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을 믿고 하나하나 다가오는 대로 끊으려 하지 말고 녹여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가 어떻게 돼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거를 위에서부터 내려서, 우리가 지금 현대의 시점에서 용어나 모든 것은 자세히 모르지만 현대적으로 알 수 있어야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때 시절에 말씀해 놓으신 것이 뜻이 다 같고 법도 다 같고, 우리 살아나가는 것도 부처님 법이 아니고는 없습니다. 그런 관계상 현재에 그것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는 겁니다.

얽히고설킨 인연줄은 끊으려 하면 절대로 끊어지지 않아.
둘로 본다면 끊어지지 않을 것이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녹아 버릴 것이다 이거야, 모든 게

우리는 듣지 않고 먹어 보지 않고 보지 않는다면 생각조차도 나지 않는 겁니다. 일으킬 수도 없는 겁니다. 그리고 행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것이 본래 그대로가 참선이라는 거, 이것이 바로 응용되고 감응이 되고, 우리는 항상 부지런히 뛰면서도 참선을 한다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앉았다 하는 것도 아니고 섰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앉고 서는 건 자동적으로 자유자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으로써 이 지구라는 자체도, 반복해서 자세히 좀 거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근본 자체의 불성이나 지구의 근본 자리 그 자리가, 자석으로서 뭉쳐진 그 한 덩어리가 소천세계, 중천세계에서부터, 즉 말하자면 떨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면 소천, 상천, 중천인데 이게 지금 중천 우주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천세계 이 모두가 몇 번째…, 지금 내가 임신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이 뜻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물질로 보는 거하고 물질로 움죽거리는 거하고 무(無)의, 사무(四無)의 자동 능력으로 이것이 움죽거리는 거하고….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여러분이 집을 지으려면 내가 이걸 짓겠다 하는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그 짓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설계를 합니다. 설계를 했으면 바로 집을 짓게끔 들어가는 것이 세 다리를 거쳐서 집이 되는 겁니다. 집을 짓겠다고 하고 완성해 놓는 데는 네 다리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지구의 근본 자체가 이렇게 덩어리가 하나 있다면 무중력 상태에서 세파를 거치면서 돌아서, 이게 돌 자석이기 때문에, 자석이라는 건 뭘 뜻하느냐 하면 금석과 더불어 이 철근이 전부 한데 합쳐져서 구워져 가지곤 다시 됐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여기에 붙어 돌아가는 문제도 역시, 그게 한데 붙어서 거기에서는 근본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이런 문젭니다. 그러면 그 근본의 문제…, 근본은 즉 말하자면 사무, 자동력. 부동력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사무 부동력, 사유 부동력, 이것이 한데 합쳐진 바로 ‘심력’이라고 봅니다.

그건 왜? 이것이 부동력이기 때문에, 지금 얘기한 대로 한, 이 생각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지 죽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다 갖춰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동력이라고 했고 무 부동력이라고 했고, 사유 부동력, 이것은 발전을 하려는 그런 계시가 지금 있는 것이죠. 이것을 능히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양면을 다 가지고 부동해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바로 한 계단 없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 지구 상태가 그렇게 생겼습니다. 우리 인간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요 근본 자릴 놔 놓고선 요기 하나 둘, 삼겹살처럼. 그러면 왜 삼 겹 살이라고 얘길 했는가? 요기는 철이 들었다면 요기는 바로 동해서 같이 이것이, 즉 말하자면 금속이 들었고, 금속이 아니라 금속과 금속, 이것이 보통 같이 이렇게 있는가 하면 세세히 이렇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세히 들어 있는데 이 세 층 가운데에 세 개의 계층이 이렇게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 자체가 삼 겹 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 겹 살은 삼 겹 살인데 바로 자기한테 삼 겹 살이 다 붙어 있다는 얘기죠. 근본처에 다 붙어 있다는 얘깁니다. 근데 이 삼 겹 살에서 무엇을 운영하느냐는 얘깁니다.

