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공한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놔라

신도1(여) … (녹음 안됨)

큰스님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있는데 우주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어떻게 됐느냐고요? 누구냐고요? 당신이지 누구예요? 일체 만 생명이 다 주인공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샛별을 보고 깨달으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거와 같이 어떠한 물질이든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그 물질과 더불어 우리는 같이 공해서 이렇게 돈다고, 같이 삼각원형을 이루고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우주 전체가. 그랬는데 내 주인공이 따로 있고 남의 주인공이 따로 있단 말입니까?

신도1(여) 근데 저는 기독교를 다니다 왔기 때문에요, 거기선 하느님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하도 인간들의 죄가 많아서 말세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큰스님 이거 보세요. 옛날에 불로 심판을 받는다고 그런 말들을 했죠. 그런데 불이라는 건 어떠한 걸 뜻하겠습니까? 우리네 생명, 즉 마음입니다. 그 마음과 더불어 마음으로 자기가 하는 대로 자기가 심판을 받는 거지 누가 심판을 주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거를 부처님께서는 “하나님이 즉 나이면서도 공했다.”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생명은, 개구리의 생명도 댁의 생명도 일체 생명은 둘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러하니까요. 어떻게 둘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습은 작고 크고 할지언정 어떻게 생명이 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거, 이 부처님께서는 ‘하나님이 즉 나, 나이면서도 공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생명은 개구리의 생명도 댁의 생명도 둘입니까, 하납니까? 일체 생명은 둘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러하니깐요. 어떻게 둘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습은 작고 크고 할지언정 어떻게 생명이 둘입니까?

신도1(여) 아니, 그런데요, 쭉 캐고 들어가면 맨 처음에 뭐가 생겼을 때 그걸 만든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큰스님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가.’ 이걸 관하세요. 그럼 댁이 어디서 온 걸 알면 일체 만물만생이 다 어디서 온 걸 알 테니까요. 우주의 근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댁의 주인공에 모든 것을…. 주인공이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것도 이름일 뿐이에요. 실제 존재가 되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 이름을 지팡이 삼아서 모든 것을, 사대 오온이 다 공했으니 거기다가 모든 것을, 자기가 주인이자 공이니까 공에서 나온 거 공에다 다시 놔라 이겁니다. 맡겨 놔라! 그리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의해서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의정 나는 게 있으면 안으로 굴리면서 관하라.

신도1(여) 그, 생각만 하면 그게 깨쳐지는 거예요?

큰스님 참…. 그 생각 모든 걸 전체 다 맡겨 놓으세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살림살이가 다 댁이 이날까지 해 왔지 누가 해 줬습니까? 자기가 있고부터 이 세상이 있는 줄 알았고, 이 세상이 있는 줄 앎으로써 생활이 어떻게 돌아간다, 또는 나쁘다 좋다를 알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알아야지요. 자기가 어디서 왔나? 어디로부터 왔나? 자기 주인공에 모든 것을 관하되 ‘내가 어디로부터 왔나? 참나가 어딨나? 이 몸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참나는 무엇인가?’ 이러고 관하십시오. 바깥으로 그러고, 말로만 그냥 그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말도 없이, 생각 자체를 깊숙하게, 침착하게, 정성스럽게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앉으나 서나, 깨나 자나, 변소에 가나, 나나 드나 하여간에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내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것을 일러 보십시오.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신도2(여) 부처님의 근본에서부터 나왔습니다. 부처님의 근본은 삼라만상의 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큰스님 부처님의 근본! 부처님의 근본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물론 이렇다 저렇다, 돌고 도는 물과 같은 것이지마는 말 한마디 규정해서 아퀴 짓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서 내가 알면은, 아는 대로 안다는 것을 세우지 않고 말할 수 있고 화할 수 있으니 그것이…. (잠시 사이)

