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순천대 교수 ‘불교학연구’서 주장

고려末 수륙재, 칠칠재로 정착
조선 왕실도 국행수륙재 봉행
차츰 폐지되며 예수재 등장해
조선 중기 칠칠재로 설행·전래
“韓불교만의 독창 의식” 의미

지난 2018년 서울 봉은사에서 설행된 생전예수재의 모습. 현재 봉은사는 생전예수재를 무형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 중이다.

생전예수재는 불교에서 행하는 천도의식 중 하나다. 49재와 수륙재는 망자와 무주고혼을 위한 불교 의식이지만 생전예수재는 산 사람을 위한 것으로 차이가 있다. 그간 생전예수재는 고려시대 설행된 것으로 추정돼 왔지만, 조선 중기 이후 칠칠재 형태로 설행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종수 순천대 사학과 교수는 〈불교학연구〉제61호에 게재한 논문 ‘조선시대 생전예수재의 설행과 의미’에서 생전예수재의 성립시기와 개념을 재검토하고 불교사적 의미를 조명했다.
우선 이 교수는 문헌들을 통해 수륙재 정착과 생전예수재의 분화를 분석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고려시대 수륙재와 관련해 가장 이른 기록은 최승로가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 28조’의 2번째 조항에서 광종대의 지나친 불사를 비판하며 이를 축소하고 수륙재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금의 칠칠재 형식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진정국사 천책이 남긴 ‘수륙재소’에 보면 세 번에 걸쳐 설행했다고 한다”며 “당시 수륙재의 방법과 절차를 분명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경전에 의거해 거행했음으로 최사겸이 가져왔다고 하는 〈수륙의문〉에 따라 설행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이 시작된 수륙재는 공민왕비 노국공주가 사망한 뒤 나옹혜근이 국행수륙재를 주관할 정도로 왕실의 상례로 정착될 정도로 성행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며 국가적 불교행사는 차츰 폐지되거나 축소됐지만 수륙재는 〈경국대전〉에 면세전으로서 ‘국행수륙전’이 인정되며 계속 설행됐다.

조선시대 왕실의 수륙재는 무주고혼을 위한 천도재이자 망자를 위한 제례로서 봉행됐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폐지됐다. 다만 민간에서는 기양의례(祈禳儀禮)로서 수륙재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설행됐다.

이 교수는 왕실의례로서의 수륙재가 폐지되는 시기에 예수재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고려시대에 이미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이 전래·간행됐지만 명종대 이전까지 예수재가 독립적으로 설행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면서 허응보우가 청평사에서 예수재를 설행하고 ‘예수시왕재소’를 남긴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와 함께 16세기 발행됐던 의식집의 서문 등을 분석하고 예수재가 조선 중기 이후 수륙재에서 분화돼 설행되기 시작했음을 주장했다. 1721년 중흥사에서 간행된 〈천지양명수륙재의범음산보집〉 서문에서 석실명안(1646~1710)은 서문에서 “지리산 승려 지환이 당시 수륙재 의식문을 산삭해 산보집을 편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지환은 당시 유통되던 소례·대례·예수문·지반문·자기문 등의 의식문을 산보한 인물이다.

이 교수는 “지환이 수륙재 의식문을 산보하면서 참고한 것 중에 예수재 의식문이 포함됐다. 이는 수륙재와 예수재 의식의 유사성을 의미한다”면서 “수륙재가 고려시대부터 설행됐음을 비춰보면 조선 중기부터 사례가 확인되는 예수재는 수륙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날 수륙재와 예수재가 칠칠재 형식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도 조선시대 수륙재와 예수재 전개 및 분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이 같은 칠칠재로서 예수재의 설립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이미 명맥이 끊어졌던 예수재가 조선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성립됨으로써 조선불교만의 독창적인 의식됐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의 논문은 〈불교학연구〉 제61호 특집 ‘조선시대 불교 심성과 세속적 융합’에 게재된 것으로 최종석 동덕여대 국사학과 교수의 ‘조선 초기 종교 심성의 전환과 불교’와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의 ‘조선 후기 불교와 민간신앙의 공존 양상’도 함께 수록됐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