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아픔 함께한 고려·조선 醫僧

‘고려사 열전’ 등에 醫僧 기록 확인
당송부터 아라비아 의술까지 다룬
전문 승려 집단 존재했음을 의미해
국가적 ‘대비원’ 대부분 승려가 운영

민간 숙박기관으로서 역할도 담당
봉선홍경사, 제비원 등 흔적 남아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 부르는 ‘안동이천동마애불입상(安東泥川洞磨崖佛立像)’의 모습. 제비원은 연미사와 함께 나그네의 쉼터로 활용됐지만, 조선시대 폐사됐다.

고려 그리고 조선의 醫僧
바이러스 하나로 세상이 시끌시끌하다.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하고 찾아보는 건 공연(空然)하다. 다 좋은 말씀만 하셨고, 다 가슴에 새겨둘 말씀만 하셨다. 이런 일은 평소에 하는 게 좋다. 이럴 때 살펴볼 건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행동’했는가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고려시대부터 활발했던 ‘의승(醫僧)’의 활약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의승(義僧)은 기억하지만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던 의승(醫僧)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고려사 열전〉 ‘홍융’ 편에는 충혜왕이 홍융과 사별한 여인 황씨(黃氏)와 관계를 한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충혜왕에게는 임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관계한 모든 여인들이 그 병에 걸렸다. 황 씨 역시 그런 처지가 되자 충혜왕은 “의승(醫僧) 복산(福山)에게 치료할 것을 명령하였다.”

〈열전〉 ‘조간’ 편에도 의승(醫僧)이 등장한다. 조간이 “악성 종기가 발생하여 어디까지가 어깨이고 목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자 어떤 의승이 “종기는 뼈에 뿌리가 있으므로 뼈가 당연히 절반은 썩었을 것이고, 긁어내어 없애지 않으면 고치지 못합니다. 다만 참지 못하실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그냥 의술에 뛰어난 승려가 있다고 묘사한 것이 아니라 모두 의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회적이거나 단속적인 것이 아니라 의료를 시행하는 어떤 ‘집단’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려시대 의원이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거 등 국가가 직접 의사를 키우는 방법이다. 과거가 시행된 첫해인 958년(광종9년)에 의업(醫業)은 당당 과거시험의 정규 직군이었다. 국가가 관여하는 방법 외에는 대부분 도제식 교육이었다. 기술이 있는 사람 밑에서 몇 년이고 수업을 받아가며 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의술에 대한 도제식 교육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바로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의술은 당송 의학뿐 아니라 인도 의학, 아라비아 의학 등도 수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사찰만큼 이런 교육이 제대로 될 수 있는 조건이 있던 곳도 없었을 것이다.

의승(醫僧)에 대한 기록은 고려를 넘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억불의 시대였지만 도제식 교육은 이어졌을 것이다. 또 조선에서는 비록 천한 취급을 받았지만 한증승(汗蒸僧, 사우나와 비슷한 원리로 병자를 치료하던 시설인 한증소에서 일하던 승려)이나 매골승(埋骨僧, 시체 처리를 담당하는 승려)도 있었다. 의학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나 ‘전통’이 없었다면 이런 일을 맡는 것 역시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의승들은 주로 어디에서 활동했을까? 주목해 볼 만한 시설로 대비원(大悲院)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백성들의 구휼과 환자 치료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의 자비 사상을 세상에 실천하기 위한 장소다. 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운영은 스님들 몫이었다. 의료에 대한 지식이 있는 스님들이 있지 않고서는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원(院)이라는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비원은 비록 사찰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사찰에서 원(院)을 운영하며 백성들의 구휼과 치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기능은 숙박이었다.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기비(天安奉先弘慶寺碣記碑)’. 고려 현종 때 세워졌으며 봉선홍경사의 창건 기록이 담겼다.

교통 요지면서 인적 드문 곳
우선 고려 시대 숙박 기설을 살펴보자. 고려시대 숙박 시설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참역(站驛, 역참)은 관리에게 숙박을 제공하던 곳이다. 고려 시대에는 전국의 주요도로 22곳에 525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객관(客館)도 있었다. 외국 사신을 위한 숙박 시설이다. 많지는 않았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원(院)이다. 원은 일반인도 숙박을 할 수 있었던 곳이다.
대부분 원(院)은 민가와는 조금 먼, 그러나 교통의 요지에 들어서 있다. 교통 요지니 지나가던 길에 머물 곳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 민가가 많지 않은 지역이니 원에 머물면 도적떼의 출몰로부터 보호 받을 수도 있었다.