이전도 아니요, 이후도 아닙니다. 단지 화창한 날씨에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물이 흘러 돌 뿐입니다.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다 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에 “근본, 근본” 하지만 모든 게 근본은 마음의 근본이겠지요. 그런데 그 마음마저도 세울 게 없으니 어디로부터 세울 게 없는 게 생겨났는지…. 하여튼 모두 여러분이 그렇게 지금 자꾸 무르익어서 남이 먹기 참 맛있다고 하리만큼 익어 갈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많으니 내가 한층 더 기쁩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내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하는 이것은 계단이 없으면서도 한 계단이 있고 “한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두 번 죽기 어려워라. 두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세 번 죽기 어렵더라.”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번 죽어서 알고 두 번 죽어서 몰랐더니 세 번 죽고 보니까 알고 모르고 혼비백산이 돼 버렸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고 하겠지만, 여러분들께서 그러면 질문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대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줄창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다고. 그런 소리는 무슨 소리냐 하면 억겁을 거쳐서 진화가 돼서 나왔지마는 그것이 바로 오늘에 의해서 모든 게 귀합이 됐다는 얘깁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어저께 콩씨였더니 오늘에 보니까 금방 콩나무가 됐더라는 얘깁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 뜻이.

그러니까 억겁을 거쳐 나왔다 할지라도 오늘 내 이 몸 하나 난 것이, 전체 그 습을 두리둥실 뭉수리처럼 다 짊어지고 안고 이고 이러고 지금 살고 있죠. 그러면 전자에 살던 습을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자라 하면 여자의 행동을 하는 습을 가졌고, 남자라 하면 남자의 습을 가졌고, 또는 애들하고 있으면 애들하고 같이하면서 어른이라는 습을 가졌고, 또 어른을 보면 나는 젊은이라는 습을 가졌습니다. 살림살이의 모든 전체, 맛이 있다 맛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전체가 이날까지 살아온 습입니다!

사람이라는 두 마디 글자는 똑같지마는 사람이라고 해서 차원이 똑같은 바가 없습니다. 비유한다면 넝마도 있고 깡통도 있고 무쇠도 있고, 동도 있고 금도 있고 은도 있고 이렇듯이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서로 만나서 사는 것도 서로 모이는 모임도 끼리끼리 모인다는 얘깁니다. 그건 왜? 자기의 습대로 자기 차원의 모임이 그렇게 모이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인과라고도 합니다. 자기 습에 의해서 인과를 짓고, 인과를 지음으로써 또 그 습을 떼지 못하면 그게 유전으로 변화하고, 유전으로 변화한다면 바로 자기가 생각하고 아끼고 그러던 착을 둔 데에 유전성이 거기에 꼭꼭 붙어 돌아가고, 항상 얽히고설키고 그렇게 붙어 돌아가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끄달리면서 이렇게 여직껏 내려온 거죠.

그러면 앞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이 습을 모두 뗀다고 하기 이전에 내가 떼려고 하는 마음도 공이요, 또는 내 몸도 공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붙을 데가 없는데 떼려고 하는 게 어디 붙을 데가 있느냐는 얘깁니다. 붙을 데가 없는데 뗄 거는 어딨느냐는 얘기예요. 그런데 “붙을 데가 없는데 뗄 것이 어딨겠느냐.” 하는 소리를 하게 되면, 육조 스님은 “틀이 없는데 면경이 어딨으며, 면경이 없는데 때 앉을 게 어딨겠느냐.”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 구절을 볼 때에 우리가 일체 대의적으로 근본을 두고 말을 한다면, 근본 자체도 만약에 세울 게 없다면 그 소리는 상당히 누가 되는 문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본래는 있다 없다가 흰 구름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하죠?

