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마음을 넓게 쓰고 한 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질문 보왕삼매론에도 “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으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만 육신의 병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특히 요즘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병고가 닥치더라도 두려움 없이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여러분들은 어디가 아프다 이런다면 그저 그 아픈 것만 생각하고 야단법석들을 하는데, 또 어디가 무너졌다 그러면 무너진 것만 가지고 법석들을 하는데, 지금 시급한 게 뭡니까. 그 무너짐과 병세 어떠한 문제들이 다가오는 거보다 더 시급한 게 바로 벗어나는 게 시급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병 증세나 어떠한 걸 가지고 그거를 방편을 삼아서 공부해라.” 이런 것이죠. 모든 게 자기가 지어 놓고 자기가 모든 거를, 인과성이나 유전성이나 다 자기가 가져 있는 거니깐 ‘너만이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러곤 다 버리라니깐 안 버리고 오히려 그냥 그거 낫게 하는 것만 가지고 야단이거든요. 하나가 없어지면 둘 셋이 다 없어지는데 말입니다.

자기 뿌리에 몽땅 다 달려 있는데
싹이 무슨 걱정입니까.
바람이 부니 걱정입니까, 비가 오니 걱정입니까.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병고에 대한 두려움 극복하고 싶어요

부처님께서 약사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다 지장보살이다, 왜 이름을 내놨겠습니까? 그 관리인들의 이름은 이름일 뿐이지, 여러분들도 다 거기다 한데 합쳐 놓으면 보살이나 중생이나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모든 게 부처와 둘이 아니로 되는 거다. 둘이 아닌 까닭에 의식들의 그 인과성도 병 증세도 그냥 없어지는 거죠. 그런데 먼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병부터 생각하니까, 나빠진 것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인생은 짧고 벗어나기는 긴데 어떻게 이것을 처리해야 하느냐. 그 처리는 한생각밖에는 없습니다, 한생각! 이렇게 살아도 한 인생, 저렇게 살아도 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떻습니까?

가만히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말입니다, 모두 사람들이 우글우글해도 사람이라고 곤충하고 뭐 다른 게 있으며 벌레하고 뭐 다른 게 있으며 짐승하고 뭐 다른 게 있느냐. 모습만 천차만별로 다를 뿐이다. 모두 이 몸 자체 속에다가 곤충을 넣어 놓고 그것이 제가끔들 돌아서 제가끔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사람들이 이러고 사니까 그것마저 쫓아서 그렇게 하고 살다 보니깐 못된 병이 생기고 그러는 거죠. 벌써 곤충들이 싸움이 나서 서로 잡아 죽이면 죽이는 쪽이 그냥 굳어지는 것이죠. 이러한 사태를 모두 알고 이걸 대치를 해서 지내면서, 사는 것도 좀 유유하게 좀 편리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마음의 조작이지 육체의 조작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육체는 움죽거리게 돼 있으니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태어나기 이전의 자기를 무시하는 거예요. 태어나기 이전 자기는 정신계의 자기고, 정신계의 자기가 지금 현실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를 형성시켜서 놓은 자체거든요. 그런데 자기 나무가 자기 뿌리를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병이 낫고 안 낫고 일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거는 자기한테 그대로 보배로서 있는 건데, 그거를 진짜 알아서 우리가 둘 아닌 도리, 내가 항상 말씀드리는 그거를 알고 ‘낫게 하든지 낫지 않게 하든지,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할 수 있지 않아. 지켜 주는 것도 너고, 이끌어 주는 것도 너고, 해결사도 너고, 죽이는 것도 너고 살리는 것도 너야. 너만이야. 너만이 있어. 너만이 함이 없이 할 수 있고, 너만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게 할 수 있고….’ 지금 보이는 나와 안 보이는 너가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내가 보이면 자기도 보이고 내가 안 보이면 자기도 안 보이고, 이렇게 돼 있는 건데 그렇게 밀접하게 돼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이거는 어떤 때 들어 보면 아주 얼토당토않은 그런 말씀들을 하거든요.

어떤 분은 어디가 어떻다고 어떻다고, 이렇게 그냥 치명적인 말을 병원에서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느냐?” 하고 물으니까 3년이나 4년 됐대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됐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어찌 그래?” 그러면 씽긋이 웃으면서 “오기는 그렇게 왔으나 몇 번 오지는 않았어요.” 이러는 겁니다.

