477) 위나라 경내에 사찰 6478 곳, 승니는 7만 725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북위 말년에는 이미 승려의 숫자가 200만이 되었다고 하며, 사찰도 3만 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림, 강병호

 

한편 이렇게 많은 승려들 가운데 일부는 황실의 구성원에 속하는 사람들로부터 공양을 받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관선에 속하는 승려들이었다. 그 외의 대다수의 승려들은 모두 세력이 없는 이들로서 하층민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관선은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적으로도 특권을 누렸고 경제적으로도 특별한 우대와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전체 승단 내부에서 통치권마저도 가지게 되었으며, 불교전체 불사에 대한 권한과 임무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관방의 의지를 대신하기도 하면서 일체 승려들의 실생활에 대해서도 제제를 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반대로 하층민선은 이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보니, 왕왕 일상생활 및 불사관계에 있어서 관선과의 갈등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 즉 조정에서 국가의 발전과 생산력을 늘리기 위해서 엄격하게 승려들의 출가 숫자를 제한하는 정책을 펼 때, 하층민은 당연히 관선들에게 간섭과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 조정에서 불교를 통치하기 위해서 승려들로 하여금 고정된 장소에서 선수행하기를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하층민선”들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많은 승려들은 사방각처를 운유(雲遊)하면서 유랑생활을 하였다. 때로 유랑승들은 관선들의 질책을 받기도 했으며, 또 매우 호되고 엄격한 처벌을 받기도 했다.

관선들의 대체적인 구성원은 모두 당시의 지식인들로서, 일정한 지식과 문화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고, 불교에 대해서도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전체 불교문화 발전에 주체가 되었고, 동시에 불교교리 및 해석과 계율에 대해서 장악을 하면서 제제도 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하층민선 가운데 문화적 소양이라던가, 불교교리 및 계율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갖춘 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 비율이 매우 낮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체험 및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안목을 갖추기도 했다. 즉 이들의 구성원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의 가장 하부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몸소 현실의 실생활에서 체험한 것이 아주 큰 자산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내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통치계급 혹은 상층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인생의 관점을 가지기도 했다.

하층민들의 이러한 관점을 관선들은 당연히 반길 리가 없었고,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시종 쌍방 간의 갈등이 존재 할 수밖에 없었다. 하층민선은 유랑민 혹은 유랑승의 특징을 지닌 신분으로 타격을 피하기 위해서 산중에 은거를 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기타 지방을 유역하기도 했다. 북조시기의 관선과 하층민의 관계는 비교적 긴장 상태로서, 사실 이들 쌍방 간의 갈등은 곧 관방과 백성간의 갈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비록 초기 선종의 구성원을 관선과 하층민선으로 나누지만, 숫자적으로 단연코 하층민들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하층민의 이익을 대표하기도 했다. 선종의 고유한 언어인 ‘불립문자, 견성성불’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층민들의 현실을 반영한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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