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선이야기] 3. 유불도 융합과 宋學
[인물로 읽는 선이야기] 3. 유불도 융합과 宋學
  • 정운 스님/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20.02.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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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儒·道’ 회통 근간 이루다
삼교회통을 주장했던 천태지의의 진신보탑. 중국 절강성 천태현 천태산 지자탑원에 조성돼 있다.

송나라로 접어들어 나라를 통일한 태조는 불교에 관대했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부터 지방 절도사들의 권력이 매우 커져 있는 상태였다. 태조는 지방 절도사와 관리들의 권력을 방지코자 하나로 통일된 문인중심주의 정책을 폈다. 곧 불교도 국가의 권력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런 경우는 송대만이 아니라 중국 역사상에 자주 드러났고, 우리나라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체로 유불 융합을 주장한 때는 불교가 약세에 몰릴 때, 불교와 유교의 차이점을 논하며 불교의 우수성을 밝혔고, 유불의 합일을 주장하며 황제에게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원고에서는 유불융합의 시대적·공간적 차원에서 살펴보자.

유불을 주장한 선사와 문인들

중국에서 유불도 삼교 합일을 처음으로 주장한 이는 양나라 때 승우(僧祐, 445~518)이다. 그는 〈홍명집(弘明集)〉을 편찬했는데,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래 남북조시대를 거쳐 양나라 때까지의 유불도 문제를 다룬 책이다. 승우는 서문에서 불교를 비방하는 자들에 격분해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불교의 유익한 내용을 수집한 것이다.

다음 〈광홍명집〉은 〈홍명집〉의 속편으로 도선(道宣, 569~667)이 편찬했다.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명집〉에 실지 못한 것을 첨가하였다. 두 책 모두 삼교회통이라기 보다는 호법론(護法論)에 가깝다. 다음 유불융합을 주장한 이는 수나라 때, 천태 지의이다.

삼교합일, 양代 승우가 첫 주장
천태지의 유불 유사점 찾아
뒤이어 종밀이 삼교회통 주창해
유학자들이 선사상 영향 받기도

태 지의(天台智?, 538~597)는 ‘마음의 약’으로서 세간의 도덕에 관해 “만약 깊이 세간의 도덕을 알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곧 불교의 5계, 5상(五常, 인의예지신), 5행(五行, 목화토금수), 5경(詩經·尙書·春秋·禮記·易經)이 대응하며 양자의 교설이 상통함을 주장하였다. 지의는 유교나 오행설을 근본적으로는 불법(佛法)이라고 보았다. 그는 불교실천론을 정립하는데 있어 중국의 모든 사상을 받아들이며, 불교와 유사점을 찾아 체계화하였다. 지의의 사상을 이어 유불도 융합을 주장한 인물은 당대의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이다.

종밀은 〈원인론(原人論)〉으로 불교 입장에서 유교·도교를 회통시켰다. 그는 불교의 심성(心性) 입장에서 유교윤리를 포섭해 종합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종밀이 주장한 유불회통은 한유(韓愈, 768~824)의 사상을 본받았다고 본다. 그런데 한유는 불교를 오랑캐 종족의 사상이라며, 불교를 단호하게 비판했다.이후 송대로 접어들어 최초로 유불융합을 주장한 이는 불일 설숭(佛日契嵩, 1007~1074)이다. 그는 불교 입장에서 유교를 일치시킨 〈보교편(輔敎篇)〉을 지었는데, ‘유교의 5상은 불교의 5계·10선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다. 설숭은 한유의 지나친 배불에 항거해 불교의 존재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한 것이다. 설숭과 동 시대 인물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유교만이 참된 국가 이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후에 설숭에게 감화를 받아 불교를 옹호했다. 이 구양수는 당송 8대 문장가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붓과 종이를 살 돈이 없어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가르쳤다고 한다. 10세 때 당대 한유의 글을 읽은 것이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진사를 시작으로 관료파의 중심인물이 될 만큼 높은 관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많은 시와 저서를 남김으로서 후대 사람들과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구양수는 생전 〈화엄경〉 전권을 다 읽을 만큼 신심이 깊어 ‘육일(六一) 거사’라 칭했다.

설숭에 이어 유불융합을 주장한 이는 운문종의 중흥조이자, ‘100칙 송고’를 저술한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이다. 설숭과 중현은 모두 운문종 승려로서 송나라 초기의 국가 이념인 유교주의를 자신의 이론에 절충한 선사들이다. 또 남송대로 접어들어 장상영(張商英, 무진거사, 1043~1121)이 〈호법론護法論〉을 저술했는데, 이 논은 대장경에 입장入藏될 정도로 뛰어났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기, 환암 혼수(1320~1392)가 승준과 만회에게 명하여 장상영의 〈호법론〉을 청룡사본으로 간행하였다.