마음공부 하는 이 도리는요, 한 번 인연을 만나는 게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렵다는 겁니다, 이 마음공부 하는 게. 이 옷 벗고 옷 속의 그 곤충의 세계를 다 벗어 버리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이 말입니다. 항상 그 보기 흉하고 그런 곤충 속에서 우리가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부처는 못 된다 하더라도, 비천상 보셨죠? 날아다니면서, 금비까빈가 은비까빈가, 그런 것처럼 그저 이것도, 이 모습으로도 됐다가 저 모습으로도 됐다가, 이거를 건지려면 이 모습으로도 되고 저거를 건지려면 저 모습으로도 되고 이렇게 해 가지고선 다 건지고 가지 않습니까.

하여튼 중요한 거는 우리가 이 몸속에 들어 있는 곤충들도 자기 모습이니까 모든 거를 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꼭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온다 하더라도 둘이 아니에요. 나는 그 참, 보이지 않는 데 어떠한 귀신이다, 어떠한 신장이다, 어떠한 뭐다 하더라도 겁 안 나는 게 뭐냐 하면 산 사람도 산 귀신이에요. 허허허. 죽은 사람은 죽은 귀신이고요. 그런데 산 귀신이 더하지 죽은 귀신이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죽은 귀신이나 산 귀신이나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귀신은 귀신끼리 해결을 하는 거죠. 항상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겨라 이런 거예요.

정신계에서 귀신같이 노는 거는 전부…, 이거 보세요. 공에다가 그냥 모두 집어넣으면, 공을 집어넣으면 뭐가 남습니까, 거기. 공에다 공을 집어넣는데 그 얼마나 빨라요, 글쎄. 사람들이 그냥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가지고 그냥…. 그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너 있으면 나 있고 나 있으면 너 있고 모두가 둘이 아닌데 말입니다. 세울 것도 없고, 찾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고, 알 것도 없고 모든 게 그런데 뭐가? 모두가 둘이 아닌데 이 컵과 컵이 둘이 아니라면 한 컵이, 자기 컵 하나가 자기 컵을 깨트리겠습니까? 마주쳐야 깨트려지지. 그걸 명심하세요.

남은 인생 잘 회향하고 싶습니다

질문 젊었을 때는 살아가는 데에 정신없어 제 인생을 살필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퇴임하고 시간이 여유가 생기니 비로소 제 인생길을 돌아보게 됩니다. 비록 살림은 좀 곤궁하겠지만 이제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서 제 남은 인생을 잘 회향하고 싶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옛날에 어느 딸이 소를 몰고 나갔어요. 근데 소를 몰고 나간 딸이 안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안 들어오니까 어머니는 부엌에서 그냥 화가 나서 발발발발 뛰는데 아버지는 그러거든요. “나갔으면 소를 다 처리했겠지, 뭘.” 하더랍니다. 그래서 딸이 들어왔는데 그냥 맨손으로 그냥 터덜터덜 들어왔어요. 그래서 “왜 소는 안 가져 왔느냐?” 그러니까 딸이 하는 소리가 “네 기둥을 매고선 네 발을 묶어 놓고 그 가운데다 불을 질러서 구워서 동네방네 사람들하고 다 구워서 잘 먹었습니다.” 이거예요.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안 가죠?