그래서 우리가 만 사람의 그 생명이 있는 거, 일체 유생 무생의 그 만 사람의 마음의 꽃이 향기로써 이 우주를 덮는다면 우리는 이 마음이 어떻고 저 마음이 어떻고 이렇게 갈라서 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꽃의 향기와 같아서 마음이 그렇게 똑똑하고 착하고 어질고 도의, 의리,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지혜 높은 그런 넓은 사람이라면, 또는 이 도리를 알아서, 공한 도리를 알아서 자기의 아상도 세우지 않고 욕심도 착도 두지 않고 둥글둥글 걸리지 않게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법신이자 부처인 것이죠.

그래 한암 스님도 어느 목사님이 와서 “우리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랬는데 스님께서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니 “스님께서는 어찌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나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암 스님 말씀이 거기에서 더 말씀하실 수가 없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모르니까 “당신이 그것밖에 모르니까 나도 그것밖에 모르오. 만약에 당신이 안다면 나도 알지.” 하시더랍니다.

사람은 몸뚱이는 한계가 있는 겁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엊그저께 폭발이 된 문제들을 신문에서도 보고 또 테레비에서도 보고 뉴스에서 많이 들으셨죠? 물질적이라는 건 한계가 있는 겁니다. 영원하지가 못해요. 그 탄 사람이나, 탄 사람의 몸이나, 탈 수 있는 집이나 역시 물건이란 한계가 있는 거죠.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근본, 이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마음의 근본은 절대로 한계가 없는 겁니다. 무한의 그 능력과 무한의 그 생동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항상 얘기해 드리죠. 인간이 그 도리를 안다 하면 몸을 나라고 하기 이전, 참나로 하여금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같이 호응하면서 공용하면서 어느 고장이라도, 어디든지 보고 듣고 가고 오고, 가고 오지 않으면서도 가고 올 수 있다고요. 빛보다도 더 빠르고 말로 세워서 말할 수 없는 그 찰나, 한 찰나. 각자 여러분 마음 깊이 한 찰나선은 그렇게 생동력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를 받치고도 남고 굴리고도 남고 들고도 남음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 하면 거기에서 서로 응용하면서 서로 공존하면서 이것을 활용하는 것은, 갖은 각색 천차만별로 돼 있는 거를 다 찰나찰나, 바로 찰나, 번갯불 같은 찰나선입니다. 어떻게, 한다 하리까, 하지 않는다 하리까? 없다 하리까, 없지 않다고 하리까? 있다 하리까, 없다 하리까? 그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에, 바로 한 찰나선에 우린 번갯불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광대무변한 법을 부처님께서 마음으로 마음으로 전달을 해서 이 뜻을 이날까지 가르쳤건만 오늘날에 참, 그 가르친 마음의 선맥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문제들도 있다고 어느 스님네들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여러분의 차원은 실과가 만 가지 맛이 나듯이 만 가지의 차원이 있으니 그 차원의 그릇대로 우리는 바로 자기가 산다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릇은 모두가 텅텅 비어서 한계가 없고 무한의 능력이, 자기가 한다 안 한다 말 없이 항상 늠름하고 여여하게 해 나갈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 놓으면
참자기의 그 익은 맛을 알게 되고
한 맛을 알게 되면
만 가지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로부터 나온 줄 알아야 모든 일체 만물이 다 공해서 우리가 지금 현재의 실상을 그대로 실상으로 여여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찰나찰나 고정된 게 없이, 듣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말하는 것도 고정된 게 없고, 만남도 고정된 게 없고, 행하는 것도 고정된 게 없어서 모든 게 찰나찰나 자기가 화해서 돌아가고 지금 현재에도 그렇게 화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화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세울 게 있어서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자 공이니, 바로 그 공이면서도 찰나찰나 여여하게 해 나가는 것이 세울 게 없으면서도 여여하지 않으냐는 얘깁니다.