물론 사상적으로 철학적인 입장에서 삼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시대적인 위기감에서 불교를 보호하는 차원이 더 강했다고 보인다. 우리나라도 유불도 삼교 일치를 주장한 이들이 많다. 삼교일치는 조선시대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함허 득통(1376~1433)은 〈현정론〉을 저술함으로서 삼교일치 사상을 주장했는데, 득통의 삼교융합론은 유가의 배불론을 반격하면서 삼교의 조화론적인 입장을 보이며 불교를 현정(顯正)시키고 있다. 조선 중기 서산 휴정도 〈삼가귀감〉을 통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휴정은 삼교가 모두 근원적인 마음을 구명(究明)하고 그것을 개발하는데 역점을 두어 그들이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송대 문치주의와 찬녕의 불교관

앞에서 말한 대로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이 무렵, 절강성 항주 태수의 원조와 권력에 힘입어 국사가 된 찬녕(贊寧, 919~1002)은 계율에 정통한 불교 학자로서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시도했다. 곧 율과 유학에도 뛰어났던 인물로 〈승사략(僧史略)〉이나 〈송고승전〉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선사의 행적을 해설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국왕의 권력을 제일’로 하고, 불교를 그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권력의 도움 없이는 불교가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송 태조가 수도 상국사에 행차했을 때의 일이다. 황제가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 하고 질문했을 때, 찬영은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부처님께 예배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제도 신심으로 예배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황제는 우리들의 현 부처님이십니다. 그리고 불상은 과거의 부처님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녕과 다른 승려가 있다.

여산 혜원(廬山, 334~416)은 여산에서 산문 밖을 나오지 않고 30여년을 수행한 승려로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하였다. ‘승려는 황제에게 예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승려는 삼계도사요, 사생자부가 되기 위한 출가자로서 세속 왕에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수승한 경지의 소유자임을 의미한다. 두 분을 비교코자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승려가 재빠르게 시대에 순응하기 보다는 굴하지 않는 자존감이 더 돋보인다.

송학과 선종과의 관계

우리나라 조선은 유교주의 정책을 표방함으로서 불교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송나라도 유사하지만,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불교 말살정책을 펼친 것은 아니다. 송학(宋學)은 불교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불교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송대 불교는 색깔만 달라졌다고 보면 맞을 듯하다. 곧 당대 선사상의 영향으로 유교의 송학이 발달된 점은 모든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당나라 때의 유학자들도 선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철학을 구축했다. 앞 원고에서 당대 한유나 이고(李헗)·유종원(柳宗元) 등을 언급했다.

한유는 〈오원(五原)〉을 주장해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탐구했다. 이고도 〈복성서(復性書)〉를 통해 불교적인 관점에서 유교이론을 저술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회복, 본심ㆍ본성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 사상을 주장했다. 당시 한유의 문하생들이 이고의 〈복성서〉를 읽고 이렇게 탄식했다. “아아, 이고도 가고 말았구나(불교로 귀의). 우리 유교도 이제 쇠퇴하겠구나. 통탄할 일이다.” 선사상에 영향을 받은 당대 유학자들의 사상을 본받아 송대 이후의 문학과 철학에 새로운 경향이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특히 이고(?~844)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이고의 철학에서 송학의 선구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송학은 내용적으로 불교가 개척한 심성(心性)의 사변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송학은 불교의 이름을 칭하지 않는 중국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주자의 불교비판과 같은 것은 거기에서 문제 삼고 있는 지식이 거의 모두 선(禪)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은 “중국 사상가들은 불교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사상사에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은 종밀”이라고 하였다. 즉 종밀이 송학 및 양명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종밀이 지(知)를 보편적인 원리로 삼은 것처럼, 주자는 이(理)를 종지로 삼았다. 또 종밀은 마조(709~788)의 견성(見性)·작용(作用)에 대해 비판했는데, 주자는 불교를 비판하는데 종밀 사상을 활용하였다. 종밀은 역설적 의미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길잡이 노릇을 한 셈이다. 불교를 하락시키는 주자학의 주춧돌을 종밀이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송대의 몇 유학자들의 사상을 보자.

정명도(1032~1085)는 “인(仁)을 알아야 한다. ‘인’이란 혼연물과 동체이다. 천지의 상(常)은 그 마음이 만물에 빠짐없이 미치지만 무심(無心)하다.”고 하였다. 유교의 어구로서 불교의 뜻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주자는 송학과 선과의 차이에 대해 “송학은 마음에 바탕해 이치를 구명하고, 이치에 따라서 사물에 응하려고 하는 것이다. 선학은 마음으로서 마음을 구하고, 마음으로서 마음을 부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유학자들의 계보를 보면, 한유·이고·유종원→구양수→정명도·정이천→주자·육상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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