그 아버지 따라서 벌써 딸은 깨침이 있었단 얘깁니다. 그 어머니도 깨우쳐 주려고 그렇게 해도 어머니는 아둔해서 영…. 그러니깐 그냥 펄펄 뛰고 그 소를 얼마를 주고 샀는데 그 소를 갔다가 다 구워서 동네방네 사람들을 다 먹였느냐고 야단을 하죠. 그러니까 딸이 있다 하는 소리가 “나도 없고 소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데 뭘 그렇게 야단을 하십니까. 어차피 소 한 마리 가지면 동네방네가 다 먹어야, 즉 말하자면 이 세상이, 삼세가 다 먹어야 할 일인데 뭘 그렇게 걱정을 하십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엉뚱나간 소리를 하는 거죠. 그런데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현재 일심으로 돌아가니 그게 과거가 따로 있고 미래가 따로 있고 현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거 소 한 마리 가지고 다 먹였다는 게 그게 얼마나 거룩한 일입니까. 삼세를, 삼세의 모든 인연들을 다 먹였다는데. 동네방네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거죠. 왜냐? 이게 그걸 모르면 팔자 운명으로 돌아가지만 우리가 과거도 현실이고 미래도 현실이고, 현실도 공했다. 그저 마음에 따라서 육신은 움죽거리니까 어떤 거 움죽거렸을 때 내가 움죽거렸다고 할 수 없겠죠. 매사 게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반가워서 악수를 하니까 “어떤 게 먼저 가더냐.” 하니까 마음이 먼저 가더라. 그러니깐 손이 그냥, 그냥 따라서 그냥 가더라. 그러니까 몸뚱이 하나 움죽거리는 게 전체예요. 전체인데 그렇게 움죽거리는 걸 잘 리드해서, 잘 다스려서 이렇게 자기가 마음을 잘 내면 될 거를, 요만한 것도 잘 못 내고 크게 만들어선 그냥 불려 가지고는 오히려 그냥 자기가 상처가 나고 문제가 이루어지는 거죠.

여러분이 살면서 그 마음을 안유시켜서 편안하게 만들고 사는 게, 캠핑 나와서 한 철 사는 게 다 그러합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냄비가 있으면 냄비대로 솥이 있으면 솥대로 그냥 이렇게 사는 거죠, 뭐. 한 철 사는 건데. 그렇게 좀 마음을 넓게 쓰고 그렇게 한 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화에서 탤런트들이 한 철 고렇게 영화 막이 내리면 그뿐인 거를 뭐, 갈 때 거지 역을 맡으면 어떻고 머슴 역을 맡으면 어떻고 대왕 역을 맡으면 어떻습니까? 칼잡이 역을 맡든 도둑 역을 맡든 어떤 역을 맡아도 그게 단순하게 한 막이 내리면 그뿐인 줄 알고 있으니깐 그거 아무렇게나 나가도 편안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모습을 가지고 그냥 몇천 년, 몇만 년 살고 이러는 줄 알고, 그냥 모두 이거는 차곡차곡…. 물론 그렇죠. 깨끗하게 하고 사는 거는 좋아요. 그러나 욕심 많게 쌓아 두려고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죠, 모두가. 이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죠. 그래서 내가 낑겨 둔 뭐가 있다면 빨리 내줘야 마음이 시원하니까 빨리빨리 그 즉시에 이렇게 나누어 주듯이 또 마음도 역시 그래야 우리가 회향을 했다고 할 수 있죠. 집을 지어서 끝을 마쳐도 회향이고 밥을 지어서 밥을 먹고 나도 설거지를 다 해야 회향입니다.

이 회향이 너무 많고, 이 만물만생이 다 여러분들의 아래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스승이에요. 돌 하나라도 스승이에요. 그게 없다면 우리가 보고 배울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고 배울 수가 있어요. ‘저렇게 나쁘게 해선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요. 보니깐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중세계의 진리니까, 삼세를 돌아가는 수레와 같은 진리이니깐 우리는 ‘삼세를 뛰어넘었다, 점프했다, 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금방 밥을 굶게 되든 그냥 뭐가 되든 그냥 그 주장자 거기에, 자기는 심부름꾼이니까 그 주인더러 그냥 맡겨서 ‘네가 끌고 다니든지 살리든지 죽이든지 너 맘대로 해라.’ 하고는 그냥 편안하게 해 두면 다 제가 형성시켜 놓은 거기 때문에 다 끌고 다니며 먹여요. 예전에 내가 그랬어요. 칫솔 하나 안 가지고 나갔지만 끌고 다니며 다 먹이더라고요. 하다못해 뿌리 하나를 먹이고 싹 하나를 뜯어서 먹여도 먹이더라고요. 살기 위해서 먹는 거지, 맛있게 먹으려고 그거 먹는 거는 아니잖아요.

저 나무들을 보세요. 나무들이 말입니다, 자기 뿌리에 그냥 몽땅 다 달려 있는데 싹이 무슨 걱정입니까, 글쎄. 바람이 부니 걱정입니까, 비가 오니 걱정입니까?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뿌리에다가, 뿌리에서 다 하는 거기 때문에 뿌리가 싹을 죽이게 되면 요 뿌리가 더 내려서 깊이 박혀요.