이것이 일 단계에서는 그 근본에서 떠나서, 전자 자동력, 즉 말하자면 전자 자동기 또는 무전통신기, 지금 현대 말로. 이 무전통신기하고 전자 자동기하고 이것이 한데 합쳐서, 여기도 사무 사유가 들어갑니다마는 이것을 포함해서, 즉 말하자면 오동, 력이라고 해도 됩니다, 오동력. 동, 한데 합쳐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나는 시체 이름도 모르지만, 이 이름도 저 이름도 다 떠나서 우리가 이해만 하면 돼요. 오동 자동기. 자동력! 그럼 오동 자동력이라면 그냥 그렇게 같이 합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다음 단계 이것은, 즉 말하자면 자력, 각이라고 할까? 자동력은 언제나 거기 떠나지 않아요, 어디든지. 또는 정각, 력. 즉 말하자면 ‘정각력’ 하는 건 똑바로 인도하는 그런 이치죠? 정각력, 천안력, 천이력, 또는 타심력, 숙명력, 신족력을 거기에서 통력을 해 가지고 가는 것이 바로 이 단계. 근본을 놔두고 일 단계, 여기 이 단계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력을 가지고 통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다음 단계는, 내가 어저께 뱃가죽같이 그렇다고 그랬죠? 아주 가죽이 그렇게 두껍다 이런 말을 했죠. 그러면 그 단계에서는 촉각, 즉 말하자면 지각으로부터 촉각으로부터 감각으로부터 또는 식각으로부터 또는 청각, 아니 저, 뭡니까. 자꾸 말하다가도 잊어버려서. 내가 뭐라 그랬죠? 지각, 감각, 촉각, 식각, 청각, 이 청각이라는 건 아주 초를 다투어서 여부없이 깨끗하게, 우리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것을 깨끗하게 정리한다는 얘깁니다.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거론되고 돌아가죠.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거론되는데, 여기에서 이 다섯 가지의 문제로 인해서 지각적으로 이게 통합이 되는 겁니다, 지각으로. 통합이 돼서 이것을 발휘하는 데는 들이고 내고 하는 능력만 자석으로서 돼 있는 게 아니라, 아까 처음에 일 단계에서 얘기했듯이 거기는 자동 무전기, 전자 자동기, 참! 자꾸 말이 헤매 가네. 그리고 무전통신기, 이것이 붙어 돌아갑니다. 이건 처음이나 여기나 똑같이 돌아가면서 행하는 거니까 이것이 같이 돌아가면서 이 위에서 맨 밑으로 내려옵니다. 일 단계로 내려옵니다.

일 단계에서 이 근본에게 자꾸 이것이, 즉 말하자면 하루에, 우리가 일 초에 한 번이라고 한다면 백 년이 될 수도 있고 천 년이 될 수도 있고, 삼백 년이 될 수도 있고 삼천 년이 될 수도 있고, 삼만 년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비벼 돌아갑니다. 한번 탁 쳤다 하면 이것은, 즉 말하자면 자동기로서, 전자 자동기로서 이것이 불이 나게 돼 있습니다. 불이 나게 되면 여기에서 공급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온통 이것이 그냥, 그 뜨거운 불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불덩어리죠.

그러면 그 온기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층이 이렇게 삼 층이 있다면 그리로, 요새 우리 저 아래서 기름을 때는데 밑에서 때면 위층까지 올라가죠? 허허허…. 그런데 그거와 같은데도, 그거와는 조금 달리, 여기에서 비벼서 큰 불덩어리가 이글이글한 그것이 피게 되면 공기라는 그 자체가 오른단 말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기서 전자 자동기로서 또는 무전통신기로서 그 역할을 하는 거야. 이것이 그 역할을 해서, 즉 말하자면 동맥 정맥이 오르고 내리듯이 올리면, 언제든지 뜨거운 걸 올리면 찬 게 내려오고 또 찬 것이 뜨겁게 돼서 올라가면 또 찬 게 내려오고, 정맥 동맥이 오르고 내리듯 그렇게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올리고 내리고 하기 때문에 위층 옥상에서 사는 사람도 생명을 이루고 이렇게 움죽거리고 살 수 있게끔 되는 원인이 생겼다 이겁니다.

그리고 그 맨 끄트머리에 아까 지각으로부터 그렇게 모든 것을 조립해서 나갈 수 있다 하는 것은, 즉 말하자면 거기에서 오르는 압력 때문에 그 위에서는 누르지 않고는 안 된다 이거야. 너무 이렇게 발산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지금 살고 있는 이 마음 자체의 능력, 그리고 또 무중력으로서 우리는 근본을 가지고 있고, 또는 이 땅이 생긴 원인, 물이 생긴 원인 그런 것도 다…. 거기에서 우리 이런 거를 한번 예를 들어서 얘기해 보죠. 퇴비를 재는데 속에서는 뜨겁게 삭아서 가스가 나오지만 겉으로는 그게 삭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삭지 않는 것은 삭지 않는 것대로 위에 그냥 있다는 얘기죠. 속에서만 그렇게 되지. 그러면 속에서 또 발산돼서 나오는 원인이, 이 흙이 몰쳐졌다는 얘깁니다. 몰쳐지고 물이 생기고 이렇게 되니까 이것을 끌고 돌아가는 자동기는 어떠한 점에서 돌아갈까?

