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는 바다로 흘러든다

란저우, 실크로드 요충지 ‘유명’
병령사 석굴, 서역행 주요 지점
서진~청대 1500년 걸쳐 조성돼

병령사 석굴 제169굴과 만리장성 서쪽 관문 가욕관 입구. 모두 진광 스님이 순례 중 스케치한 그림들이다.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란저우(蘭州)는 중국의 심장인 황하(黃河)가 가로지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황하의 누런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당대의 서역개척자인 장건(張騫)의 웅혼한 문장이 떠올랐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사태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를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어 장장 8,800리 황하를 이룬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김구 등 임정요인 귀국환영회에서 이를 들어 감격을 표현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문장을 보면 불교나 선불교, 혹은 조계종의 역사를 보는 듯 가슴 뭉클한 심정이다. 그 옛날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나 천축으로의 구법을 했던 숱한 천축구법승들과 대당유학승들이 생각나서다. 그들의 피땀 어린 구도열과 위법망구의 보살행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불교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금 한국불교와 우리 자신은 황하에 비유하면 과연 어디쯤에 서 있고, 어느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황하가 바라보는 곳에 황하의 여신이 아이를 안고 있는 석상이 있다. 마치 관세음보살이 선재동자를 품고 있는 듯하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구법여행을 하는 것이 우리의 순례와 비슷한지라 무장무애와 원만회향을 빌어본다. 황하에는 양의 내장에 바람을 집어넣어 잔뜩 부풀린채, 여러 개를 엮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다닌다. 문득 이곳에서 평생동안 선자화상(船子和尙)처럼 뱃사공이 되어 미혹한 이를 피안의 언덕으로 이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병령사(炳靈寺) 석굴로 가려면 보트를 타야한다. 유가협 댐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병령사 석굴은 소적석산(小積石山)에 있는데 실크로드의 길목인지라 승려와 상인들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곳에는 183개의 석굴에 불상이 776체나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서진에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1,500여 년에 걸쳐 조성된 것들이다.

대부분의 석굴들이 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과 벽화 등을 조성한 것과는 달리, 병령사 석굴은 굴을 파지 않고 암벽 자체를 조각한 마애불이 많은 게 특징이다. 이곳의 백미는 단연 제169호 석굴이다. 석굴이 가장 크고 불상이 가장 많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제171호굴에는 높이 27m의 현암좌불의 대불이 있다. 그 앞에서 대중이 모여 부처님께 예불을 올렸다. 반대편에서 바라다보면 대불 아래 예불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고 한다. 매양 느끼는 것이지만 스님들이 한데 모여 예불 드리는 모습만큼 장엄하고 감동적인 모습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의식 자체가 불교를 보여주는 문화이자 전법교화의 방편인 동시에 불교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예불 올리는 스님들조차 감동해 눈물을 다 흘릴 정도이다.

우리 일행 중에는 청출(청암사 승가대학 출신)이 7명이나 함께 순례를 왔다. 그들이 우리 1호차에 동승하게 되었는데 일명 ‘칠딱서니파’가 그들이다. 아직 젊어서인지 철딱서니는 없어도 그 자체로 신선하고 활달한지라 보기에 참 좋다. 이 스님들이 마치 여고생 수학여행이라도 온 듯이 천방지축에 난리법석이다. 그래서 “누가 너희들 두목이냐”고 물으니 당돌하게도 “혜총 스님(조계종 前포교원장)이요”라고 한다. 어쨌든 우리 순례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가욕관(嘉度關)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으로 유일하게 건설 당시 그대로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최동단의 산해관(山海關)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칭하고, 가욕관은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부른다. ‘천하제일웅관’ 글씨는 중국불교협회장을 지낸 작고한 조박초(趙樸初) 선생의 웅혼한 필체이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용을 보는 듯 천의무봉의 솜씨이다.

가욕관성에 오르니 멀리 기련(祁連)산맥의 설산 영봉이 끝없이 이어지고, 눈을 서쪽으로 돌리니 실크로드 사막길이 몽환처럼 아른거린다. 이 성을 나서면 이젠 미지의 사막이자 목숨을 건 사투가 끊임없이 펼쳐지리라.

당대 왕창령의 ‘종군행(從軍行)’이란 시에 “푸른 바다 긴 구름 설산을 가리고 외로운 성채에 올라 아득히 옥문관을 바라본다. 사막에서의 온갖 싸움에 황금옷 다 헤어져도 누란을 격파하지 않고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라는 글이 생각난다. 아마도 이곳에 선 천축구법승의 마음도 이와 같았으리라. 어쩌면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떠났을까?

나도 그 천축구법승의 마음으로 길 위에 섰다. 당대 왕지환의 ‘등관작루’라는 시에 “해는 서산에 지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든다. 천리를 보고자 할진댄, 다시 한 층 누각을 더 오르거라(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라고 했다.

누군가는 시대와 역사를 앞서 나가며 새로운 모험과 도약을 이루어야만 한다. 한층 누각을 더 오르는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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