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남몰래 한 가르침

법정 스님이 생전 쓰시던 의자. 낡은 의자지만 누군가 앉기에 부족함이 없던 것처럼 스님은 우리에게 돈이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직접 가르침을 주셨다.

“내가 어떻게 가는지 봐라”하고 말씀하던 스승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드러내는 데에 쓰도록 해 달라”는 뜻을 남기며 시공간을 버리셨다.

2월이면 인세 달라는 스님
어려운 대학생에 학비 전해
방송서 사연 나오면 사라져
드러내지 않고 성금도 전달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빚는 데 써달라고 말씀하고 길을 떠난 스승. 살아계셨을 때는 어떻게 하셨을까를 짚으면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스승 뜻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살펴본다.

인세는 다 어디로 갔을까?

‘무소유’를 내세우던 스승이니만큼 스승이 원적에 드시자 기자들 눈길은 그동안 많은 책을 펴내고 받은 인세를 어떻게 했느냐 하는 데 쏠렸다. 스승이 입적할 때 맑고 향기롭게 감사이던 김진곤 거사는 스승이 세상을 떠나실 때 통장에 남긴 돈이 없었다고 돌아본다.

<무소유>는 여러해 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던 스테디셀러였고, 다른 책들도 나오는 대로 인기도서 목록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이 세간 사람들 관심거리였다. 기자들은 성가시리만큼 물었다.

“무소유만 해도 300만 부가 넘도록 팔렸다는데 그 많은 인세는 다 어디에 쓰셨을까요?”

스승은 평소 “누가 진정한 부자인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덕을 닦으면서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덕이란 무엇인가? 남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남과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은 어떤 인연에 따라 우주가 잠시 맡긴 선물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스승이 빚은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에서 해마다 장학생을 몇십 명 뽑아 주는 장학금에 스승이 내놓은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싸고 또 싸더라도 향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 여사는 2004년 언론과 인터뷰에서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면서 스승과 인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김희숙 여사는 ‘입에 풀칠할 돈도 없는데 어떻게 아이 혼사를 치르지?’ 맏딸 혼인을 앞두고 한걱정하며 코가 빠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이 스승이 느닷없이 문을 두드리고는 별말씀 없이 “딸 시집보내요” 하며 봉투를 슬쩍 놓고는 도망가듯이 사라지셨다고 했다. 원고료 받은 건가 보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윤청광 선생은 어느 글에서 그 돈이면 집 몇 채를 살 수 있을 만 했다고 말씀했다.

1979년 어느 날 스승은 <무소유> 출간을 기획했던 수필가 박연구씨에게 “내 책(무소유) 인세를 좀 줄 수 없을까?”하고 조심스레 말씀을 건넸다.

그러나 범우사는 1976년 문고본 <무소유> 출판을 계약 맺으면서 원고료를 한꺼번에 드린 터였다. 무슨 말씀이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박 씨에게 스승은 “내가 좋은 일 좀 해보려고 해”라고 말씀했다.

이 얘기를 들은 범우사 윤형두 대표도 잠깐 무슨 스님이 돈을 밝히나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좋은 일에 쓰신다는 말씀에 선선히 판매금액 10%를 인세로 드리기로 한다. 장준하 선생 맏딸이 혼인할 때와 겹치지 않을까 조심스레 어림한다.

이 이야기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는 범우사 윤형두 대표는 스승이 열반에 드시고 나서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30여 년 동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알고 보니 이 인세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꾸준히 장학금을 주셨더라고요. 돌이켜 보면 스님은 ‘무소유’라는 수필 한 편에 평생 삶을 건 게 아닌가 싶어요. 무소유에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오셨고, 돌아갈 때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셨으니까요.”

책 제목을 정하는 출판 회의에서 스승이 내놓은 제목은 한자로 쓰인 ‘無所有’ 석 자였다. 출판사에서는 그때 흐름으로 보아 다른 제목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뜻을 넌지시 비쳤으나 스승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윤 대표는 그때 스승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첫인상은 상당히 깐깐한 보이셨습니다. 솔직하셨고, 쉽게 타협하지도 않고, 실없는 우스개를 하지도 않으셨죠.”

나는 스승이 열반에 드신 다음 해, 스승 유언장에 절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무소유> 찍기를 바로 그만뒀을 만큼 스승 뜻을 우러르는 범우사 윤 대표에게 연락했다. 스승과 결 고운 인연을 이어온 분들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니 만나고 싶다고. 윤 대표는 “그리 내세울 것이 없다.”라며 손사래 쳤다.

