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국 초기의 禪僧 단체의 실태

각현, 남방 최초 선수행단체 설립
북위 통치자 대부분 불교 신봉해
승실의 ‘安心禪法’ 북방서 성행돼
‘공관’ 닦는 천태종에 실상선 등장

 

중국의 선종하면 제일먼저 떠오른 것은 달마대사의 커다란 눈과 덥수룩한 수염 및 소림면벽이 떠오른다. 특히 한국에서는 달마 이전의 중국선법 및 단체에 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도 연구된 바도 거의 없다. 하지만 중국 불교사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중국선종이 태동하기 전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초기에 여러 종류의 선법과 선승 단체가 지속적으로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기도 했다. 물론 중국에 유입된 초기 선법은 이후 중국선종에서 발생된 달마선 →조사선→공안선→문자선→간화선→묵조선 등과는 차별점이 존재하지만, 엄밀히 들여다보면 중국선종에는 분명히 초기 선법의 잔해 및 자양분이 투영되어 있다. 다만 우리들이 발견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세존께서 선정을 통해서 성불하셨듯이, 禪수행은 일체중생들이 고해에서 벗어나 해탈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쳐야할 중요한 관문이다. 경전에 보면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에도 항시 많은 상수대중들과 함께, 때로는 많은 보살들과 함께 아란야에서 결과부좌를 하시고 선정에 들곤 하셨다. 아란야(阿蘭若)는 범어로 ‘aranyaka’의 음역이다. 의역하면 적정처(寂靜處), 공한처(空閑處), 무정처(無淨處), 원리처(遠離處), 공처(空處) 등으로 칭한다. 즉 세존의 제자들이 항상 모여서 수행을 하던 장소로 지금으로 보면 불교사원을 말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초기불교에서도 사람들이 집단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전의 말미에는 항상 부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는 정경이 그려지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또 한편 인도의 불교 유적지에서도 집단적으로 수행한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아잔타석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중국의 신장자치구에는 지금도 인도의 아잔타석굴과 같은 크고 작은 석굴들의 유적이 남아 있다. 비록 석굴안의 벽화가 퇴색되기는 했지만, 당시 승려들의 수행 모습을 그린 회화가 남아있다.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고 나서 처음부터 선수행을 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도 산발적으로 선수행이 이루어 진 것 같으며, 뜻있는 사람들이 함께 집단적으로 모여서 선수행을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물론 처음부터 선종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아니고, 후에 중국선종에서 표방했던 조사선의 성질을 지닌 선법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 중국에서 최초로 선수행을 하는 단체가 생겨난 시기는 언제일까? 기록에 의하면 동진 시기에 인도승 각현(覺賢ㆍ佛陀跋陀羅)이 일찍이 장안성에서 선업(禪業)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한다. 이때에 구마라즙 또한 장안에 있었는데, 또한 그를 따르는 문도가 3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후 각현은 남방에 이르러서 여산혜원의 도움으로 사찰 내에 선림을 건립했다. 이것이 중국 남방의 최초 수행 집단 출현이다. 혜원(慧遠ㆍ334-416)은 이미 많은 대중과 염불정토 결사를 하고 있었다.

그림, 강병호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선수행을 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구마라즙을 따르는 무리들 이외, 북위 시기에 일찍이 현고(玄高)라는 승려가 주도하는 선수행 무리들이 출현한 적이 있다. 현고는 각현의 제자로서 〈고승전〉에 보면 수백 명이 넘는 무리들로 구성된 선수행자들을 지도하는 영도자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 승단은 선수행을 하는 일정한 장소가 없었고, 또 때로는 기이한 의식 내지 행동으로 대중을 현혹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때로는 누차 통치자들로부터 환대를 받기도 했으며, 또 때로는 여러 번 통치자들로부터 내몰림을 당하기도 했다. 현고 본인이 조정의 간섭으로 인해서 마침내는 위나라 태무제(太武帝)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그의 제자들도 쫓김을 당해서 각자 분산되었으며, 최후에는 모두 남방으로 가서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현고의 법을 계승한 인물로 일대 명승인 불타(佛陀) 혹은 발타(跋陀ㆍ위의 각현과는 다른 인물)라고 칭했던 인물이 있다.

북위 효무제(孝文帝) 시기에, 현고의 뒤를 계승한 불타(佛陀[跋陀])가 이끄는 하나의 승단이 생겨났다. 불타발타는 선종의 발원지인 소림사를 창건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 선종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5세기에 중국에 온 그는 먼저 북위의 평양(平壤) 구도(舊都)에 머물렀으며, 효문제의 예경을 받았고, 황제는 그를 위해서 선림을 건립했다. 또 국가가 재원을 충당해서 그로 하여금 제자들을 양성하게 하여 선수행 실천을 도왔다. 북위가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한 후에 불타발타도 함께 따라갔다. 효문제는 그를 위해서 사원을 건립하였는데 그곳이 바라 그 유명한 숭산 소림사이다.