그러면 그런 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나의 무전자와 더불어 유전자, 유전자와 더불어 이 물질, 육신과 삼합이 공존하면서 이렇게 광대무변한 것을, 우리는 무전자나 유전자 이런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내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에 내 몸뚱이, 말, 생각 그저 이걸로써 그냥 족한 줄 알고 살죠? 그러니 구덩이에 빠지니 압니까? 자기가 어디서 온 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뭐를 하고 가는 건지 그것조차도 가늠을 하지 못하고 천방지축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모두가 지혜가 있어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가 있는 거지 지혜가 없다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한 20여 년 전 얘깁니다. 어느 때 우리 신도님 한 분이, 그 아들이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무기징역을 받고서 있다가 나중에 모범수가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아주 정성스럽게도 서울에서 원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가 우리 아들은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어느 아무개 아무개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이렇게 가르쳐 줬지요.

내가 내 주인공을 ‘주인공’ 하고 부를 때는 내가 그 아들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아들 주인공도 되고 내 주인공도 되고 한꺼번에 합쳐서 주인공이 된다. 그러니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속으로 ‘주인공!’ 하면 벌써 그 아들과 나와 같이 한데 합쳐지는 그런 경향이 있으니, ‘주인공!’ 하면 벌써 그렇게 되니 해 달라, 안 해 달라 그런 것도 생각지 마세요. ‘아들이 나왔으면…. 그렇게 되지 말았으면….’ 하는 거는 내 여기 간절하게 본래 있지 않느냐는 얘깁니다. 그런데 뭘 또 해 달라 말라, 응? 잘되게 해 달라, 못되게 해 달라 이런 말을 또 해야 되고 또 생각을 거푸거푸 해야 됩니까? 내가 소원 풀 수 있는 그 생각은 벌써 여기 간절하게 본래 있는데! 그럼 덧붙이기로 벌써 두더기가 돼 버리고 마는 거죠.

그러니깐 내가 본래 아는 거에다가 ‘아휴, 주인공!’ 하면 한데 합쳐지니까 그냥 마음속으로, 그것도 겉으로만 하는 게 아냐. 마음속으로 ‘주인공’ 하면 벌써 거기에 다 한데 부합이 되어서 같이 돌아가는데 뭐 해 달라고 안 해 달라고가 있습니까? 그렇게 빠르게 직속 놓고 돌아가야지 그렇게 어치정어치정, 어물어물하다가는 치입니다. 그렇게 빠르기 때문에, 한 찰나 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어치정어치정하다가는 벌써 치인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다 보십시오. 명동 거리에 가다가 사람들이 많은데 어치정어치정하다가 보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지금 여러분이 살림살이하는 게 그 쪼거든요. 그러니 자기가 갈 길은 못 가고 싸우다 볼일 못 보지, 한 발 떼다 볼일 못 보지, 또 그러면 이쪽에서 치이지, 그러면 싸우지, 이러다가 한 세월 다 보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이 있어야 부처를 이루지 육신이 없고야 어떻게 부처를 이룹니까? 그건 왜냐하면, 육신이 없고 내가 만약에 보이지 않는 그 영혼만 남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육신이 없어서 부닥침이 없어. 더하고 덜함이 없어. 이거는 심령이기 때문이에요. 영이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도 없으니까 내가 체험하고 배울 게 없거든. 진화될 수가 없어. 계발될 수도 없고. 내가 뭐, 물건이 있어야, 물건으로 상대가 있어야 어떻게 해 볼 텐데, 더 발전이 되고 계발하고 이렇게 나갈 텐데 이 영이라는 것은 더하고 덜함이 없는 거라.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이렇게 생시에 살다가 차원에 따라서 삼차원이다 하면 삼차원대로 그냥 있고, 이차원이다 하면 이차원에 그냥 있고, 머물러서 더하고 덜함이 없는 거예요. 다시 그 차원에서 생산이 될 뿐이에요. 원소가 무쇠라면 무쇠로 물건을 해서 생산을 할 수밖엔 없는 거죠. 금이라면 금대로, 원소가 금이니까 금에 의해서 반지를 하든지 목걸이를 하든지 바로 생산을 해내죠.

