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 스님(조계종 가사원 도편수)

가사 얻으려 가사불사 동참했다
법장 스님 따라 가사 도편수 돼
수십 년간 전국사찰서 가사 지어

가사원서 ‘통일가사’ 제작하지만
사찰 자체 가사불사는 줄어들어
가사 전통도 점차 사라지는 현실

불상·불복장보다 중요한 가사
출가사문들이 만드는 법 배워야
“우리 것, 우리가 지켜야 빛난다”

무상 스님은… 열네 살 때 속리산에 소풍 왔다가 어느 스님이 가사를 수한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서당에 찾아가 한문을 공부하던 중 원적사 아랫마을에서 금강경 독송을 듣고 서암 스님을 찾아갔다. 서암 스님에게 금강경 오가해를 들으며 1961년 정월 초삼일에 서당 선생에게 세배 간다고 한 뒤 출가했다.그렇게 서암 스님 인연으로 동화사에서 월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3년 3월 15일 사미계를 수계했다. 1965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고 제방선원을 돌면서 안거 수행했다. 현재 속리산 법주사에 주석하면서 조계종 가사원 도편수를 맡고 있다.

불교에서 가사(袈裟)는 생명이다. 가사 한 벌과 발우 하나. 태초의 불교도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발(衣鉢)이자 외도들과 구분되는 불교만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성보다. 그렇기에 출가사문에게 가사는 곧 계율의 상징이요, 흐트러진 심신을 바로잡는 장군죽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불교 가사의 맥은 더없이 엷다. 가사는 소중하다고 여겼지만 정작 가사를 짓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윤달이 낀 올해, 전국 곳곳의 사찰에서 가사불사가 이뤄져야 하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가사는 왜 만들어야 할까? 그리고 가사 짓는 일을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전통으로 이어나가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128, 속리산 법주사를 찾아가 조계종단의 사실상 마지막 전통가사 도편수인 무상 스님을 만났다.

가사 자로 가사 부위를 설명하는 무상 스님.

승려를 승려로 만들어주는 가사
부처님 조성하고 복장물 봉안하는 것보다도 가사가 먼저야. 근데 스님네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해. 해탈복이다, 청정의다, 복전의다. 온갖 의미는 다 갖다 붙여놓고 자기 손으로는 만들려고 안 하잖어. 별다른 이유가 있겠어?”

무상 스님에게 한국불교에서 가사불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묻자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듯 호통 아닌 호통이 쏟아졌다. 가사 짓는 일이 고귀한 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조계종 현실에 대한 호소다. 1960년대부터 가사를 만들어온 노스님의 담담한 목소리가 한편으론 체념처럼 다가왔다. 목소리는 높였지만 스님도 이런 현실이 안타까운지 한동안 눈앞의 찻잔에만 눈길을 보냈다.

조계종은 2000년대 초 법계위원회가 꾸려지고 의제실무연구회의를 수년간 실시하며 통일의제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스님들의 가사가 통일되지 않아 승복업체 로비 의혹이나 원단 공급에 대한 독점 논란 등이 암암리에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계종은 2006년 삼보륜이 직조된 이른바 통일가사를 도입했다. 그러면서 조계종은 서울 일원동 전국비구니회관에 가사원을 설립, 구족계 수계산림이나 각종 법계품서식에서 스님들에게 주어지는 가사를 가사원이 도맡아 제작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가사를 손수 만드는 스님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재봉기술이 발달하고 많은 인력이 필요치 않아졌기 때문인지, 사찰의 가사불사를 승복업체에 맡긴 것인지, 아니면 가사를 만드는 일 자체에 관심이 떨어진 것인지 명확한 이유는 무상 스님도 알 수 없었다.

가사 박사는 많어. 사회에서 의상학인가 뭔가 공부한 사람들이 절에 오가며 주워듣고 사진 찍은 걸로 논문을 쓰지 않았으려나. 간혹 양장을 잘하는 분들이 가사 만드는 걸 배워서 하기도 하고. 근데 가사를 수해보면 어딘가 어색한 게 꼭 있거든? 가사는 그 가사를 수하는 사람에게 딱 맞고 편안해야 돼. 그대로가 작품이니까.”

무상 스님은 1960년대 중반, 선방에 방부를 들이며 수행하다가 가사불사에 동참했다. 당시는 가사 한 벌조차 쉬이 구할 수 없던 시기였다. 스님은 대전 심광사의 가사불사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때 가사불사의 편수는 1930~40년대 법주사 주지를 역임한 장석상 스님 손상좌인 법장 스님이었다. 법장 스님이 만든 가사를 최고로 여기던 시절이다.

무상 스님은 가사 한 벌을 얻기 위해 법장 스님 옆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많게는 100명이 모여 한쪽에선 천을 재단하고, 다른 쪽에선 바느질을 하고, 누군가는 다리미질을 했다. 편수인 법장 스님은 그 모든 과정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심광사 가사불사를 마치고 무상 스님은 다시 선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안거가 끝날 때마다 법장 스님에게서 가사불사를 같이 하러 가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무상 스님은 법장 스님을 따라 꾸준히 가사불사에 참여했다.

윤달이 든 어느 해, 통도사와 해인사 삼선암에서 동시에 법장 스님에게 가사불사를 도와달라고 요청이 왔다. 이때 법장 스님은 무상 스님에게 자신이 쓰던 대나무 가사 자를 건네주며 삼선암의 가사불사를 맡게 했다. 법장의 가사 맥이 무상에게 이어진 것이다.