불타발타가 이끄는 승단과 현고(玄高)가 주도했던 승단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불타발타의 제자들은 모두 정해진 장소에서 전문적으로 선수행을 하였다. 때문에 비로소 통치계급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과 적극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꼭 통치계급이 본인들의 국가 통치 수단으로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역사적으로 북위 정권의 통치자 대부분은 불교를 매우 신봉하였다. 비록 그들이 통치자의 계급에 속하지만, 불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역시 나약한 중생으로, 신앙적으로 승보를 공양한다든가 해서 공덕을 쌓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효문제가 불타발타를 위해서 사원을 건립한 것은 기타태자가 기원정사를 지어서 세존께 기증한 것 같은 예라고 생각된다.

불타발타의 제자 가운데 승조(僧稠) 역시 당시 승단의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불타발타로부터 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불타발타는 그를 높이 평가를 했다. 〈속고승전〉에 의하면 “총영의 동쪽에서 선학의 최고는 그 사람뿐이다”고 했다. 위나라 효문제 역시 그를 특별하게 대하였으며, 그를 위해서 전문적으로 선수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지어주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오로지 선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승조는 선수행에 있어서 매우 높은 경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많은 신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사방에서 명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또 그는 위(魏)와 제(齊) 두 나라 조정으로부터 예경을 받았으며, 황실로부터 30여 년 동안 공양을 받기도 했다.

북위 시기에 승단의 영도자로서 승실(僧實)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승실은 인도승인 륵나마제(勒那摩堤)의 제자였다. 륵나마제를 의역하면 보의(寶意)이다. 그가 주도했던 선수행은 ‘안심법문(安心禪法)’이다. 이 수행법은 어떤 때는 염불선(혹은 관세음을 염하는 것)으로 선수행을 하였다. 역시 황실의 지지와 공양을 받았다. 북방에서 매우 성행하였다고 한다. 다만 달마대사가 말하는 ‘안심법문’과 문자는 같지만 전혀 다른 내용의 안심법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천태종의 실상선(實相禪)의 기초도 이 시기에 발생되었다. 즉 실상선은 천태종의 수행법으로 보리달마의 수행법이 유입되기 전부터 이미 중국에서 태동하였고, 초기 선법을 토대로 나름대로의 선법을 체계화 시키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선의 내용 및 사상, 역사 등의 자체에 대한 분량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개요 및 중요한 핵심 의제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실상선은 〈중론〉 〈지도론〉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을 바탕으로 공관(공관ㆍ실상관)을 닦는 선법이다. 구마라즙이 전한 선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혜문(惠文:535-557) 혜사(慧思:514-577) 지의(智?ㆍ583~597) 선사가 서로 전승하고 계승해서 설립한 중도실상선(中道實相禪)이다. 즉 혜문은 〈중론〉 〈지도론〉을 의지해서 선법을 창시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중론〉을 바탕으로 하는 ‘공(空)ㆍ가(假)ㆍ중(中)’ 등은 이경(理境ㆍ이치를 체현하는 경계)을 수행하는 관법이고, 〈지도론〉을 바탕으로 하는 ‘삼지일심(三智一心)’ 혹은 ‘일심삼관(一心三觀)’을 바탕으로 일경삼제(一境三諦), 즉 삼제원융(三諦圓融)인 제법실상(諸法實相)에 이르는 체험 관법수행이다. 지의선사는 혜문 혜사의 이러한 관법수행을 계승해서, 본인의 지관 수행법 체계를 확장 발전시켰다.

지의선사는 〈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에서 ‘두 가지의 수행관이 있는데, 하나는 대치관(對治觀)으로 오정심관 가운데의 부정(不淨) 자비(慈悲) 계분별(界分別) 수식(數息)관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正觀(정관)으로 제법무상(觀諸法無相)을 관하는 것이다. 즉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모두 자성이 없는 무자성이며, 실존하는 자성이 없는 관계로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소멸하기 때문에, 영원한 나도 영원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곧 실상을 관하기를 권하는 수행법이다. 즉 유상관(有相觀ㆍ현상)을 통해서 무상관(無常觀ㆍ본질 실상)에 진입하게 하는 관법수행을 말한다. 그러니까 유아(有我)의 집착으로부터 무아(無我)의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 실상선(實相禪)의 핵심 의제이다.

결론적으로 중국 초기에 나타난 문자로 기록된 선승단의 중요한 시기는 남북조(南北朝)시대였다. 이것은 북방에서 선수행이 유행하던 풍조로, 곧 선정을 중시했던 그 당시의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풍토가 조성된 이면에는 의심할 여지 없는 조정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며, 당시의 통치계급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초기 선법에 대해서 황실의 구성원 및 조정의 사대부들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의 선승들이 초기 선법을 수행하면서 나름대로 계율이라든가, 승려로서 직분을 충실히 소화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위에서 언급한 승단들이 통치계급 및 황실의 보호와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여일하게 그들의 외호와 우대 내지 예경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때로는 관방으로부터 압력과 제제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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