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 차 문화의 발흥

항주박물관 소장 다연.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정치 환경을 극복하고 고려를 건설한 왕건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고려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민심을 수습하여 국가 안정과 번영을 꾀하고자 했다.

특히 선종은 고려 건국 이후, 왕실의 후원 아래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하여 교단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형성은 고려 초기 선종이 불교 교단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불교계가 당면했던 시대 환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불교의 영향력을 확산시킨 동력이었다. 아울러 차 문화가 역동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차 문화가 어느 시대보다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교의 흥성에 의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고려시대 귀중품 분류된 茶
대규모 불교행사 거행하면서
왕이 직접 차 갈아 공양 올려
후대에는 백성들 원망 야기해

더구나 왕실의 후원과 사원의 넉넉한 경제력 또한 차 문화가 발전한 요인인데, 이는 송나라와 비견되는 질 높은 차를 생산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물론 관료 문인으로 확산된 음다 풍속은 그들의 문예적인 안목이 더해져, 한층 격조 있는 차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 토층을 넓힌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차 문화를 형성하는데 필수 요건인 명차와 찻그릇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고려는 고려색채를 함의한 청자 찻그릇을 독자적으로 완성했고, 고려 자체적으로 명차를 생산했다는 점에서 괄목할 흔적을 남긴 시대였다.

물론 차 문화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친 변수를 하나둘로 지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교의 성쇠(盛衰)가 차 문화의 발전과 쇠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차 문화는 정치적인 환경뿐 아니라 풍요로운 경제적인 조건, 그리고 차를 애호했던 계층의 안목이 함께 이룩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차 문화를 살펴보면서 간과할 수 없는 관점은 결국 차를 향유하며 문화적인 토양을 풍요롭게 했던 문인의 지적 수준이나 안목이 어느 시대든 차 문화의 문화 수준을 가늠케 하는 잣대라는 점이다.

한편 고려 왕실은 연등회, 팔관회 등을 개최하여 불교를 중심으로, 나라의 응집력을 결집하려 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통치 입장은 943년에 지은 훈요십조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특히 훈요십조1조는 태조의 불교에 대한 입장을 나타낸 것이며, 6조는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 행사에 대한 태조의 소망을 드러냈다. 특히 왕실에 주관한 팔관회, 연등회에서 차가 올리는 의례 절차가 있고, 공덕재 같은 국가 의례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중요한 공양물이 차였다. 이러한 정황은 훈요십조6조에서도 서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여섯 번째, 내가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이다. 연등(燃燈)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八關)은 천령(天靈) 및 명산(名山)ㆍ대천(大川)ㆍ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의 간신들이 가감(加減)할 것을 건의하여 아뢰면 금단(禁斷)하라. 나 또한 당초에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팔관과 연등회가 열리는 날에 국기를 범하지 않고 군신이 동락하여 공경히 거행하라.(其六曰, 朕所至願, 在於燃燈八關, 燃燈所以事佛, 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後世姦臣建白加減者, 切宜禁止. 吾亦當初誓心, 會日不犯國忌, 君臣同樂, 宜當敬依行之)

앞의 내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태조는 국가의 중요한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왕과 백관들이 친히 사원에 나아가 이 행사에 참여했다. 태조는 이런 불교 행사를 내가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연등회와 팔관회의 행사 성격은 조금 다르다. 연등회는 부처님을 섬기기 위한 불교 행사였다면, 팔관회는 하늘과 명산, 대천, 용신에게 올리는 의례였다. 특이한 점은 팔관회에는 용, 봉황, , 코끼리를 탄 화랑이 등장하고 사선악부(四仙樂部)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분명 코끼리는 불교를 상징하는 것이며, 사선은 영랑, 술랑, 남랑, 안상은 선랑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신라의 전통 사상을 잇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청주 사뇌사지 다마.

물론 팔관회에는 태조의 진전(眞殿)과 역대 국왕을 참배하는 의식도 거행되어, 고려는 불교 행사뿐 아니라 화랑 사상과 제천의식, 조상숭배를 국가적으로 치렀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국가 행사 규모의 불교 행사로 팔관회, 연등회는 물론 공덕재, 수륙재, 무차회 등과 같은 여러 종류의 불교 행사를 거행했는데, 이는 민심을 규합하고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밖에도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백성에게 드러내기 위한 행사이기도 하였다. 특히 공덕재를 거행하면서 왕이 직접 차를 갈아 부처님께 올렸다. 그 폐단을 지적한 것은 최승로(崔承老 927~989)이다. 그의 시무 282조에 차와 관련된 내용을 이렇다.