무상 스님이 과거 직접 가사불사를 할 때 사용하던 가사 자.

헤아릴 수 없는 가사공덕
옛말에 가사는 바느질 세 뜸만 떠도 복이 된다고 한다. 무상 스님에게 가사 공덕을 물었다. 스님은 경전 속 금시조 이야기를 들려줬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용의 새끼를 잡아먹던 금시조가 있었어. 용들은 금시조한테 자꾸만 새끼를 빼앗기니 속이 타들어갔지. 그래서 용은 부처님을 찾아가 새끼를 빼앗기지 않을 방법을 물어봤어. 그때 부처님이 수행을 열심히 한 스님들 가사를 얻어다가 세치 길이만큼 나눠서 등에 붙이라고 했거든? 용들이 그 말씀을 따라 가사를 붙이니 금시조가 새끼 빼앗으러 왔다가 스님들만 있다며 돌아간 거야. 가사불사가 끝나고 천 조각을 얻어가려는 이유가 여기에서 시작됐지.”

무상 스님은 이런 경전이야기에 이어 자신이 가사불사를 맡아오며 직접 경험한 불자들의 영험담도 들려줬다. 무상 스님에 따르면 스님이 절을 옮겨 다니며 주지를 할 때 어느 부부가 계속 가사불사에 동참했다. 사고로 젊은 아들을 잃은 부부였다. 이들은 산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도 공덕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가사불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남편이 꿈자리를 털어놓았다.

스님, 저는 소원이 꿈에서라도 죽은 제 아들 얼굴 한 번 보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들이 꿈에 나왔어요. 아들이 말하기를, 엄마 아빠가 가사불사에 시주한 덕에 좋은 곳에 와있다고 하는 겁니다. 제 소원을 이뤘습니다. 가사가 뭔지도 모르고 좋다는 얘기에 부인 따라서 가사불사에 동참한 건데 그 덕분에 많은 걸 얻었습니다.”

무상 스님이 굳은 살 깊게 박힌 두 손으로 옛날에 쓰던 가사 자를 꺼내들었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가사 자에는 치수를 표시한 한자와 한글, 그리고 까만 경계선들이 적혀 있었다. 지금은 쓸 필요가 없지만, 과거에는 정확한 재단을 위해 수십 개의 자를 들고 다녔다. 스님은 옛 가사는 아니지만 지금의 통일가사를 바닥에 펼쳐놓고 가사 곳곳을 자로 짚었다.

가사의 매듭 ‘연봉’을 가리키는 무상 스님.

가사는 조각과 조각이 만나는 조엽이 중요해. 여기서 바느질 한 뜸 어긋나면 전체가 틀어져. 모서리에는 천왕문첩이 들어가고. 하품(9·11·13)은 기다란 조각 2개랑 짧은 것 1개가 이어져 1조가 돼. 9조 가사면 총 아홉 줄이 되는 거지. 중품(15·17·19) 상품(21·23·25)으로 갈수록 긴 것이 하나씩 늘어나고. 옛날에 손으로 가사 하나 만들려면 20일은 족히 걸렸어. 어느 곳에서, 누구와 하더라도 일념으로 만들지 않으면 좋은 가사는 절대 안 나와.”

가사 장인의 손에 세월을 함께한 가사 자가 쥐어지자 방안에 열기가 도는 듯 했다. 지금은 드물게 가사원에 찾아가 후학들을 지도하는 노스님이 됐지만, 혈기왕성한 시절 누구보다 많은 가사를 만들었던 무상 스님 마음속엔 여전히 가사뿐이다.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가사장이라는 표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선장, 누비장, 자수장까지 바느질 관련 무형문화재는 있지만 가사장은 없다. 불화장이나 단청장을 봤을 때 종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무상 스님의 생각을 물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그게 되겠어? 내가 할 줄 모르면 누군가 인재를 키우기라도 해야 되는데 안 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법계품서할 때 가사 담아주는 가사봉투에 증명, 편수, 시주자까지 가사불사에 함께한 사람들 이름이 들어 가야해. 근데 편수는 없거든. 가사장은 언감생심이야. 그나마 몇몇 스님들이 전통방식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니까 다행이지. 나중에 가사 형태만 알고 참뜻은 모르는 일반사람들을 가사 전문가라고 하면 안 되잖어.”

무상 스님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목소리 높여 격한 심정을 토해냈지만, 그것은 결국 가사를 향한 애정이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출가사문이 가사 짓는 일에 관심을 쏟아 전통이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애절함이다.

우리가 가사를 왜 수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돼. 외도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자신의 스승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거짓말 했잖아. 그래서 만들기 시작한 가사는 출가사문을 출가사문답게 만들어주는 법의(法衣). 당연히 가사공덕이 클 수밖에 없지. 가사불사는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돈을 안 내도 가사 짓는 도량에 와서 일손만 거들어줘도 돼. 가사공덕이 널리 알려지면 가사의 맥도 다시 살아나겠지.”

인터뷰를 마치고 무상 스님은 처소 밖까지 기자를 배웅했다. “신문은 보내주지 않아도 되니 좋은 글이나 써달라는 스님의 마지막 인사가 모든 불자들에게 공덕 쌓는 계기로 전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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