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보유전] 3. 조선 3대 누각과 사찰
[성보유전] 3. 조선 3대 누각과 사찰
  • 이상근/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 승인 2020.02.1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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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전각, 왜 누각이 됐을까

임란 前 사찰 전각, 예경 목적
법회는 절 마당과 누각서 봉행
전란 어려움에 법당 용도 변경

부벽루·영남루 등 본래 사찰 누각
도심 강변 사찰은 ‘랜드마크’ 기능
군사·행정부터 비보 역할까지 맡아
의암에서 바라본 촉석루 전경. 조선 초 문신인 하륜은 ‘촉석루는 용두사 남쪽 돌벼랑 위에 있다’고 촉석루의 기원을 기록했다.
의암에서 바라본 촉석루 전경. 조선 초 문신인 하륜은 ‘촉석루는 용두사 남쪽 돌벼랑 위에 있다’고 촉석루의 기원을 기록했다.

기능과 미의 완성, 사찰의 누각
지금은 대웅전이나 관음전처럼 전각에서 법회를 보는 것이 ‘상식’이지만 예전, 그러니깐 임진왜란 이전까지 그런 일은 흔치 않았다. 전각은 오직 예경과 참배를 위한 공간이었다.

그럼 법회는 어디에서 보았을까? 바로 마당이다. 법회를 보기 위해 절 앞마당의 괘불대에 커다란 불화가 걸리고 법석이 차려진다. 그야말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었다. 

때로는 마당 대신 만세루나 보제루 같은 이름이 붙은 누각에서 법회를 보기도 했다. 대부분 이런 누각들이 대웅전 등 주전각과 일직선상에서 마주보고 있는 이유도, 그리고 주전각과 어떻게든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이유도 누각이 법회를 보는 장소였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그런데 이런 모든 형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늘고, 또 사찰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법당의 ‘용도가 변경’됐다. 지역의 유지 집안을 위한 소규모 법회나 기제사가 전각에서 열린 기록이 조금씩 보이다가 나중에는 아예 법회를 위한 공간으로 전각을 개방한다. ‘법당’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법당 내부의 배치와 불상의 조성 형식에도 큰 변화가 온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부처님을 모신 불단과 뒷벽 사이에는 큰 공간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법당에 수용해야 하는 신도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불단은 뒤로 쭉 밀리거나 아예 뒷벽과 붙은 형태로 변한다. 덩달아 불상의 조성에도 변화가 왔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불단에 좌정했던 불상들은 크기가 작아진 대신 ‘신도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인 형태로 조금씩 변한다. 

사찰의 배치도 변했다. 소위 중정식이 유행하게 된다. 뒷산을 배경으로 주전각이 들어서고 주 전각의 좌우에 통합된 법당(관음전, 명부전 등)이나 요사채가 들어섰다. 가운데는 마당이다. 물론 대웅전 맞은편에는 여전히 누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ㅁ’자형의 폐쇄된 구조가 완성된다. 

덕분에 의외의 동선과 미(美)도 생겼다. 대웅전을 비롯한 주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누각 밑을 통과하거나(누하진입), 누각 옆을 지나가야(우각진입)하는 형식이 18세기 넘어서 유행했다.

축대를 올리고 그 위 평평한 땅에 전각이 들어선 경우는 자연스레 누하진입이 됐고, 축대 밑과 대웅전 마당의 높이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곳은 축대 밑에 기둥이 필요 없기 때문에 저절로 우각진입이 됐다. 특히나 누각 밑을 지나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다보면 서서히 등장하는 대웅전은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보면 마치 액자 안에 들어간 한 장의 사진처럼 보여 저절로 환희심과 외경심을 불러온다.

여하튼 사찰의 누각은 기능이 조금씩 변한 적은 있지만 여전히 필요해 의해 그 자리에 남았고 또 사찰의 ‘미(美)’도 크게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해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누각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조선의 3대 누각이 모두 한때는 사찰이었다는 것이다.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향연도' 3폭 중 '부벽루연회도' 오른쪽에 부벽루가 왼쪽 밑에 영명사가 보인다.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향연도' 3폭 중 '부벽루연회도' 오른쪽에 부벽루가 왼쪽 밑에 영명사가 보인다.

영남사와 영명사 그리고 용두사
흔히 우리나라 3대 누각하면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를 꼽는다. 그런데 이 누각들은 한때 사찰의 부속 건물(누각이나 종루)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 밀양 영남루(嶺南樓)의 경우 사찰에서 그 이름까지 넘겨받은 경우다. 1844년 영남루 중건 때 쓰인 상량문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1953년) 밀양고적보존회에서 펴낸 〈향토문화〉라는 잡지 등을 종합해 보면 영남루는 743년(신라 경덕왕 2)에 임금의 명으로 지어진 영남사라는 절터의 부속 건물이었다.

