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안 스님 보디야나선원장

주제 : 순수한 앎, ‘참 나아니다

명상센터 보디야나선원 선원장 혜안 스님은 112일 일요정기법회 참나에 대한 바른 견해를 주제로 법문했다. 혜안 스님은 견성성불 및 영원불멸의 참나에 대한 견해는 사견이며 부처님 가르침은 참 나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영원불멸한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 즉 무아를 깨닫는 것이라 강조했다.

혜안 스님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통도사 청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국내 선원과 태국,스리랑카,미얀마,호주 등의 사찰 및 수행처에서 정진했다.아잔 브람 스님과의 인연으로 호주의 보디냐나사원에서 수행했다.현재 해운대 청사포에 위치한 보디야나선원(해운대불교명상센터)에서 불교명상을 지도하고 있다.저서는〈마음 다루기 수업〉,역서로 아잔 차 스님의〈반조,마음을 비추다1, 2〉와 아잔 브람 스님의 명상지침서인〈놓아버리기〉가 있다.
  • 영원불멸한 실체가 없음아는 것

저희가 계속 사념처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심념처, 마음에 대한 숙고를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불교 수행에 대해 참선에 관한 법문도 듣고 책도 보는데요. 흔히 견성성불, 성품을 알아야 한다, 영원불멸한 참 나를 알아야 한다고 많이 듣습니다. 사실 불교적인 깨달음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원래 부처님의 말씀과는 다른 식으로 목표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선 등을 통해 본래면목 혹은 영원불멸한 진아(眞我)’를 알아야 된다고들 하는데요.

예를 들어 오늘날 법회에 나오게 한 그것이 무엇이냐, 차를 마시게 하는 이놈이 누구냐, 소리를 들으면 소리를 듣는 그놈이 무엇이냐,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습하거나 불쾌하거나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그놈이 무엇이냐 하면서 그것을 바로 아는 게 불교의 목적이고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내가 죽고 나도 영원히 불멸하는 그것이 참 나인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처럼 생사윤회를 돌고 돈다. 참 나를 알아야 완전한 자유인이 된다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은 참 나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영원불멸한 나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영원불멸한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목적입니다. 무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숙고, 마음에 대한 숙고, 느낌에 대한 숙고, 마음 대상에 대한 숙고 이 네 가지는 우리의 정신과 물질, 오온입니다.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에 실체가 없고 나에게 속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이걸 배웁니다. 사념처 수행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통의 원인인 탐··치가 완전히 소멸되고 집착, 번뇌가 완전히 소멸되면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불교의 목적입니다. 그러다보니 약간 왜곡된 면도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잘못된 견해를 자세하게 설명한 경전이 있습니다.

디가 니까야인데요, 그 첫 번째 장이 범망경입니다. 범망경에는 62가지 사견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과거에 대한 18가지, 미래에 대한 42가지 사견인데요. 62가지가 모두 사견이라 밝히는 경전이 범망경입니다. 다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영원불멸의 나를 인정하는 사견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라고 집착하는 것이, 아무리 고귀하고 아무리 일상의 차원을 넘는 경지라도 무엇이라도 라고 집착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사견이라고 분명히 설하십니다. 경전에 명백하게 예시되어 있습니다. ‘참 나라 여기는 것은 무조건 사견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한, 아라한 또는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이라고도 합니다.

그 첫 번째 예류자 혹은 수다원의 경우에 무엇이 기준이 되냐 하면, 성자의 초입단계 기준은 유신견, 가 있다는 관념이 사라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계금치라 해서 와 율에 대한 집착이며 그 다음이 부처님이나 법에 대한 의심이 사라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유신견, ‘라는 실체가 있다는 관념이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것을 일시적으로 알게 되고 사라지면 수다원과이고 완벽하게 사라지면 아라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첫 번째 예류자가 되기 위해서도 유신견, ‘라는 실체의 관념이 깨져야 합니다.