뚜렷한 기록과 유물이 남아 있고 또 당시 상황을 유추도 해 볼 수 있는 사찰 셋을 살펴보자. 하나는 천안의 봉선홍경사다. 고려 현종 17년(1026) 때 만들어진 이 사찰은 호남과 한양을 잇는 교통 요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사찰 창건 전까지는 인가는 멀고 갈대숲이 우거진 지역이었다고 한다. 강도도 자주 출몰했다. 이에 현종은 절을 짓고 숙소도 세워 불법도 펼치고 길가는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라는 명을 내린다. 절은 봉선홍경사가 되었고 그 옆에 딸린 숙소는 광연통화원(廣綠通化院)이 되었다. 절은 200간 규모였고 객사는 80간이었다고 전한다. 물론 모든 관리는 절에 사는 스님들이 담당했다.

봉선홍경사 터에는 아직도 현종이 세운 갈기비(碣記碑)가 남아 있는데 내용 중에는 “본디 사찰을 건립하는 이유는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서지만, 나그네의 숙소로 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대목이 있는 걸로 봐서 사찰에 숙박 기능을 하는 건물을 따로 뒀던 건 당시로는 흔한 경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국가적 지원’으로 만들어진 원(院)도 있었지만 ‘민간’의 힘이 더욱 들어간 곳도 있었다. 하늘재에 위치한 미륵대원이다. 하늘재는 현재 문경시와 충주시를 잇는 고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 초인 156년 아달라이사금왕의 북진을 위해 하늘재를 개척했으며 죽령 옛길보다 2년 앞서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고갯길이었던 셈이다. 또 이 고개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오가는 고갯길 중 가장 낮다. 

그런데 하늘재를 주로 이용한 사람들은 ‘상인’이었다. 특산물을 지고 다니며 전국을 떠돌던 상인들이 고개를 넘거나 넘기 전에 주로 이용했다. 원래 숙박시설이 먼저 있고 현재 남아 있는 불상 등은 나중에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시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추정도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그런데 ‘사찰’만이 목적이었다면 민가가 없는 이런 외딴 곳에 그리고 굳이 북향을 하면서까지 지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백두대간에서 최초로 열린 길이고, 새재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영남에서 충청도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만큼 원의 규모는 상당했다.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가끔 사료에 사찰에서 고기를 굽거나 술을 빚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숙박’ 기능과 무관하지 않다. ‘투숙객’을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하튼 임진왜란 이후에 새재가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하늘재 옛길도 폐사되었고 자연스레 미륵사, 미륵대원도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제비원도 주목해 볼 만하다. 제비원의 경우는 안동을 벗어나 충청도나 서울로 방향을 잡고자 한다면 반드시 넘어가야 했던 길이다. 물론 거꾸로 갈 때도 마찬가지로 꼭 넘어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석불상이 고갯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원래 연미사라는 절과 함께 따로 제비원이라는 원(院)을 두었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둘 다 조선시대 폐사되었다.

조선시대 역시 초기에는 국가 차원에서 원(院)이라는 형태를 유지했으나 이후 주막 등 민간 시설이 원의 역할을 대신했다. 현재 제비원 석불상 옆에는 다시 연미사가 세워져 신도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세 곳 외에 최근 가장 화제가 되었던 곳은 바로 파주의 혜음원지다. 개경에서 남경(서울)으로 오는 주요 통로 중 한 곳이었던 이곳은 대규모 숙박시설 터가 발견됐다. 왕의 행차 등에 사용했던 곳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원(院)은 이렇게 숙박 기능뿐 아니라 앞에서 언급했던 의료기관으로 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필요한 경우 곡식도 풀었다. 고려시대 사찰 재정은 당연히 조선 시대보다 넉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 외에도 대부분 원(院)을 운영하는 사찰은 국가에서 따로 토지를 하사 받고 운영되는 곳이 많았다. ‘공익’을 위한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도 국가에서는 ‘종교인’에 대해서는 과세하지만 ‘종교 활동’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는다. ‘의무’를 하나 줄여준 셈이다. 그렇다고 모두 끝난 건 아니다.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고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면 덜어준 ‘의무’만큼 더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