어저께도 얘기했죠? 물이 우리 겉껍데기의 뱃가죽 같다고요. 그러면 안에서 나오는 그 압력으로 들여보내고도 남는 찌꺼기의, 찌꺼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겠죠. 거기에서 어떠한 알른알른한, 즉 말하자면 자석의 풀잎이라고 할까. 하여튼 바나나 껍질 이렇게 해 놓은 것처럼 모두가 그런 알른알른한 어떠한, 이름을 그냥 자석풀이라고 할게요. 위에 그 압력으로 인해서 생기는 자석풀이 된단 말이에요.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위에서 지금 사는 거예요. 그럼 우린 옥상 위에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저 별을 볼 수가 있고 모두가 있는 거예요.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어떠한 압력으로 인해서 여기에서 어떠한 부동한 뭐가 ‘아, 이건 이것대로 하지.’ 하다가 잘못되죠,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것도. 그러면 자동기가, 이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면서도 자기 마음이, 즉 말하자면 서로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충돌이 돼 가지고 일어나듯이 이거는 충돌이 돼 가지고 화산 같은 이런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충돌이 되면 거죽 바깥으로 막 나오죠. 거죽 바깥으로 나와 가지고 아주 피해를 많이 줬지만 그것으로 여러 가지 응용을 하고 있죠. 그게 화산으로 나와 가지고 모든 산을 만들고 또 산을 만드는 반면에 물로다가 또 그냥 장판을 하게 되죠. 그게 인제 오르니까, 화산이 오르니까 구름이 되고 물이 되고 또 증발되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또 깎여 내리고 또 뭉개지고 이럭하다 보니까 물로도 쓸리고 그냥 여러 가지로 세파를 헤쳐 가면서 모래도 생기고 자갈도 생기고 또는 밑의 생명도 생기고 이 모두가, 지금 이 땅덩어리가 이렇게 생긴 것도 바로 그 위에 떠 있단 말입니다, 응? 그게 만약에 압력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떠 있을 수가 없어요. 그 공기에 의해서, 우리는 공기를 지금 그렇게 누르고 있는 폭이나 마찬가진데, 저절로 거기의 압력이 올라가선 내리눌리는데도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은, 그게 없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이렇게 자유자재할 수가 없거든. 이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얼마나 묘하냐는 얘깁니다.

이 묘법을 팔만대장경에다 그렇게 실어 놨건만 우리는 도대체 학술로만 경력을 쌓으려고 합니다. 계율이 청정하다 하는 것은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작고 크고, 또는 모든 게 하나도 없는 자리에서 평등이요, 진리요, 이것이 청정한 법이라는 거지, 더럽고 깨끗하고, 웃고 즐기고 또는 아주 괴롭고 하는 데서 이것이 갈라져서 청정한 거라고 한 건 아니거든. 자비라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 이 깨끗하고 더러운 걸 한데 합쳐 가지고 이게 자비라. 웃고 눈물 흘리고 하는 거를 한꺼번에 합쳐서 이게 자비지, 자비라는 것이 내가 웃고 즐기고 좋고 잘해 주고 이러는 것만이 자비가 아니다 이거야. 죽이고 살리는 게 전부 자비야. 근본으로 따지게 되면 조금도 어긋나는 점이 없죠.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살면서 저 하늘을 쳐다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이렇게도 할 수 있는 원인이 바로 그렇게 복잡하게 있으면서도, 큰 지구 덩어리가 그렇게 복잡하게 있는데 우리 이 몸, 이 자체가 또 복잡하지 않습니까? 우리 살아나가는 한 가정도 복잡하지마는, 세계적으로도 복잡하지마는 국내적으로도 복잡하다. 사회적으로도 모든 게 복잡하다. 이 복잡한 원인들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원인이 어딨느냐는 얘깁니다.

그러니 이거 심각하지 않게 그냥 그저 살았으니까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뭐, 이렇게 하는 거지.’ 이렇게 생각들 하시고 아무렇게나 자기를 망각하고 산다면 절대 이거는 자기 본분을 지키지 못하며 자기 몸뚱이를 자유롭게 끌고 다니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남의 몸뚱이도 건져 줄 수 없고, 세 치를 몰라서 말입니다. 우리가 남의 일을 보고 물질적으로 도와주긴 해도, 그것이 자비라고? 천만의 말씀이야! 무주상 보시를 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있어야 자비지, 그 준 것은 그저 보시 정도로, 우리가 사회적인 문제에서 이런 거는 무주상 보시가 아니라 보시야, 그냥. 그래서 대가는 받을지언정, 복은 받을지언정 이 공 도리의 뜻은, 전체 그건 까마득한 거라.