그런 거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차원도 차원대로, 죽으면 몸이 없으니까 더하고 덜함이 없다, 고 차원에서. 그러니까 생산이 돼 나와도 고 차원에서 나와야 되니까, 고 차원끼리 인연에 따라서 만남이 된단 얘깁니다. 한 식구가 모였다 할 때는 고 차원대로 딱, 보는 사람도 고 차원 또 당하는 사람도 고 차원. 그러니까 고(高) 차원이 아니라 고 차원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차원에 따라서 이차원끼리는 이차원끼리 만나고 삼차원은 삼차원끼리 만나고 사차원은 사차원끼리 만나. 그러니 만나는 대로, 예를 들어서 깡통끼리 만났다면 쪼끔만 건드려도 와르르 부서져서 소리가 그냥 엥그랑뎅그랑 엥그랑뎅그랑 나는 거죠. 그런데 넝마끼리 만난다면 넝마는 소리는 안 나는데 내성적으로, 그저 그냥 항상 빠느라 볼일 못 보고, 꿰매느라 볼일 못 보고 이런 거나 마찬가지로 식구들이 전부 같은 넝마로 만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아주 가난하다 이겁니다. 마음이 아무리 착하다 할지라도 가난하면, 정말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면 무슨 짓을 할는지도 모르는 일들이 생기는 거죠. 한 생각 잘못하면 그 한 생각 잘못한 걸로 연관성을 가지고서 세세생생에 끄달리니까요. 그러니까 그 차원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사람이 없다면, 또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망상을 끊으려고 하지 말고 녹여라 이겁니다. 네가 망상을 내는 거지 딴 데서 내 주는 게 아니니까, 네가 망상을 하고 있으면 하고 있는 놈도 바로 그놈이고, 하고 있다고 하는 놈도 그놈이니 모든 것을 거기에,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공한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놔라!

그래서 우리가 이 모습이 없어도 아니 됩니다. 이 모습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화해서 이 모습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모습이 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만약에 본래 모습이 없다면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몸이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오관을 통해서 크고 작은 것도 알게 됐고, 고상한 것도 알게 됐고 더러운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뜻이 이렇게 좋은 것을 참 미처 몰랐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역시 우리 이 몸뚱이가 있고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낼 수 있으니까 바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진화력으로서, 우리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서 미래의 법신으로서 부처로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륵보살, 미륵부처’ 이러는 것이 미륵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해서 앞으로 나올 것을 미륵보살이라고 그러고 미륵부처라고 합니다. 본래 부처가 된 사람은 부처라고 하지마는 우리가 지금 공부해서 앞으로 차차 부처님이 돼 나오실 것은 미륵보살이라고 하죠. 미륵부처라고 하고요. 그러니까 미륵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고, 우리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거고 미륵부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대통령이 있다면 후대 대통령도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고 또는 계발을 하고, 이 천체에 어디고 걸림 없이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참, 천지 만물 다, 우리는 아주 흰 꽃처럼, 향기처럼…. 그래서 그것을 만 백화라고 이름을 할 수도 있는데 만 백화의 향기는 바로 만민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이렇게 말을 시켰으니깐 하긴 했는데 내가 한 게 아니고 여러분이 시킨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같이할 때는 여기 하나도 내가 말한 예도 없고 여러분이 말 시킨 예도 없고 대답한 예도 없습니다. 모습만 다 각각이지 생명도 같아. 마음도, 또 우리가 같이 공존하는 것도 그래. 같이 이렇게, 독불장군 없으니 얼키설키해서 이 세상 살아나가니 공체고 말입니다. 남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이런 인식을 하셨다면 그 ‘참나’를 알기 위해서 좀 더, 내 이 몸이 공해서, 몸 하나 공한 것과 세상 공한 것과 둘이 아니라 전체 더불어 같이 공했으니,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 놓으면 참자기의 그 익은 맛을 알게 되고, 한 맛을 알게 되면 만 가지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께서 1986년 1월 30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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