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목포 유달산 홍법대사상

1897년 개항한 목포… 변화 급격
개신교, 日불교 등 포교활동 전개
유달산 정상 홍법대사마애상 조성
88영장 만들어 시코쿠 순례 재현도

1995년 철거 시도 있었으나 불발돼
잔재와 흔적 사이 무엇을 봐야 하나

목포 유달산 홍법대사 마애상. 역사상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 중 한 명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개항과 함께 수탈 현장 된 목포
목포는 항구다. 하지만 개항(開港), 항구가 열린 건 그리 오래 전은 아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부산, 인천, 원산이 차례로 열렸고 1897년 10월 목포에 항구가 열렸다. 같은 해에 마산도 개항을 했다. 지금부터 100년 하고 20년 남짓이다.

고종은 목포 개항을 통해 ‘관세 수입을 늘려 정부 재정을 확충하고자 한다’고 했다. 영국, 러시아, 일본 등 영사관을 설치할 계획도 세웠다. 그렇게 관세 수입을 늘려 나라살림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개항을 절실히 원했던 건 일본이었다. 당시 목포는 소위 삼백(三白)항구로 불렸다. 개항이 되자 쌀, 면화, 소금이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다. 개항 당시만 해도 ‘공식적’으로 나라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을미사변(1895년) 이후 2년 뒤였다. 뭘 어쩌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일본의 배들만 이 항구로 몰려든 것은 아니었다. 목포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 기록에 의하면 미국인, 영국인, 러시아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거개는 일본인이었다. 애초 계획했던 영사관도 일본의 것만 섰다. 

여하튼 작은 어촌 목포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개항 당시 목포 인구는 불과 2800명이었다. 항이 본격적으로 가동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부산항의 부두노동자들이 조금 더 높은 임금과 대우를 위해 목포로 향했다. 목포의 인구는 1916년에 약 8천명, 1929년에 3만 명, 1932년에 5만 명 등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인구가 늘어난 건 당연히 물동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수탈이 심해졌다는 얘기다. 1911년 일본으로 실려 간 쌀은 약 10만 석이었으나 식민 지배의 골이 깊어지자 실려 가는 쌀의 양도 늘어났다. 1929년에는 90만 석으로 증가한다. 9배나 늘었다.

목포에는 늘 인구의 10%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개항 당시 목포 인구 2천8백 명 중 200명 남짓이 일본인이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그 숫자는 5,000명 이상으로 불어난다. 전체 인구 중에 약 2할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는 만호동 주변에 터를 잡았다. 지금 만호동 주변을 거닐다 보면 쇠락한 건물과 간판이 쓸쓸하지만 네모반듯하고 널찍한 도로에 걷는 일이 시원시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계획된 구역이었고 편의시설도 모여 있었다.

반면 거개가 부두노동자들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던 쌍교리 근처 공동묘지 부지는 그렇지 못했다. 1925년 한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모든 시설이 조선인 사는 곳과 일본인 사는 곳을 갈라서 너무 편벽되어” 있었다. “조금만 비가 오면 다닐 수가 없고, 음료수로 말하더라고 수통이 적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십여 명의 사람이 물을 길으려고 둘러서게 되며”, 일본인 화장터를 이곳 바로 옆에 두어 매일 송장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국 노동운동사의 획기적 사건으로 기록된 1903년 목포 부두노동자들의 동맹파업에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

목포 유달산에 홍법대사상과 함께 조성된 부동명왕상. 일본불교는 이곳에 88개의 영장을 만들어 시코쿠 순례길을 재현하려 했다.

종교의 각축장이 된 목포
항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늘자 종교도 같이 들어왔다. ‘종교’라고 했다. 불교가 아니다. 사실상 한반도 내 최초의 종교 각축장이라고 할 만큼 일본 불교, 개신교, 가톨릭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여기에 조선의 불교, 천도교, 시천교 등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호남 최초로 개신교 교회가 들어선 곳도 바로 목포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번화했다는 나주에서 씨를 뿌리려 했지만 철저히 실패한다. 그러다 목포가 항구를 열고 급성장할 기세를 보이자 1897년 목포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선교에 들어갔다. 목포에 외국인 조계지가 생기고 거기에 몇몇 미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1910년에는 석조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이게 그 유명한 양동 교회다. 예의 초기 기독교가 그렇듯 의료와 교육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들의 선교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싶다. 목포의 ‘독립운동가’ 목록에는 두 명 중 한 명꼴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정명여고의 교사와 학생 이름도 많이 보이는데, 역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였다.

전라남도 최초의 성당도 이곳 목포에 들어섰다. 알베르도 드애 신부가 1898년 목포에 정착하면서 가톨릭의 선교가 시작됐다. 목포가 개항되고 2년 후다.

