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국사대부와 선종의 관계

‘사대부’ 개념·명칭 송대 완성
가장 걸출한 지식층 집단 성장
선승과 만남 문화발전 시너지
어록·공안 등은 또 다른 문학

 

중국의 사대부들은 정치ㆍ경제ㆍ역사ㆍ문화ㆍ예술ㆍ사상 등 각 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치ㆍ경제의 주체자로, 때로는 역사를 선도하는 선구자로, 때로는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하는 선도자로, 또 때로는 상층부와 하층민을 잇을 중추로 각 시대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과 본분을 충실히 지켜왔다. 때로는 그 역할을 충분히 이루어내지 못함으로써 역사의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이들은 중국 역사에서 그들의 위치에 걸맞은 행동과 실천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대부들과 불교의 만남은 그야말로 중국역사를 한 단계 더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중국문화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으며, 그들과 선사들의 만남은 또 다른 세계를 눈뜨게 해 주었다.

중국 사대부의 의미에 대해서 시대별로 짚어보고, 그들의 역할 내지 사회적 지위와 속성에 대해서 알아보고, 아울러 그들과 불교 및 선종의 관계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중국역사에서 사대부는 고대 사회에서 매우 덕망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통칭이다. 과거제도를 통해서 선발되는 사람들로서 국가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사회의 상층문화와 예술세계를 창조하고 전승했던 사람들이다. 사인(士人)이라고 하면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지만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계층으로 지식분자 혹은 독서인(讀書人)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문헌인 〈주예(周禮)〉에서 사대부에 대한 소개를 보면 “앉아서 도를 논하는 것을 왕공이라 이르고, 지어서 행하는 것을 사대부라고 이른다”고 했으며, 역시 〈주예〉에서 말하기를 “사사(師帥)는 모두 중대부요, 여사(旅帥)는 모두 하대부요, 졸장(卒長)은 모두 상사요, 양사마(兩司馬)는 모두 중사요, 그러나 군장(軍將) 모두를 통솔하는 이는 사대부이다.”고 했다.

중국 문헌이 밝히고 있는 사대부의 속성을 살펴보면 보면 다음과 같다. 주(周)나라 초에 사(士)는 노예제도에서 일종의 계급이 있는 신분이었다. 즉 경대부(卿大夫)의 아래 서민(庶民)의 위(上)였다. 대다수가 경대부는 적자가 아니었으며, 서주(西周)의 가장 낮은 계급의 귀족이었다. 춘추전국시대 군웅이 활개를 치던 시대에 각 제후국에 돈과 명예와 부가 있는 제후귀족들은 ‘양사(養士)’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그 가운데서 춘성군(春信君), 맹상군(孟嘗君) 등이 가장 유명하다. ‘양사’란 나름대로 한 가지씩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들을 말한다. 그 당시는 귀족들이 양사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때로는 양사들이 수천 명이 되기도 했다. 각 제후 간에 서로 비교하면서 많은 재주꾼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었다. 그 예로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는 고사도 생겨났으며, 심지어 이들은 자칭 재주 있다고 제후귀족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이들을 지칭해서 사족(士族)이라고 한다.

그림, 강병호

 

〈논어〉에서 공자가 제시한 사(士)에 대한 표준이론을 보면 “자공(子貢)이 묻기를 ‘무엇을 일러 사라고 합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어디에서든지 군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을 사라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士)와 ‘군자(君子)’는 때로는 기본적으로 중첩의 의미가 있다. 만약에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워 보면 ‘사(士)’덕행과 수행방면에서 군자보다 비교적 떨어진다. 사(士)는 비교적 의지 정의감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사(士)’를 실천하는 정신은 ‘협사(俠士)’라는 표현이 더욱 마땅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진시황 영정(墨政)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자객 형가(荊軻)를 들 수가 있는데, 그가 진시황제를 죽이려고 출발하기 전에 비분강개해서 읊은 시로 “바람소리 쌩쌩하고 역수의 물은 차갑기만 한데, 장사(壯士)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사실 그는 군왕의 사명을 받들고자 자기의 생명은 초개와 같이 여기고, 호방한 기개와 고결한 성품을 겸비한 일종의 모범적인 정신을 소유한자로서, 공자가 앞서 제시했던 ‘사(士)’의 면모와 일치한다. ‘사(士)’의 정신을 실천한 또 다른 형태는 은사(隱士)들로서, 이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좌산관호문(坐山觀虎?)을 했다. 때문에 백성들은 은사들의 가치관에 대해서 존경과 신비의 눈으로 그들을 앙모하고 바라보았다.