그러니 여러분의 본분 자체가 있기 때문에, 작년 콩씨를 올봄에 심었더니 콩나무로 화했더라. 콩나무로 화했더니 그 어리석은 콩나무는 바로 저한테 달린 콩씨가 있는 걸 모르고 작년 콩씨를 찾더라. 세상에 이렇게 화해서 돌아가는 이치를…. 그래서 거기에 근본이 있기 때문에 뭐든지 여기 단계 단계 올라와서 우리가 이렇게 육지에서 사는데, 때로는 이런 문제들이 많죠.

화산 같은 게 일어나지 않고도 무기적 무기적 무기적 해 가지고 어느 때인가는 탁 터지면서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고 들이 되고 이렇게 바꿔지는 때가 있죠. 이럭할 때는 수십 명, 수만 명이 그냥 땅이 갈라지는 대로 들어가는 거야. 이래도 여러분이 자기를 망각하겠습니까?

우리 스님네들은 예를 들어서 한 번 머리 깎고 입산할 때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불사릅니다. “불사르고” 하는 뜻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자석과 같은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에 의해서 애정을 끊지 못하고 착을 끊지 못해서 입산을 못 하는데 그 애정과 착을 다 떨어 버리고서 입산을 할 때는 첫 단계의 입산이라. 초발심에서 생기는 그 입산으로서 나왔으니 ‘어린애가 머리를 깎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손히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당장 머리 깎고 들어오라면 아마 그것도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네들은 거기에 머무를 게 아니라 또 거기에서 한층 더 나아가서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지도 말고 위로 올려놓지도 말고 중도에서 항상 겸손하고 따뜻하고, 봄날이라야 됩니다. 봄이라야 꽃이 피지 봄이 아니고 겨울이라면, 어느 때는 금방 변덕이 나서 봄이 됐다가 어느 때는 금방 겨울이 되고 이런다면 그것은 가치를 잃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배우면서 생활을 편안히 하는 분들은 참 아주 편안하면서도 자동적으로 돌아가는데 그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양반들은 좋아하고 그 뜻을 모르는 분들은 “아이고, 이거 뭘 우리가 알아야지. 뭐 어떻게 돼 돌아가는 건지,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이러거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그 소리가 어디서부터 나오느냐 이거야. 어디서부터 나오기에 그러느냐 이거야. 그걸 자기 안으로 한번 되새겨 보라 이거야. 망종으로서 살기도 하고, 잘 살고 웃고 즐기고 괴롭고 이랬던 그 모든 게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하나하나 우리는 그냥 과감히 나갈 수가 있어야지, 점차적으로. 그래서 점차가 있어요. 점차적으로 다 용광로에다 넣듯이, 자기를 자기가 믿고,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가오는 대로, 머리의 망상을 끊으려고 하지 말고 녹여라 이거야. 끊으려고 하면 끊어지나? 인연줄이 끊어져, 그게? 얽히고설킨 인연줄은 절대로 끊으려고 하면 끊어지지 않아. 둘로 본다면 끊어지지 않을 것이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녹아 버릴 것이다 이거야, 모든 게.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오온이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자동적으로 됐을 때에 비로소 거기에서 대의정이 날 수도 있는 거야. 내가 탄생이 된 뒤에야 그때 정말 공부할 수 있는 그 길이 있는 거라. 그래서 공부를 할 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배 속에 있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금방 어른이 되는 건 아니거든. 그래서 견성이라는 게 죽음에 의해서야 견성이 된다. 그러면 견성이라는 건 ‘한 번 죽기 어려워라 했더니 두 번 죽기 더 어렵더라.’ 이런 뜻, 이것을 다시 한번 새겨 보시도록 해 보세요.

우리가 한 번 죽기 어려워라 했더니, 나 혼자 깨달을 때는 쥐고 갈 수 있는 지팡이라도 있어서 좋았는데 깨닫고 보니까, 낳아 놓고 보니깐 지팡이도 없어졌더라. 참 이렇게 허망하니 이게 돌면서 참 힘드는 거죠. 그래서 같이 죽기 어렵더라. 이 세상만사 일체 만물과 더불어, 나와 더불어 같이 죽기 어렵더라. 이것을 같이 죽기 위해서 하나하나 점차적으로 보림을 하면서 체험을 하면서 돌아가면서, 자꾸 놓으면서 보림을 하는 거라.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도 그러고 달마 대사께서도 그러고 모든 스님네들이 깨쳐 가지고도 보림하는 데에 몇 년이 걸려도, 몇 년이라는 말 없이 그냥 그대로 여여하게 걸었으면서도 체험을 하면서 보림을 했더라는 얘기예요.