그것도 생각이 있고 말을 하고 그래요. 흔들흔들해서 비가 와서 넘어질 것 같으면 뿌리를 그냥 사방에다가 넓게 박아요. 그래서 저런 나무들도 초식도 그런 생각을 하고 ‘아이고, 저 올해는 많은 비가 오고 많은 장마가 드니까 내가 뿌리를 튼튼하게 둬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실천을 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못 해서 어떡하겠느냐는 얘기죠.

그러니까 생각을 그저 아무것도 거기 붙임 없이 오직 살아나가는 그 모두를, 일거수일투족을 다 거기서 한다고 생각을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 구녁밖엔 없어요. 구녁 없는 구녁이 그 구녁밖엔 없다고요. 일체제불이 통과하는 구녁은 그 구녁밖에 없다고요. 그리고 일체 만물만생이 통과할 수 있는 구녁이 그 구녁밖에 없습니다.

낚시로 살생을 많이 했는데…

질문 저는 머리가 복잡할 때면 낚시를 하러 가곤 했는데 불법을 공부하다 보니 제가 너무 많은 살생을 했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어떻게 참회해야 될까요?

답변 우리가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모든 물에서 노는 거든지 날아다니는 거든지 들에 다니는 거든지, 그런 것이 전부 힘에 따라서 잡아먹히고 잡아먹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으로 올라오면 사람의 고깃덩어린 먹지 않는데 그 대신에 정신을 뺏기고 정신을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이거는 참 묘한 법입니다. 서산 대사(西山大師)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했습니다. 그건 왜 그랬느냐. 자기 마음이 새 마음으로 들어가서 새가 내려오고 싶으니까 내려왔다 이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영, 영’ 해 놓으면 그게 몇이나 됩니까? 그냥 영이죠? 이 모두가 연결돼서 인연 따라서 돌아가는 이 진리 속에서 에누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한 대로지.

그런데 살생이라 하면 그것이 두 가지가 있는 겁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관하는 것도 모르고, 자기 아닌 자기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면 그냥 살생이 되는 겁니다. 업보가 되고. 그렇지만 그거를 알고 나오는 거나 들어가는 거나 그 한자리에 모든 것을, 나쁜 게 나오면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그러고, 좋은 게 나오면 ‘감사해.’ 하는 그것으로 다 그게 업이 되지 않고 유전이 되지 않고 또 복수가 되지 않고 그러는데, 그걸 모르니깐 복수로 연결이 돼서 끝끝내 10대(代)고 20대고 30대고 그냥 쭉 계속해서 복수를 낳죠.

그리고 지금 젊은 사람들이, 다들 그런 건 아니지만 더러더러 많은 사람들이 부모의 속을 썩이고, 또 나라에 누가 되게 하고, 자기가 그냥 볼품없이 쓰러져 버리고 이렇게 하거든요. 자기를 자기가 누가 되게 이름을 손상시키고 그러거든요. 그것이 뭔 일이냐 하면은 보이는 자기가 보이지 않는 자기를 무시하고 이 운전을 하려니까 그거밖엔 못 살아요. 그거밖엔 못 하거든. 그냥 바깥으로, 물질세계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구 해 버리니까. 그러나 이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저절로 그렇게 자기가 그 에너지를 베풀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에너지가 나가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 세상을 다 주고 바꾼다 하더라도 난 못 바꾼다 이런 뜻입니다. 이 세상이야 비구빈천에 돌고 돌면서 찰나찰나 변함이 오고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면서 돌아가는데, 나투는 거 아세요? 나투는 거는 표현을 할 때, 즉 말하자면 한 발짝 떼 놓고 나면 한 발짝 없어지는 거예요. 찰나찰나 나툰다. 이거 보면 저거 봐야 하고 이거 들으면 저거 들어야 하고, 매사 게 다 그렇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바로 그것이 부처가 가능하다. 99% 가능하다. 그런데 나무에 흙 덮인 것처럼 우리는 무명에 그렇게 덮여 있기 때문에 자기를 못 본다. 그런데 마음의 눈으로 보시면 그게 보아진다 이겁니다.