한대의 유교는 지식분자들에게 입세(入世)해서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관하고 군왕과 나라에 진충보국할 것을 장려했다. 한대에 관원을 선발하는 제도는 비교적 원만하였다. 중요한 것은 왕공귀족이 추천한 인품이 고명한 인재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효(孝)가 출중하든가 무엇인가 뛰어난 재주와 식견이 있으면 시험을 치르지 않고 바로 발탁되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유명한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출현하는데 그 뿌리는 위에서 말한 사(士)문화 은사문화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죽림칠현은 매우 지식이 높은 지식분자들로 학문과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품격이 고상한 도덕적 수양과 절조와 지개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으로 어디에도 구속 받지 않고 자유분방하였고, 때로는 방종한 행위로서 예법을 지키지 않기도 했다. 이들 중에는 술에 절어서 죽은 이도 있다. 그들은 부패한 조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적 기개는 공자가 말한 사(士)를 조금 더 보충한 것으로, 그들은 조정이 부패하면 그들과 함께 섞이기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고상한 기질을 여과 없이 나타냈다. 반면에 이들은 이러한 울분을 삭이기 위해서 문학예술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것은 사(士)의 절조이자 은(隱)이었다. 이러한 정신의 일부분은 노장철학의 자연무위에 모태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비록 수당시기에 과거제도가 생겼지만 진정으로 관원이 되는 유일한 경로는 송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송대 정주이학(程朱理學)이 진일보 발전하면서 유학사상도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 했다. 소위 신유학의 시대가 열렸다. 과거제도의 완전함은 관원이 되는 가장 합법적이고도 유일한 경로가 되는 제도였다. “공부를 마친 후에 그 지식을 합당한데 사용하라(學而優則仕)”와 “모든 것은 다 품격이 낮다, 오직 독서만이 바른길을 갈 수 있다”라는 구절은 지식분자들이 신봉하는 격언이 되고 말았다. 반면에 정부관원은 반드시 유가경전을 충분히 알고 소화할 때 비로소 문화인이라고 칭했다. 이것은 정치제도가 사대부들을 보장해주는 합법적 정책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대부는 당시 사회의 가장 걸출한 인재인 지식계층의 집단이었다. 이 지식계급집단은 나라의 각종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사대부라는 정확한 개념과 명칭 및 계층은 송대에 와서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송대 이후 대다수의 사대부는 “나라를 위해서 진충보국하고 황제의 은해에 보답해야하고, 나라를 위해서 죽을 때까지 온힘을 다해야한다.”고 하는 숭고한 도덕적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송대의 간화선 창시자 대혜종고도 “보리심이 곧 충성심”이라는 구호를 왜치기도 했다. 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이들은 문화적 소양으로 문학 서예 회화 전서 골동품 수집 등의 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전통문화 계승과 동시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송대의 사대부 문화중의 전형적인 예로서 문인화(文人츐)를 들 수 있는데, 문인화는 다른 말로 사부화(士夫츐)라고 하기도 한다. 화중에 문인의 정취와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다만 문인화의 정식적인 명칭은 원대의 화가 조맹부(趙孟?)가 제시한 것이다. 특히 송휘종(宋徽宗)은 자신도 예술가였지만 사대부들에게도 회화 창작에 몰두하도록 대대적으로 장려를 하기도 했다. 송대 이후 역대 대시인(大詩人), 대화가(大츐家), 대서법사(大書法家)들은 모두 정부의 관원들이었다. 소식(蘇軾), 미비(米騈ㆍ서예가), 채경(蔡京ㆍ서예가) 등이었다. 당나라 때 이백(李白)과 같이 모두 정치적 경험이 있는 인물들로서, 이러한 전통은 청말까지 이어져 왔다. 청말 이후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적인 관념이 바뀌면서 사대부도 점점 역사의 명사로 남게 되었다.

선종이 자주 주장하고 사용해온 ‘교외별전 즉심즉불 직지인심’이라는 독특한 사상적 관점을 한층 더 심화된 이치로 풀어내고, 혹은 철학적 사상적 이치로 표현하면서, 사대부들로부터 더욱더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선종의 선사들 가운데 본래 문학적 재능을 겸비한 인물들이 즐비했다. 큰 틀에서 보면 어록, 공안 등의 창작은 일종의 또 다른 문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창작을 할 수 있었던 기본 바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중국의 사대부들의 영향 내지 선사들이 일정부분 어느 정도의 교양과 소양 및 지식수준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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