1898년에는 일본 불교의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가 들어온다. 이후 1910년대가 되면 정토종, 진종 서본원파, 일련종, 조동종, 진언종제호파 등 당시 일본의 주요 종파는 이미 목포에 자리를 잡았다. 신자가 대략 60~370호 정도 되었다고 하니 목포에 머물던 일본인들의 거개는 앞에 나온 일본의 불교 종파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는 얘기다.

민족 종교인 천도교 그리고 친일의 성향이 강했던 시천교도 목포에 신도가 있었다. 물론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한창 때 신도수가 천도교는 175명, 시천교는 270명이라는 조사가 있다. 1927년에 두 종교는 일본에 의해 해산되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나 가톨릭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 진력했고 바다를 넘어 들어온 일본의 불교는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목포에 조선인이 세운 사찰은 달성사, 영명사 등 네 곳뿐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목포의 불교세는 아주 취약하다. 그나마 일본불교인 한국SGI 등이 조금 활발한 활동을 할 뿐 전통사찰로는 달성사(조계종) 정도가 유일하고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정광 정혜원 등 한두 곳이 큰스님들의 자취와 함께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유달산. 왼쪽 빨간 동그라미 부분에 부동명상이, 오른쪽 아래 노란 동그라미에 홍법대사상이 있다.

유달산의 홍법대사와 부동명왕
유달산은 해발 228m로 그리 높지 않다. 여기에도 일제강점기, 그리고 일본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흔적이라고 했다. ‘잔재’라고 치부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이라는 홍법대사(774~835)상과 그가 몸에 지니며 항상 공양하던 부동명왕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홍법대사의 인기는 우리나라로 보면 원효대사나 서산대사급이다. 일본 검색사이트에서 ‘불교’를 검색하면 공해(空海)라는 단어를 줄줄이 이어진다. 쿠카이라고 발음하는데 이분이 바로 홍법대사다. 

1984년에 중국과 일본이 공동제작하고 <패왕별희>를 만들었던 첸 카이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가 있는데 바로 <쿠카이(空海)>다. 이 영화는 2018년 재제작되기도 했다. 아예 <쿠카이(空海)>라는 뮤지컬은 일본에서 일 년 내내 간판을 달고 있을 정도다.

이분이 우리 땅 목포, 유달산에 마애상으로 남아 있다. 마애상을 새긴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항구가 열리고 일본인들이 몰려오고 또 일본불교가 따라 들어오면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단순히 홍법대사와 부동명왕 마애상만 안치한 것이 아니다. 더 큰 그림이 있다.

일본에서는 시코쿠 88개 사찰 순례길 1,400km를 걸어서 돌아보는 것을 오헨로(お遍路)라고 한다.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길은 홍법대사가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수행하던 역사적인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길이다. 출가자나 재가자 구분이 없다. 이 길을 순례하는 걸 큰 수행 그리고 행복으로 생각한다. 유달산에도 홍법대사와 부동명왕뿐 아니라 88개의 영장(靈場, 신성한 터)을 만들고 불상을 안치했다. 시코쿠 88개 사찰 순례길을 유달산에 재연한 것이다.

지금도 유달산 곳곳에는 영장에 안치했던 불상을 놓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안치되었던 불상은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하나둘 사라졌다. 몇몇은 박물관 또는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바위에 새겨졌던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은 어쩌지 못했다. 1995년 한 차례 이 마애상들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해는 50주년 광복절을 맞아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 건물이 폭파 해체된 해였다.

목포 사람들 말에 따르면 관에서 마애상을 철거하기 위해 인부들을 데리고 유달산 정상까지 올랐다. 하지만 “철거를 하면 급살 등 화를 입을 것 같다”고 인부들이 손사래를 치자 들고 올라갔던 장비를 들고 그대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후 추가적인 철거 시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잔재’라고 주장하는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지속적으로 철거를 주장했고 ‘흔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문화재 전문가들 그리고 또 한편의 시민단체들은 보존을 주장했다.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니 현재는 ‘방치’ 수준이다. 얼마 전까지도 무속인들이 홍법대사상 앞에서 굿판을 벌였고 마애상에 ‘색칠’을 하기도 했다. 이것도 그냥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목포에는 민간에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유달산 정상인 일등 바위는 사람이 죽어서 심판을 받는다고 해서 율동(律動) 바위라고 부른다. 그 밑에 이등바위는 심판을 받은 영혼이 대기하는 곳이다. 극락세계에 가게 된 사람들은 일등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고하도에서 용선을 타고 간다. 고하도 앞부분은 용머리 모양이 선명하다.

식민지 시절의 아픈 과거의 장면을 계속 상상하게 돼 유감이지만 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을 이야기했던 홍법대사가 이곳에 있는 게 우연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목포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핫플레이스’다. 舊 일본 영사관, 舊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본인 조계지를 걸으며 역사를 회상하는 코스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딱 그런 차원에서 만큼이라도 봐주면 더 이상의 시비는 불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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