 

  • ‘doer’‘knower’

그럼 수행 중 라고 여기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요? 여기서 행하는 자아는 자라 표현한, 영어로 하자면 ‘doer’‘knower’에 해당합니다. 오늘 법회에 오셨는데요. 동기를 유발하는 의지, 즉 내 행동이나 생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의지에 해당하는 것을 doer라 표현하고, 이것을 또 자신이라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법회에 오게 하고, 밥을 먹게 만들고, 공부를 하게 하고, 나의 생각을 일으키고, 나의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를 참 나라 여기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알아차림이 강해질 때 이런 것들을 명백하게 볼 때가 있는데 그 때 이것을 참 나라 여기면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좀 더 차원 높은 것인데 knower, 즉 아는 것을 참 나라 여기는 것입니다. 추우면 추운 줄 알고, 아프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그 기능을 라 여기는 겁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그쪽으로 계속 추구하다보면 나의 생각과 느낌, 행동을 아는 근본적인 나를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것을 라고 여깁니다. 살아서도 영원한 것이고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는 라고 착각합니다. 본래면목이라 착각합니다. 이 두 가지 케이스가 가장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미세하고 정제된 차원 높은 것이라 해도 라고 여긴다면 잘못된 견해입니다.

 

  • 참 나욕망 버려라

저희가 불교 수행자로 출가 입문을 한다는 것은 세속에서는 궁극적인 진리를 알기 힘들다는,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속에서의 좋은 것,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집 등이 허망하고 부질없음을 알고 수행자는 그걸 버릴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면서 앞서 말한 것들은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 것을 버렸기에 반대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바라게 됩니다. 그것이 영원한 나, 죽고 나서도 영원불멸한 참 나’, ‘진아를 생각하면서 이것을 진짜로 여기며 우주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겠구나라며 추구할 목표로 삼습니다.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이런 내용들이 묘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에 대한 집착이 아무리 정제된 것일지라도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똥이 있습니다. 똥이 한 무더기 있다면 냄새가 엄청나겠지요, 하지만 똥이 손톱만큼만 있어도 냄새는 납니다. 냄새 나는 건 같습니다. 밖에 거친 욕망 덩어리인 물질이나 명예나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은 똥 무더기를 보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황금색 같고 윤기도 나고 크기가 작아서 소중하게 여길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 것을 취했는데 그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일 뿐입니다. 작은 손톱만한 똥이라도 손에 쥐면 냄새가 납니다. 행하는 자, 의지를 아는 것도 결국은 일반적인 차원보다는 높지만 그것조차도 고통의 원인이요, 크기는 다르지만 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범망경에서 수십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책에서 찟따를 마음이라 말했지만 그냥 마음의 차원이 아닙니다. 수행을 통해서 5가지 감각 영역, 안이비설신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5가지 감각 영역을 삼매와 선정을 통해 완전히 벗어나 순수하게 아는 것을 찟따라 합니다.

찟따참 나라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것조차도 무상하며 일시적입니다. 그러면서 라는 집착을 깨버리는 것이 사념처 가운데 세 번째인 심념처, 마음에 대한 숙고입니다. 선정을 통해 강력한 알아차림을 계발하면 선정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앎이라는 게 연속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책에서는 이것을 모래사장에 비유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모래가 쭉 하나의 덩어리처럼 이어져 있어 보이는데, 하지만 자세히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하나하나의 알갱이로 되어 별개의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앎도 일상에서 보면 항상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서 참나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 챙김이 강력해 졌을 때는 이것이 일어났다 사라짐일 뿐이라는 것 알게 됩니다. 이게 일상의 차원에서는 보면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분명한 건 이라는 것,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 knower라는 자체가 참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본래면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각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금방 사라진다 것을 압니다. 아는 것도 조건에 따라 사라집니다.

생각, 감정도 하늘의 날씨처럼, 궂었다 개었다 추웠다 더웠다 하는 날씨 변화처럼 생각이나 감정이 무상함을 알게 하는 겁니다. 이런 앎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순수한 조차도 무상합니다. 선정을 통해 5가지 감각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야 실체를 알 수 있는 차원 높은 것이고, 이정도 차원이 되면 다른 종교에서는 성자에 이르는 수준이지만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하더라도 순수한 앎은 무상합니다. 이것도 실체가 없습니다. 이런 앎도 수증기가 모여 구름을 형성하고 조건들이 모여 비가 내리고 여러 조건들에 따라 날씨가 덥기도 하듯이 앎도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아라는 것을 아는 것이 차원 높은 위빠사나이며 고차원의 사념처 수행에 속하는 것입니다.

자아라 여기며 라고 여기는 것도, , 느낌, 아는 것, 의지도 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의지나 순수한 앎도 가 아닙니다. 조건하에 존재하는 걸 알면 예류자, 수다원과이고, 항상 라는 실체가 없다는 걸 자각하면 아라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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