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축구법승 행각 되새기다

베제크릭 천불동 곳곳에 훼손
서구 열강·이교도 훼불 확인해
사막 바람소리엔 무상함만이…

일연 스님의 저서 〈삼국유사〉 ‘귀축제사조(歸竺諸師條)’에서 “외로운 배 달빛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따라 한 석장(錫杖)도 돌아오지 못했네”라고 찬(讚)했다. 이렇듯 천축구법승이 그리 많았건만 다시 고국 땅을 밟은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들을 끊임없이 천축으로의 구법여행을 떠나게 하였을까? 오직 진리를 향한 구도열정과 보살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에 “사하(沙河:고비사막)에는 원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가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이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 수가 없고, 오직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죽은 사람의 고골(枯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라고 했다. 지금 우리도 이 길 위에서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리다.

투르판(吐魯番)은 한나라부터 당나라 시대의 유적인 고창고성과 교하고성, 이스타나 고분이 있고, 서유기의 전설이 남아있는 화염산과 베제클릭 천불동 등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옛날 현장법사가 이곳 고창국(高昌國)에 들러 머무르기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은 천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오는 지하수로인 카레즈 관개시설과 그 물로 기른 질 좋은 포도로도 유명한 곳이다.

고창고성을 둘러보고는 입구의 나무그늘 아래 위구르 회족(回族) 청년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 광경을 보고 대중 스님들이 누가 진짜 이슬람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놀려댄다. 세상 어느 곳을 가도 그 나라 사람과 비슷한 이 미친 존재감을 어찌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심지어 몇 명의 스님들은 내 모자에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진 지폐를 내게 적선(?)하기까지 한다.

베제크릭 천불동 가는 길에 마치 붉은 화염이 치솟는 듯 한 화염산(火焰山)이 석양빛에 불타오르는 듯 하다. 중국 명나라 때의 오승은의 장편소설 〈서유기(西遊記)〉를 중국관영 CCTV가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 때에 이곳 화염산에서 촬영을 한 까닭에 지금도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의 조각상이 남아있다.

베제크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의미이다. 사실 이 57개의 석굴 안에는 아름다운 소조 조각과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벽화들이 긁힌 자국 투성이에다 떼어간 자국들로 인해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일명 ‘실크로드의 악마’들로 불리는 독일의 르콕, 일본의 오오타니, 러시아의 올젠버그, 영국의 스타인 등이 소조불상이나 벽화들을 마구 절취해가서 현재는 세계도처를 유랑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벽화 단편이 몇 점 보관되어 있는데. 오오타니가 훔쳐간 것을 누군가 광산채굴권을 따내려 조선총독부에 뇌물로 주었고, 해방 후 국가로 귀속되었다고 한다.

그 아름답던 베제크릭 석굴은 폐허가 된 채 양이나 염소의 짐승우리로 사용되며 황폐화 되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일으킨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 있는 벽화를 대통령 순방 시 중국에 반환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우리가 훔쳐온 것도 아니고 장물을 잠시 보관했을 뿐이니 그리 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양심에 가책을 느껴 반환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베제크릭 석굴을 둘러본 후에 잠시 모여 예불을 올리고는 모두 좌선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게했다. 그야말로 흙구덩이인지라 투덜대는데 설정 스님께서 먼저 신발을 벋고 좌정하니 모두들 별말 없이 따라 앉는다. 그리고 20여 분간 정좌한 채 사막의 흙먼지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마치 실크로드의 역사와 천축구법승의 여정, 그리고 김구경 박사와 한락연 미술가로 인해 마치 한 생을 다 살아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입정이 끝난 뒤에 설정 스님은 베제크릭 석굴의 도굴역사와 의미에 대해 감동적인 법문이 이어졌다. 모두들 감동해 흐느끼는 듯한 속울음이 들려온다. 천축구법승의 구법행각과 수행자의 삶에 대한 스님의 고구정녕한 사자후에 온 대중이 감격과 희열에 젖어 새로운 신심과 원력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해질녘 시내의 포도농장에 들러 건포도 등을 맛보며 선물로 샀다. 집 앞에는 동네 아이들이 신기한 듯이 몰려와 장사진을 이룬다. 그중에 어린 동생을 자신의 허리에 매달고 온 소녀의 눈동자가 맑고 아름답기만 하다. 이 아이들이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기를 마음 속 깊이 빌고 또 빌어본다. 저녁에는 시내 공원에 나가 풍등을 하늘로 띄우며 소원을 빌었다. 불붙은 풍등이 하늘로 날아올라 마치 북두칠성처럼 반짝이며 유영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우리 일행은 위구르 자치구의 성도인 우루무치에 다다랐다. 시내 한 복판의 바자르(시장)에서 화덕에 구운 만두와 볶음밥 등을 사 먹고는 근처의 우루무치 천지(天池)로 향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천지를 닮은 듯한 모습의 천지에는 설산이 호수에 비춰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서 공안과 협상을 해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천을 매달고 ‘세월호 희생자 추모제’를 봉행하였다. 특히 순례 중 실크로드 회화와 벽화를 설명한 유근자 교수가 이번에 조카를 잃었다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부디 미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우리 아이들이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저 하늘에서는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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