여러분이 이 뜻을 모른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다는, 인간이라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삶의 뜻을 모르고 세세생생에 끄달리면서, 그 인연줄에 얽매이면서 유전과 또는 악령과 세균과 모든 것이 달려드는 대로 육체로는 그런 부담을 가지면서, 내가 집주인이 없으니 어찌 그걸 막을 수 있겠느냐 이거야. 녹이려야 녹일 수가 있나 막으려야 막을 수가 있나. 눈에 보여야 막지. 들려야 막지, 응? 모든 게 이렇게 돌아가고 눈이 컴컴해서 암흑이니 어디가 좋은 줄 알고 어떻게 내가 갈 수 있나?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가야 할 텐데 아, 캄캄하고 암흑이거든. 어떻게 가느냐 말이야. 지금 암흑인 사람은 요다음에도 암흑이지. 지금 눈이 뜨여야 요다음에도 눈이 있는 거지, 지금 눈이 멀었는데 어떻게 눈이 떠질 수가 있을까? 몸을 벗었다고 해서, 죽었다고 해서 그게 눈이 떠질 수가 있을까?

(녹음 안됨) … 우리가 방생이다, 또 떡을 놓고 밥을 놓고 비는 것만 알아서는 절대로 안 돼. 부처님 법당에 들르면 그 부처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닐지언대 그리로 한데 뭉쳐서, 한데 합쳐서 ‘주인공!’ 해도 좋고, 이 삼라대천세계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아예 나한테로 부처님을 끌어당겨서 하나로 또 ‘주인공!’ 해도 좋고, 이건 자유자재라! 그래서 삼배를 부처님한테 올려도 그것이 자삼보한테 올리는 거지 누구한테 올리는 게 아니다 이거야. 자부처한테 올리는 거다 이거야. 그런데 누가 받았다고 ‘내가 절했지.’ 이런 위세를 부리고 ‘내가 시주했지.’ 이런 위세나 부리고 ‘내가 얼마 했는데 이렇게 안 돼?’ 안 되는 것도 되는 것도 자기 뿌리만 싱싱하다면 가지도 이파리도 다 싱싱할 것을 왜, 누구한테다 해 달라 하느냐 말이야.

물론 그 한 점의 마음 속에 전부 우주 삼천대천세계 일체 만물만생이, 유생 무생이 다 들어 있고 가깝게 있기 때문에 내가 딴 데로 갈 필요가 없단 얘기야. 그렇다고 해서 불법을 믿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절에 가되 그럴수록 더 예의는 갖추어야 하고 그럴수록 받들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위로 모시라는 게 아니야. 위로 모시게 되면 언제나 버릴 때도 있지만 ‘내 몸과 둘이 아니다. 내 마음과 둘이 아니다. 내 아픔과 둘이 아니다. 모든 것이 나와 둘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때 저절로 섬기는 마음이 생기고 저절로 지혜가 생기고 저절로 그 정법의 이치를 알게 되고, 자비가 스스로 나오고 무주상 보시가 스스로 나오고…. 이것은 공의 이치를 생동력 있게, 우리가 ‘삶의 보람이 바로 이거로구나.’ 하고 알게끔 되는 것이라 이겁니다.

모두가 이 세상에 나왔다가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인간으로 나와서 그 뜻을 모르고 우리가 어떻게 부처님 제자라고 하며 어찌 인간이라고 하며, 자연 시대에서 인간으로서, 일등 동물로서의 활약을 한다고 말을 하겠습니까? 하면서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도반들끼리 토론을 하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내가 몰라 주는 것이 의당히 겸손입니다. 모르는 사람 앞에는 나도 모르고, 아는 사람 앞에는 나도 동등하게 알고, 아주 무지하게 모르는 사람에게 나도 무지하고, 꽃이라면 꽃이 내가 돼 주고 뱀이라면 뱀이 내가 돼 주고, 또는 짐승이라면 짐승이 내가 돼 주고 또 내가 짐승이 돼 주고, 모든 게 하나하나 미생물에서부터 나 아님이 없이 그렇게 됐을 때 비로소 이것은 보살행이며 또는 세존의 자리라고 합니다. 이 모두를 모습을 가지고 논의하지 말고 그 아리따운 마음을 가지고 봄날을 기대하면서 오늘 이걸로써 그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3월 10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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