짐짓 듣건대 성상께서 공덕재를 베풀기 위해 혹은 몸소 차를 갈고 차 싹을 연마한다고 하오니 신은 성체가 피로해지심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이 폐단은 광종 때부터 시작된 것이니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미혹되어 죄업을 없애고자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불사를 일으킨 것이 많았습니다.(竊聞聖上 爲功德齋 或親茶 或親磨麥 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 此弊始於光宗 崇信讒邪 多殺無辜 惑於浮屠果報之說 欲除罪業 浚民膏血 多作佛事)

시무 28는 성종 1(982)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으로 재직하던 최승로가 올린 상소문이다. 성종 16월에 경관 5품 이상자들에게 시정 득실을 논하는 봉사(封事)를 올리게 했는데 이때 최승로가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시무 28를 올린다. 그의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은 바로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의 치적을 평한 글이며, 시무 28는 성종이 이루어야 할 정치 개혁을 28조 조목으로 분류하여 최승로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 상소문이다. 그의 시무 28에는 지나친 왕실의 불교 비호나 불교 행사로 인한 폐단을 비판한 내용은 제 2, 4, 6, 8, 10, 16, 18조에서 언급했다. 차와 관련된 것은 앞에 언급한 제 2조의 내용 중에 들어 있는데, 성종이 공덕재를 베풀기 위해 몸소 차를 갈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당시 차는 선진문물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귀중품이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사품이었다. 당시에는 병차(餠茶, 일명 떡차)의 제다법이 더욱 발전되어 단차(團茶)를 생산할 무렵이다. 단차를 만드는 공정은 당대에 만들었던 병차보다 수많은 노동력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병차는 찻잎을 따서 증기에 찐 후, 찐 찻잎을 절구에 찧어서 틀에 찍어내면 완성되는 것이지만 단차는 찻잎의 크기라든지 차를 만드는 과정이 더욱더 세밀하다.

더구나 한 잔의 차를 얻으려면 차를 분쇄하여 가루로 만들어야 하므로 다마(茶磨, 차 맷돌)나 다연()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섬세하고 고운 가루차를 얻기 위해 왕이 몸소 차를 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한 것이다. 이런 성종의 심려는 결국 통치에 몰두해야 할 왕의 처신으로는 불합리하다는 것이 최승로의 지적이었다. 물론 왕이 친히 차를 갈아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덕은 왕 자신에겐 소중한 일이겠지만 먼저 국가 대사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군주로서의 덕목을 지적하고 나선 셈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화려해지는 불교 의례가 결국 민폐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아닐까.

한편 공덕재를 베풀기 위해 성종이 갈았던 차와 맥()은 어떤 차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차는 맥보다 큰 차 싹으로 만든 것이며, ()은 맥아(麥芽)를 의미한다. 바로 맥아는 최고급 차를 만드는 여린 차 싹으로, 모양이 보리알처럼 작디작은 여린 찻잎을 말한다.

차에 타물(他物)을 넣지 않고 순수한 찻잎으로 차를 만든 것은 8세기 이후이다. 바로 육우(陸羽)가 완성한 병차인데, 이는 죽순처럼 생긴 여린 잎, 혹은 일창(一槍)만을 사용하여 만든다. 그런데 맥아는 육우가 말한 죽순 같은 차(茶之?)”보다는 작고 여린 찻잎으로 만든 차이다. 11세기에는 이보다 더 여린 찻잎을 사용하여 용봉단차를 만들었고, 12세기에 이르면 이보다 더 정밀하게 만든 소용봉단과 밀운용(密雲龍) 등이 등장하다가 송 휘종 때 최고급 백차(白茶)가 유행한다. 이는 결국 채다 시점과 제다법이 더욱더 정밀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차는 상대적으로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런 최고급 차를 만들었던 송대나 고려시대처럼 차 문화가 화려하고 정밀함을 선호했던 시기에는 이런 차를 만들기 위해 백성이 감당할 고통이 컸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에 차 문화는 백성의 원성을 야기한 민폐 중의 하나였다.

고려시대 차는 왕실 귀족이나 수행승, 관료 문인의 전유물로 왕의 하사품이었다. 처음으로 차를 하사한 사례는 신라 경덕왕 19(760)이다. 당시 두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자, 월명 스님(月明師)이 도솔가를 지었으니 즉시 괴변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왕은 월명에게 품차 일습을 하사하고 108 수정 염주를 내렸다(賜品茶一襲 水精念珠百八)”고 하는데, 이는 삼국유사〉 〈감통에서 확인된다. 고려시대 차를 하사한 예는 고려사〉 〈세가, 태조 2태조 14(931)년에군민에게 차와 복두를 내리고 승려에게 다향을 각기 차등 두어 내렸다.(太祖十四年...軍民茶醒頭 僧尼茶香有差)”라고 한 것에서 확인되는데, 복두는 관모 같은 모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고려 초, 왕은 군민이나 승려에게 차를 하사했던 것이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