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臣 신의 상징한 하사품
功 있는 신하·80세 노인에
차 하사하며 왕권 공고히 해
차 공급 승려·사원 도맡아
점차 고급스런 차품 생산돼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績略錄)〉. 고려시대 사찰의 차 공급 체계를 알 수 있는 사료다. 사진제공=통도사 성보박물관

삼국유사감통(感通)’에 경덕왕 19(760), 왕은 월명 스님에게 품다일습(品茶一襲)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품다일습은 차를 끓일 때 필요한 다구(茶具)를 말한다, 8세기의 차 문화는 아직 귀족사회에 안착하지 못한 채 당나라의 음다(飮茶) 형태를 답습하는데 그쳤다. 그러기에 월명 스님이 왕에게 받았던 다구일습이란 당제(唐製) 다구일 것이라 여겨진다.

8세기 무렵 중국의 차 문화는 육우가 제다법과 탕법을 획기적으로 개량하여 이에 따른 다구가 출현했던 시기다. 그의 다경에는 차를 끓일 때 소용되는 여러 가지 다구들을 언급한 바가 있는데, 풍로, (?), (?), 소금 담는 그릇, 숙우, , 표주박, , 체 등이 그것이다.

760년경은 육우가 저산에 머물며 차 연구에 매진하던 시기인데, 저산에서 수행하던 선종 승려 교연에게 영향을 받았기에 차 문화를 집대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육우는 교연과 차를 품평하며 더욱더 깊은 차의 심연을 터득해 나갔는데, 이는 교연의 구일 육우와 차를 마시며(九日與陸處士羽飮茶)’에 나타난다. 그 내용은 이렇다.

9, 산승의 암자엔(九日山僧院) 동쪽 울타리에 노란 국화, 활짝 피었네(東籬菊也黃). 속인들은 흔히 (국화를) 술에 띄우지만(俗人多泛酒) 누가(국화 향을) 빌려다가 차향을 더할까(誰借助茶香).

교연에 따르면 천지에 양기가 가득한 중양절(33, 99), 특히 황국이 피는 9일에 육우를 불러 차를 즐겼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그가 주석하던 묘희사에 국화를 심었고, 노란 국화가 만개할 때 뜻 맞는 벗을 불러 차를 즐겼던 정황을 드러낸 것이다. 아울러 국화를 띄운 술을 마시며 승경을 만끽했던 당시의 풍습도 나타냈다. 동쪽 울타리에 황국(黃菊)을 심고 즐기는 풍습은 동진(東晋) 때 도연명(陶淵明, 365~427)에게서 유래된 것인데, 이는 이상적인 선비의 삶으로 동경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 차 문화는 7세기에 중국에서 들어와, 9세기에 이르러 왕실과 귀족층, 수행승 등으로 퍼져 나갔다. 삼국사기“(흥덕왕) 3(828) 겨울, 12차는 선덕왕(재위 780~785)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부터 성행하였다(茶自善德王有之 至於此盛焉)”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차 문화 유입 초기, 차는 귀중한 물품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공양물로 쓰였으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나라에 공 있는 신하에게 차를 하사하여 군신간의 신의를 결속했으며, 80세 이상 노인에게도 차를 하사하여 원로와 노인을 우대하고 보호한다는 통치 윤리를 반영하는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고려 건국 이후, 왕이 차를 하사하는 범위가 넓어져 제도적인 규범이 만들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왕이 하사한 차의 종류도 다양해졌는데, 이는 고려에서 생산된 차와 송 황실에서 보낸 용봉단이 차등에 따라 하사되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서 차가 하사된 사례는 고려사, 고려절요에서 확인된다.

특히 고려사성종(成宗) 조에 “9년 겨울 10월 갑자에 서도(西都)를 행차하여 교를 내렸다(九年冬十月敎曰)”하고 이어 “(벼슬이)3품 이상인 자는 차 10, 9품 이상은 차 5(三品以上者 茶十角, 九品以上 茶五角)”을 내렸고, 어머니와 처의 나이가 80살인 사람, 삼품 이상은 차 2, 5품 이상 차 1근을 하사했고, 9품 이상은 차 2각을 내렸다(母妻年八十者三品以上茶二斤 五品以上茶一斤 九品以上茶二角)”고 한 기록이 보인다.

성종 9년은 990년이다. 당시 고려의 차 문화는 왕실 귀족과 수행승, 관료 문인들에게 어느 정도 퍼져 있었지만, 차를 넉넉하게 즐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에서 생산된 차는 재배 환경의 제한으로 중국처럼 차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풍족하게 차를 향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9세기 초, 차 씨를 들여와 자급자족을 시도했는데, 이를 뒷받침한 정보와 기술력을 선취한 계층이 도당구법승이다. 따라서 10세기에 하사된 차는 고려에서 생산된 것이라 하겠다.

10세기에 하사한 차의 무게는 각()과 근()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각은 덩이 차(餠茶)의 무게를 표시하는 단위이고 근은 잎차의 무게 단위이다. 9세기 일본 승려 엔인(圓仁)의 구법순례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신라 통역관 유언신이 세차 10근과 잣을 보내 주었고(劉信言 細茶十斤 松脯贈來)”라는 내용이 보인다. 세차는 여린 잎으로 만든 차인데 차의 무게를 근으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각은 병차를, 잎차는 근으로 무게 단위를 표시했다는 용례를 규명하기엔 미흡한 점이 많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차의 무게는 각과 근을 섞어 사용하였다.