이 모두가 과학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연구해서 내나 또는 농사를 지어서 먹으나 또는 할 줄 아는 거를 하는 거나, 전부가 과학 아닌 게 없습니다. 살다 보면 좀 더 어려운 건 ‘요렇게 잘해야지’ 하고 돌아가게 되는 것도 과학입니다, 그게. 어디 과학이 따로 있나요? 심성 없이 어떻게 과학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도리를 아는 분들은 그저 저절로 자기 아닌 자기가 물질적인 자기를, 일로 간다면 일로, 일로 가다가 잘못 낭떠러지가 나온다 이러면 낭떠러지 없는 데로 끌고 가거든요. 그래서 자동적으로 지켜 주고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는 거죠. 자기가 생각 내는 대로예요.

어떤 집은 ‘주인공, 나는 지금 급해서 집을 그냥 두고 나가는데 집에 도둑 안 들어오게 지켜 줘.’ 하고선 나갔더랍니다. 그런데 들어와 보니 문은 열렸는데 아무것도 없어진 게 없더랍니다, 하룻밤을 자고 왔는데. 그 모두가 보이지 않는 데에…, 생각해 보세요. 보이지 않는 데서 몽둥이를 들고 철퇴를 들고 “너 죽여 버린다!” 하고 와도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다가 놓고 거기서 지키게, 보이지 않는 거는 보이지 않는 데서 지키게 하고, 보이는 데서는 보이는 걸로 지키게 하는 것이죠. 항상 둘이 아니니깐 말입니다.

색경에 비치는 것도 내 그림자, 여기서 그 색경을 보고 내 모습을 비치게 하는 놈도 그놈이고 그런데, 이놈이 하자는 대로 색경 속에서는 하지 않습니까. 그거와 똑같이 자기가 안 보이는 자기가 하자는 대로 흉내를 내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지금 여러분들 모습이. 근데 악이냐 선이냐, 잘못하는 거냐 잘하는 거냐 하는 것은 자기가 마음에 따라서…, 마음을 운전하는 걸 알아야 된단 얘깁니다. 어느 누구가 잘못 살려고 하고 그럽니까? 잘못하려고 하고? 모두들 번연히 알면서도 잘못 저지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들은 과거로부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보가, 수없는 갖은 각색의 업보가 다 있건만 그거를 없애는 도리가, 바로 그것이 정수에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니까 나오는 걸 거기다가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된 건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팔자 운명도 붙지 않는다. 살생도 붙지 않고 모든 게 다 붙지 않는다.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이렇게 잘못했으면 어, 앞으로 내 죄가 많은데 어쩌랴.’ 하지마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는 분들하고 기복으로 그냥 하는 분들하곤 다릅니다.

기복으로는 형상이나 이름을 보고 기도를 하고 믿고 다니지만, 그리고 거기다 살려 달라고 빌고 그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거는 도깨비장난밖에 안 되느니라.” 양 무제더러도 “너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공덕이 하나도 없느니라.” 했던 거거든요. 그러니 그저 인으로, 웃을 땐 웃고 웃지 않을 땐 웃지 않으면서도 인으로다가 다루고 섭섭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바로, 나는 찾았는데 모두를 다 귀합을 시키지 못할 때는 그때는 대승이 될 수가 없다 이런 뜻이에요. 모두가 그래요.

그리고 사람이, 지금 한마음을 말입니다, 관으로 생각을 하고, 예를 들어서 좇아 들어가는데 보이지 않는 자기를 좇아 들어가면 죽으러 가는, 죽은 세상에 가니까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진데 죽으러 가는 사람이 이것 참견하고 저것 참견할 수가 있나요? 그러면 죽은 세상에는 가 볼 수가 없죠. 죽어야 가 보는 데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이 그만큼, 내가 곧장 그냥 길을 가야지, 그게 도의 길이지, 가다가도 얼뜻 쉬고선 여기서 참견하느라고 산란케 굴거든요. 그러면 점점, 20년이 가도 30년이 가도 그것은 귀합을 시킬 수가 없죠.

그 귀합이라는 것도 본래 그렇게 하면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본래 진리가 그러하단 얘깁니다. 공생이며, 이 몸속에 있는 것도 공생입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죠. 한 개체가 그냥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 살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한생각에 모두가 이렇게 통신이 된단 얘깁니다. 그러니깐 거기에 집착을 하지 마시고 관습에 의해서 자꾸 걱정하지 마시고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가 그냥 다 맡기세요. 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하면 모든 살생도 모든 잘못됨도 다 붙지 않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