1970년대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했던 스승 글을 묶어 시리즈로 펴낸 ‘샘터’ 김성구 대표도 해마다 2월 말, 3월 초만 되면 스승이 인세를 채근했다고 털어놓았다. ‘왜 그러시지?’ 궁금했는데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해마다 초 새 학기가 열리기에 앞서 인세 수입으로 여러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맑고 향기롭게’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진명 스님은 “법정 스님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두 개가 생기면 늘 남에게 나눠 줬다”고 말씀한다. 그런 스승이 내려놓지 못하던 것이 있다. 찻잔이다. 결이 고운 찻잔을 보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켰고 털어놓으셨다. 그러나 출가 50년을 맞으면서 나눈 말씀에서 그조차 내려놓았다고 했다.

승가대학 4년을 마친 지 오래되었으나 사람들이 수행자에게 거는 기대가 높다는 것을 깨닫고 1992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들어간 진명 스님. 1학년 1학기 때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돈벌이하지 않는 수행자가 학교에 다니려니 등록금 고민이 컸을 터였다. 스승에게 대학교 다시 들어갔다고 말씀드리니 스승이 “진명이는 왜 대학에 다시 갔나? 학자가 되려는 건가, 수행을 잘하고 싶어서인가?”하고 물으셨다. 더 깊이 배워 수행을 잘하려고 학교엘 갔다고 말씀드렸다. 스승은 “그래? 내가 학비를 좀 보태야 하겠지.” 하며 선뜻 2학기부터 장학금을 줄 테니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다.

받은 사람 마음도 헤아려야…

맑고 향기롭게 사무국장으로 가까이서 모셨으니 스승 주머니 사정을 누구보다 깊이 꿰고 있었을 진명 스님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초등학생 사연이 텔레비전에 소개된 적이 있어요. 어린아이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일주일 동안 할머니 주검과 함께 살았다는 얘기에요. 법정 스님께서 그 사연을 보시더니 아무 말씀 없이 나가셨어요. 방송국에 찾아가 그 아이를 도와주라며 성금을 내놓고 오셨던 거죠. 좋은 일이라도 알려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습니다”라고 돌아본다.

스승이 세상과 나누는 문이 여럿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광주시 금남로에 있는 음악감상실 베토벤이다. 이따금 베토벤에 들렸던 스승은 이정옥 대표에게 “처지가 어려운 대학생들을 돕고 싶다. 둘레에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있다고 알리오면 스승은 이정옥 대표에게 장학금을 건넸다. 그 가운데에는 누가 내놓은 장학금인지도 모르고 학업을 마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윤청광 선생도 스승에게 장학금을 누구에게 어떤 사정으로 주셨는지 자세히 여쭈려고 하면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돌아본다. 거듭 여쭈면 “받은 사람 마음도 헤아려야지” 한마디 하실 뿐이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셨다는 얘기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절집 말투로 하면 ‘무주상보시’다. ‘내가 그랬네’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 내놓았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으라는 말씀이다. 그 대표주자가 불전함이다. 돈을 봉투에 넣어 살짝 넣고 돌아서면 되니까. 그러나 스님들은 어느 절이든 내 집이라 여기다 보니 도량을 둘러보며 살림살이를 헤아려 보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스승은 달랐다. 절을 한 바퀴 휘돌아보고 살림살이가 어려울 것 같으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불전함에 넣었다. 스승을 모시고 이 절 저 절 다녔던 진명 스님은 요즘도 불자들과 사찰 순례를 하다가 절 살림이 어려워 보이면 “가지고 다니면 무거우니까 주머니 먼지까지 다 털고 가세요”라고 한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나누어 가진다는 뜻입니다. ‘탐貪 자’는 조개 패貝’ 위에 ‘이제 금今’를 씁니다. ‘빈貧 자’는 조개 패 위에 ‘나눌 분分’자를 씁니다. 지난날에는 조개껍데기가 돈 구실을 했습니다. 돈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탐욕입니다. 손에 쥔 돈을 나누는 것이 청빈입니다. 가난이라는 말은 나누어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만약 가난이 없었다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가 가난을 겪어 봄으로써 이웃이 겪는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말씀을 빌리자면 가난은 우리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과 나누어 가질 때 그것은 우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스승이 외환위기를 맞아 온 나라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던 1998년 2월 명동 성당 강론에서 남긴 말씀이다. 내 곁에 무엇이 있다면 ‘우주가 널리 나누라고 준 선물’이라고 말씀하며 앞서 본을 보이던 스승은 정작 당신 몸에 병이 깊어 치료할 때 치료비가 모자랐다. 길상사에서 빌려 치료를 하고 나중에 인세를 받아 갚고 나서 2009년 봄 법회에서 이 말씀을 나누셨다. “재작년 겨울, 몸에 든 병을 치료하는데 제가 지닌 돈만으로는 모자라 사중에서 치료비 일부를 빌려 썼습니다. 그때 진 빚을 2월 12일 몇 사람이 함께한 자리에서 갚았습니다. 빚을 갚고 나니 이제는 아주 홀가분합니다. 그동안 내 치료비로 사중에 신세를 졌다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힙니다.”

청빈, 선택한 가난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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