어떤 자료에는 영남사의 규모가 ‘신라의 5대 사찰’에 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물론 근거는 없다. 그런데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화마가 닥친다. 그 후 6년여 동안 방치되다가 1365년(공민왕 14) 김주라는 이가 밀양 지군으로 부임하면서 남아 있던 ‘낡고 좁은 누각은 철거하고’ 영남루를 만들게 된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 영남루 자리는 영남사의 종루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종루의 이름은 금벽루(金璧樓)였다. 만약 영남루가 영남사의 종각 자리였다면 영남사의 주불전은 영남루에서 바라본 방향에서 좌측에 위치했을 것이다. 현재 영남루 맞은편에는 단군의 위패를 봉안한 천진궁이 있는데 그곳에 영남사의 다른 전각 혹은 요사채가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사찰이 폐사된 후 천진궁 자리에는 객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이런 가람 배치는 충분히 추측해 볼 만하다. 여하튼 그 뒤로 몇 차례의 화마를 더 맞고 나서 현재의 모습으로 선 건 1844년(헌종 10) 무렵이다.

다음은 평양의 부벽루다. 기록에 의하면 부벽루는 393년(고구려 광개토대왕 3) 세워진 영명사(永明寺)의 부속 정자였다고 한다.

영명사 건립은 철저히 광개토대왕의 의도였다. 392년 7월 광개토대왕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을 공략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러니깐 393년 평양에 아홉 개의 사찰을 지을 것을 명한다. ‘남벌’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 왕인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여하튼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영명사는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지으라고 했던 아홉 개의 사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명사는 ‘현대’까지 사찰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조선시대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향연도〉에도 그 모습이 보이고 일제강점기의 사진도 남아 있다. 당시 쇠락해 보이던 여느 절과는 달리 당당한 모습이다. 하지만 역시 한국전쟁은 피해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는 진주 촉석루다. 사실 촉석루가 사찰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안내 책자나 문화재 안내판 어디에도 그런 단서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추측할 만한 기록들이 한두 개 남아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인 하륜은 기(記)에서 ‘촉석루는 용두사 남쪽 돌벼랑 위에 있다(樓在龍頭寺南石崖之上)’라고 해서 누(樓)와 절과의 관계와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남유기’에 남아 있다. 1727년 김도수라는 사람이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관직을 그만두고 쌍계사, 불일암, 칠불사 등을 거쳐 진주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유람을 끝내고 ‘남유기’라는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 촉석루가 한때 절터였음을 밝힌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누대는 옛날에 상원루(狀元樓)라고 불렸는데, 용두사(龍頭寺)의 승려인 단영(端永)이 중창하여 백담암(白澹庵)이라고 하였다가 강 가운데 돌이 뾰쪽뾰족한 것을 보고 마침내 이름을 고쳐 촉석루(矗石樓)라 하였습니다.”

다만 어떤 기록도 용두사의 창건 연대를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다. 기록을 토대로 추측하면 길게는 신라, 짧게는 고려시대로 잡을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영남루 전경. 신라 5대 사찰에 들 정도로 대찰이었지만 고려 말기 화마로 폐사돼 누각만이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영남루 전경. 신라 5대 사찰에 들 정도로 대찰이었지만 고려 말기 화마로 폐사돼 누각만이 전해진다.

사찰을 강가에 만든 이유는?
그런데 혹시 글을 읽다가 궁금해졌을지도 모른다. 왜 강가 절벽 위에 절이 들어섰을까?

일단 강가에 사찰이 들어선 건 단순히 풍광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평양의 영명사, 밀양의 영남사, 진주의 용두사는 모두 번화가였거나 또는 번화가에서 멀지 않았고, 또 시내 중심부에서 모두 올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 초까지 이렇게 사찰을 지을 때 지역의 랜드마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려한 흔적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낮은 건물 속에 우뚝 솟은 탑은 지금처럼 도심에 선 ‘타워’ 기능을 하기도 했다.

또 하나, 군사나 행정적 필요성 그리고 더불어 비보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다. 평양의 영명사나 밀양의 영남사가 ‘왕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더불어 여주 신륵사 등 강가에 세워진 사찰들이 ‘비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품고 있음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하튼 이제 조선의 3대 누각에서 사찰의 흔적을 찾는 일을 쉽지 않다.

또 하나, 빠지면 섭섭해 할 누각이 하나 있다. 조선의 3대 누각은 앞에 말한 바와 같지만 흔히 ‘영남의 3대 누각’이라고 해서 영남루, 촉석루와 함께 울산의 태화루가 언급되기도 한다. 태화루 역시 사찰의 부속 건물이었다. 태화루는 최근 복원이 됐지만 그 터와 규모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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