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만일 의미하는 한자 ‘或’
‘창 들고 지킨다’는 어원 가져
心 추가된 ‘惑’도 의미 비슷해

惑, 미혹함 따른 ‘회의적 의심’
감언이설·삿된 언동에 휘둘려

신종코로나보다 위험한 ‘미혹’
‘방하착’ 통해 내려놓고 살펴서
의심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혹시 병이 났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안절부절했었지그룹사운드 사랑과 평화의 곡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혹시()’자는 그 자체로 혹시만일이라는 뜻을 가진다. ‘()’자는 창 과()’자와 입 구()’, ‘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자는 고대의 창을 그린 것으로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성벽을 표현한 자와 경계를 표현한 이 더해진 ()’창을 들고 성()을 지킨다는 뜻이다. ‘()’자는 이렇게 성을 경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혹시 모를 적의 침입을 대비한다는 의미가 생기면서 혹시만약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자는 결국 혹시라도 적이 쳐들어올까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마음 심()’자가 더해진 ()’자도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성을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며 수상하게 여긴다는 뜻이 더해진 ()’자는 그런 의미에서 의심하다미혹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은 불교에서 번뇌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수면(隨眠)’ 또한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주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마음속에 사악한 성격과 성향으로 잠재하며 조건이 맞을 때마다 표면화되기 때문에 마음을 뒤따르며 잠자고 있다는 뜻으로 수면이라 한다.

()’라는 변하지 않는 자아라는 착각의 무한 순환의 첫 고리로 등장하기도 한다. ((()라는 괴로움의 도돌이표는 십이연기(十二緣起)12()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은 무명(無明)과 애()와 취()3()에 해당한다. 십이연기의 순관은 이와 같은 혹()이 바탕이 되어 노사(老死)의 고()가 생긴다는 견해로, 결국 마음속에 있는 아집을 중심으로 하는 그릇된 생각이나 성격을 모두 혹()이라 할 수 있다.

이 혹()은 다시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으로 나눈다. 견혹은 이론적이고 지적인 미혹으로 속칭 안다병에 해당되고, 주로 후천적인 것으로서 바른 이론을 듣고 잘 이해하기만 하면 즉시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수혹은 사혹(思惑)이라고도 하는데, 습관적이고 정의적(情意的)인 미혹으로서 기질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좀처럼 고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습관과 기질에 의한 끈질긴 미혹으로서 꾸준한 수행을 통해 점차 조금씩 제거되는 것이다.

()에는 미혹한 상태에서 하는 회의적 의심이 포함되어 있는데, 부처님은 상가와라경(S46:55)에서 이 마음 상태를 마치 물그릇이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흙탕물이고 어둠 속에 놓여 있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현재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더 무서운 혹시라는 미혹과 의심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것에 감염되어, 세간의 시시비비(是是非非)에 혹(, )해서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할 때는 방하착을 사용해야 한다. 작금(昨今)은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삿된 법을 근절하거나, 편안히 가라앉히거나, 또는 바로 벗어나거나 하는 놓음의 지혜를 통해 혹시라는 의심의 번뇌에 물든 병난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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