10세기에 유행했던 차의 종류는 무엇일까. 바로 병차(餠茶, 일명 떡차)였다. 그 제다법은 육우가 창안한 것으로, 10세기까지도 그의 영향권에 있었다. 병차의 제다 공정을 살펴보면, 찻잎을 시루에 넣어 증기로 쪄낸다. 찐 찻잎을 절구에서 찧어낸 다음, 틀에 넣어 차의 모양을 성형한다. 방형(方形), 원형(圓形), 화형(花形) 등 차를 만들어 건조해 보관한다. 차 끓일 때, 약한 불에 차를 구워 연(?)에 갈아낸 후, 가루차를 끓인다.

고려 왕실 차 수요를 공급하던 곳은 다촌(茶村), 다소(茶所)이다. 특히 다소는 차를 만드는 기술력이 특화된 전문 인력이 차를 만들던 공소(公所)이다. 다소는 차에 밝은 승려들이 주도했을 것이며 점차 차산지에 다세(茶稅)가 부과되면서 관청이 다소의 관리뿐 아니라 차를 출입(出入)을 관리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 경상도 일원에서 차를 토공(土貢)으로 올렸던 사실을 수록해 두었다. 그러므로 차산지에 부가된 차세(茶稅)는 이미 고려 때부터 시행하던 제도가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촌의 형성 초기엔 차를 만드는 공소(公所)가 사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음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績略錄)에서 확인된다. 이 자료에 다촌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쪽 동을산 다촌은 곧 차를 만들어 절에 올리던 곳이다. 차를 만들어 올리던 곳에는 차 밭과 샘물이 있었다. 지금에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 후인이 차를 만들던 마을이라고 하였다.(北冬乙山茶村乃造茶 貢寺之所也 貢寺茶田茶泉 至今猶存不泯 後人以爲茶所村也)

이 문헌에 따르면, 통도사 북쪽에 동을산이 있고 여기를 중심으로 다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폐사지에는 차밭과 샘물이 보존되고 있었다. 물은 차를 만들 때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통도사박물관 소장본인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績略錄)1642년에 필사한 것으로, 고려시대 통도사의 토지 경제 및 비보(裨補)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아울러 17세기까지 통도사에 고려시대 다촌(茶村)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가늠할 자료인데, 고려시대 사찰에서는 사원에 필요한 차를 자체적으로 생산 공급하는 체계가 전문화된 다소(茶所)를 운영하여 고려시대 차 문화를 사원과 승려들이 주도했던 배경을 밝힌 사료라 하겠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 차를 왕의 하사품으로 활용한 사례는 특별할 뿐 아니라 차 이외에도 차를 끓일 때 사용하는 다포(茶布)를 차등을 두어 하사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고려사현종 조현종 9(1018) 2월 무진에 해노 이군 교위선두 이하에게 다포를 차등을 두어 하사했다(顯宗九年 二月戊辰 賜海弩二軍 校尉船頭以下 茶布有差)”는 것이 그것이다.

다포(茶布)는 찻그릇을 덮는 데 쓰는 물품이거나 혹은 찻그릇을 닦을 때 쓰는 베로 만든 다건(茶乾)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11세기 왕실에서는 높은 관리에게 뇌원차(腦原茶)를 하사하였는데 뇌원차는 이 시기에 생산된 최고급차 단차(團茶)이다. 단차는 병차보다 그 제다법이 훨씬 정밀하다. 찻잎도 응조(鷹爪), 죽순처럼 여리고 여린 차싹으로 만드는 것인데, 10세기 말 대용봉단(大龍鳳團)을 만든 후 11세기 채양(蔡襄)에 의해 소용봉단(小龍鳳團)이 완성되면서 연고차(硏膏茶)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러므로 송과 교류가 왕성했던 고려에서도 뇌원차를 생산하여 하사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최승로 같은 신하가 죽었을 때 여러 가지 부의품을 보내면서 특별히 뇌원차 200각과 대차 10근을 하사했다. 이는 고려사제신상(諸臣喪)’조에 성종 6(987) 3월에 내사령 최지몽이 죽자 왕이 부음을 듣고 애도했으며 차 200각을 보냈고, 8(989) 5월 수지중 최승로가 죽자 왕이 애도하는 교지를 내려 그 공훈을 포상했는데, 뇌원차 200각 대차 10근을 하사했다. 14(995) 4, 평장사 최양이 죽자 뇌원차 1,000각을 보냈고, 목종 원년(998) 7월 내사령 서희가 죽자 뇌원차 200, 대차 10근을 보냈고, 7(1005) 6월 시중 한언공이 죽자 차 200각을 하사했다고 하였다.

11세기에 고려가 구현했던 차는 중국의 모방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연환경에서 자란 찻잎으로, 고려인의 이상을 담아낸 차로 발전 시켜 뇌원차, 대차 같은 차품을 완성했다. 아울러 차의 긍정적인 응용도 공이 있는 신하나 원로를 대접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하사하여 이들의 공을 위로하는 한편, 나라를 위해 노력해준 신하의 마지막 길에도 차를 하사하여 귀하게 대접했다. 이렇듯 차는 군신(君臣)의 신의를 상징했던 물건이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차가 함의하고 있는 가치는 보다 더 긍정적인 방향을 모색했던 시대라 하겠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